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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서울대

  • [교수칼럼]
  • 2015-08-17
  • 조회수 5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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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사도세자와 정조를 가르친 스승

서명응(1716~1787)과 사도세자의 인연은 1747년(영조 23)에 시작되었다. 이 때 서명응은 동궁을 호위하는 세자익위사의 세마洗馬로 임명되어 사도세자를 보좌했다. 1754년에 사간원 정언 서명응은 사도세자에게 학문과 정치의 방략을 요약하여 제시한「진치법서進治法書」를 올렸다. 당시 사도세자는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서명응은 이 글에서 ‘세자의 뜻을 크게 펼쳐라[奮睿志]’라는 취지하에 강학을 밝히고, 성실함에 힘쓰며, 안일해 지려는 욕구를 경계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길을 넓히라고 제안했다. 또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면서 국가 전례를 바로잡고, 학교를 일으키며, 관리의 선발제도를 고치고, 전쟁 능력을 키우라고 조언했다. 서명응이 올린 글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영조실록』에는 그 전문이 수록되었다.

서명응과 정조의 인연은 1761년(영조 37)부터 시작되었다. 서명응은 성균관 대사성으로 근무하면서 세손 정조의 성균관 입학식 행사를 주관했다. 사도세자가 사망하기 1년 전이었다. 1772년(영조 48)에 서명응은 세손 우빈객이 되어 정조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정조는 세손이면서 동궁의 지위를 겸하고 있었다. 서명응은 정조의 교육을 위해 『계몽도설啓蒙圖說』,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 『자치통감강목삼편資治通鑑綱目三編』, 『주자회선朱子會選』과 같은 교재를 편찬하였고, 이는 청년기 정조의 학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명응은 정조가 경희궁 일대를 학문 수련의 장으로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다. 서명응은 정조가 경희궁에 건립한 서고인 정색당貞賾堂의 기문에서 국가를 다스리는 이치가 책에 담겨 있으므로 서적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정조가 스스로의 마음을 잘 수양하여 덕德을 좋아하고 욕구를 물리치는 일이 더욱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서명응은 정조가 장차 조선의 문운文運을 크게 일으키려는 의도를 가졌음을 파악했고,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할 때에는 가장 신임하는 핵심 측근이 되었다.

최초의 규장각 제학

1776년 국왕이 된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창설하고, 서명응을 규장각 제학에 임명했다. 당시 서명응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규장각 제학을 겸했다. 정조는 지방관이 관문전觀文殿의 태학사太學士를 겸했던 송나라의 고사를 거론하며 서명응을 특별히 발탁했다.

서명응은 이제 막 설립된 규장각의 최고 책임자로서 그 기반을 다지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서명응은 규장각 활자를 주조하고 교서관을 규장각에 이속시켜 출판 기능을 부가했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활자에는 태종대의 계미자와 세종대의 갑인자가 있었다. 그러나 두 활자는 세월이 흐르면서 유실된 것이 많아 인쇄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서명응은 1772년에 세손 정조의 스승으로 있으면서 임진자를 주조했다. 정조는 갑인자를 자본字本으로 한 활자를 주조할 것을 주문했고, 서명응은 궁중에 남아있던 갑인자의 목본木本과 정조가 하사한 『심경心經』을 활용하여 15만자의 활자를 주조한 후 교서관에 보관했다. 1777년(정조 1)에 평안감사 서명응은 정조의 명으로 갑인자를 자본으로 한 정유자 15만자를 주조하여 규장각에 보관했다. 이로써 서명응은 총 30만자의 활자를 만들었고, 정조는 이 사업이 갑인자를 만든 세종의 뜻을 계승한 것이라 평가했다. 1782년에는 서명응의 아들 서호수徐浩修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임인자 8만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보관하였다. 이처럼 서명응과 서호수 부자는 정조대의 활자 주조를 주도했다.

서명응은 1779년 무렵에 작성한 「규장자서기奎章字瑞記」란 글에서 ‘활자가 나라의 국보’라고 주장했다. 조선의 활자는 모양이 정교하고 아름다운데다 책을 인쇄하여 수많은 인재를 길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조대 활자 제작 배경과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우리나라는 세종 조에 만든 활자가 국가를 전하는 부서符瑞가 된다. 아름다운 옥구슬처럼 모양이 고르고 반듯하여, 인쇄해 낸 책이 몇 백만 권인지 모르고, 길러낸 인재가 몇 천 명인지를 모른다. 여러 번의 전쟁을 거쳤어도 끝내 없어지지 않고 국가와 운명을 같이 했다. (중략) 그러나 활자가 전해진지 오래되고 지키는 사람이 잘 보관하지 못해 유실된 것이 열에 여덟아홉이다. 우리 성상[정조]께서 춘궁春宮에 있을 때부터 이를 개탄하고 임진년(1772)에 빈객으로 있던 신 서명응에게 명하여 대조大朝[영조]께 말씀드려 세종조의 활자를 주조했던 목본木本 3만여 자를 찾아내게 했다. 또 궁중에 보관하던 고본古本『심경』 5질을 하사하여 그 유무를 따져 15만 자를 보충하여 주조하게 했다.

이제 왕위에 올라 규장각을 창립하고 신 서명응을 각신에 임명하며 교시하시기를 “규장각은 책을 보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마땅히 인쇄하는 도구(활자)가 있어야 좋은 혜택이 사방에 미치고 사람들의 지식을 계발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평안감영에 활자의 개주를 명령하여 새로 15만 자를 주조하고 규장각에 보관하게 하시니, 이 때 내각과 외각에서 전후로 주조한 것이 모두 30여만 자였다. [『보만재집保晩齋集』 권8, 「규장자서기奎章字瑞記」]

서명응의 문집인 『보만재집保晩齋集』(奎 4376) 권8에 수록된 「규장자서기奎章字瑞記」
서명응의 문집인 『보만재집保晩齋集』(奎 4376) 권8에 수록된 「규장자서기奎章字瑞記」

1777년에 서명응은 국립 출판소에 해당하는 교서관을 규장각에 합속시켜 규장각의 출판 기능을 강화하였다. 서명응은 교서관을 규장각의 외각으로 만들어 창덕궁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전시켰고, 규장각의 관리가 교서관의 관리를 겸하여 그 운영을 주관하게 했다. 당시 정조는 홍문관의 대제학이 교서관의 제조를 겸하게 하자는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서명응은 자신의 견해를 끝까지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서명응은 규장각 기구를 정비하면서 『규장각지奎章閣志』와 『규장총목奎章總目』을 편찬했다. 1777년에 정조는 서명응과 규장각의 운영 경비를 의논하면서 『규장각지』를 편찬하라고 명령했다. 『규장각지』는 1779년에 초본 작성이 마무리되었고 정조는 그 서문을 지었다. 서명응이 작성한 『규장각지』 초본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지』는 이후 여러 차례 수정되었으며, 1784년에 최종본이 완성되어 임인자로 간행되었다. 서명응은 활자본 『규장각지』의 발문을 작성하면서 옛날 주공周公이 향음례鄕飮禮를 통해 『대학』에 나오는 효제자孝悌慈를 실천했듯이 정조는 규장각에서 이를 실천하게 되기를 기대했다.

1781년에 정조는 서명응에게 『규장총목』을 편찬하라고 명령했다. 규장각의 규정이 어느 정도 갖춰진 상황에서 규장각에 소장된 도서 목록을 정리하라는 취지였다. 서명응은 『규장총목』을 편찬하기 시작했지만 이를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규장총목』을 완성하여 정조에게 올린 사람은 서호수였고, 『규장총목』의 범례를 작성한 사람은 서형수徐灐修였다. 서형수는 『규장총목』의 체제가 역대 총서류의 분류 체제를 절충하여 마련한 것으로, 앞으로 수천만 권의 책이 나와도 모두 분류하여 정리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서형수의 자신감은 훗날 서명응의 문집인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를 4부 체제로 분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규장각에 소장된 필사본 『규장총목奎章總目』(奎 4461)
규장각에 소장된 필사본 『규장총목奎章總目』(奎 4461)

규장각과의 긴밀한 인연은 서명응의 후손에게 이어졌다. 맏아들 서호수는 1777년에 북경에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구입해 왔고, 1780년(정조 4)에 규장각 직제학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둘째 아들 서형수는 1783년에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었고, 1799년에는 정조의 명으로 북경에 가서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선본善本을 구입해 왔다. 손자 서유구徐有榘는 1790년에 규장각 초계문신에 선발되어 학문을 수련하다가 1792년에 규장각 대교待敎에 임명되어 국가적 편찬 사업에 참여했으며, 순조 대에 규장각 제학을 역임했다. 서명응은 역학易學에서 독특한 견해를 가졌으며, 서호수는 천문학, 서형수는 경학과 주자학, 서유구는 농학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영조와 정조의 어제를 정리한 서명응

서명응은 1778년에 대제학으로 있으면서『영조실록』을 편찬하는 임무를 겸했다. 그러다가 서명응은 실록 편찬의 책임에서 벗어났는데 영조의 행장을 편찬할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정조는 서명응이 행장의 편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일체의 임무를 면제해 주었고, 자신이 기록해 둔 영조의 유사遺事 60조를 주어 참고하게 했다. 서명응은 30여 년간 영조의 근신近臣으로 활동했던 자신의 경험과 정조의 기록을 바탕으로 행장을 작성했으며, 경종, 영조, 정조 3대에 걸쳐 제왕의 정통성이 계승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글을 맺었다. 서명응이 작성한 영조의 행장은 『영조실록』에 부록附錄되어 있는데, 아래 글은 영조 행장의 끝부분이다.

이제 사왕嗣王 전하[정조]께서 신[서명응]이 학문이 없다고 하지 않으시고 유사遺事와 자료를 모아 행장行狀을 만들라고 명하시니, 신은 황공하여 굴러 떨어질 듯하며 책임을 다할 방법을 모르겠다. 가만히 듣건대 제왕의 대절大節은 오직 마땅한 사람에게 종사를 부탁하는 것뿐이라 한다. 우사虞史가 요전堯典을 만들면서 순舜에게 왕위를 전한 일을 반복하여 상세히 말한 것이 한 편의 반이나 되지만, 세상에서 우사를 천고千古 사신史臣의 근본으로 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은 감히 경묘景廟[경종]께서 왕[영조]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왕께서 전하에게 모든 것을 맡기신 것을 한 편의 위아래에 갖추어 실어, 요전의 단례斷例를 따르고 들은 바를 존중한다. [『영조실록英祖實錄』 부록, 「행장行狀」]

정조는 『영조실록』을 편찬한 후 영조의 보감寶鑑을 작성하게 했다. 영조의 50년 행적이 실록에 고스란히 담겨있지만 이는 공개되지 않는 기록이므로, 영조의 업적 중에서 중요한 것을 선별한 보감을 만들어 세상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조는 역대의 국왕 가운데 보감이 없는 12조朝의 보감을 추가로 만들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완성시켰다. 1782년 『국조보감』의 편찬이 시작되자 서명응은 편찬당상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우의정 이복원李福源과 함께 『국조보감』의 교정을 담당했다.

서명응은 정조의 어제를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규장각은 설립될 때부터 당대 국왕의 어제를 분류하여 정리하는 기능을 가졌고, 규장각 제학이던 서명응은 이 일을 처음으로 맡았다. 서명응이 정조의 어제를 편찬한 것은 1777년 12월이다. 정조는 서명응에게 자신의 문자들이 점점 사라질 우려가 있으므로 어제를 수정하여 올리되 최근에 지은 글로 일기에 있는 것도 모두 포함시키라고 했다. 서명응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은 시문을 정리한 『홍재전편弘齋全編』(12권)을 편찬했으며, 이는 훗날 『홍재전서弘齋全書』의 첫째 편인 「춘저록春邸錄」의 저본이 되었다.

정조의 두 번째 어제가 편찬된 것은 1787년 8월이었다. 정조는 새로 편찬한 어제 60권을 받던 날 서명응이 영조와 정조 2대에 걸쳐 어제를 편찬한 공이 있음을 평가하여 특별히 음식물을 하사했다. 이때 서명응은 집에서 말년을 보내던 중이었고, 서호수가 전임 직제학의 자격으로 두 번째 어제 편찬에 참여했다. 훗날 서호수는 『홍재전서』의 편찬을 총괄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벼슬길에서 물러난 후의 예우

서명응은 1780년(정조 4) 3월에 벼슬길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후 서명응과 서명선徐命善 형제는 당대의 권력자였던 홍국영洪國榮과 심각하게 대립했고, 홍국영이 정계에서 축출될 때 서명응도 함께 물러났다. 서명응이 영조 말년에 역적 홍계능洪啓能과 가깝게 지내면서 서형수를 홍계능의 제자로 보냈다는 비난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정조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서명응의 은퇴식을 성대하게 치러주었다.

1781년에 정조는 서명응에게 만년까지 절개를 잘 지켰다는 의미로 보만保晩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서명응이 1772년에 정조의 정적이던 정후겸鄭厚謙의 위세를 꺾고 대제학에 오르지 못하게 한 것, 영조 말년에 서명선과 함께 정조를 보호한 것, 1779년에 홍국영의 세도를 꺾고 대제학이 되지 못하게 한 절개를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였다.

서명응은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활동까지 그만 둔 것은 아니었다. 1781년에 정조는 규장각 이문원에서 『근사록近思錄』 강회를 열었다. 규장각이 학문 기구로 거듭나게 되는 중요한 행사였다. 서명응은 전임 제학의 자격으로 이 행사에 참석했다. 이후에도 서명응은 정조의 명에 따라 『국조시악國朝詩樂』, 『시악화성詩樂和聲』, 『천세력千歲歷』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다. 1782년에 정조는 후손들이 편집한 서명응의 문집을 읽고 이를 기념하는 시를 지어주었다. 정조의 시는 훗날 『보만재집』이 인쇄될 때 책의 맨 앞에 수록되었다. 다음은 정조의 시이다.

보만재고保晩齋稿를 구해보고 한 수 읊다.

비 지나간 염막簾幕에 남풍 솔솔 부는데
염계恬溪[서명응]의 열 축軸 글을 한가롭게 펼쳐보네.
깨달음은 대부분 삼역三易의 깊은 곳에서 나왔고
전례와 법식에는 아직도 사가四佳[서거정]의 자취를 보겠다.

음양을 착종하여 마음속에 자못 깨달았고
구름가고 물 흐르듯 바탕은 본디 텅 비었네.
보만당 집에서 초고를 일찌감치 구해보니
한 문제가 문원文園[사마상여] 원고 보던 것과 지금을 비교하면 어떨까? [『홍재전서弘齋全書』 권5, 「구견보만재고음기일률求見保晩齋稿吟寄一律」]

규장각에 소장된 서명응의 문집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서명응의 문집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의 문집은 『보만재집』, 『보만재사집保晩齋四集』,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 『보만재잉간保晩齋剩簡』 등 네 종이 있다. 앞의 두 가지는 시문집과 저술을 합한 것이고, 나머지는 저술만 편집한 것이다. 서명응의 문집을 편찬한 사람은 아들 서호수·서형수 형제와 손자 서유본·서유구 형제이다.

『보만재사집』은 문집 가운데 가장 먼저 편집되었다. 『보만재사집』은 전집·후집·좌집·우집으로 구성되며, 분량은 64권이라는 설과 55권이라는 설이 있다. 이 문집의 일부가 최근 해외에서 발견되었으며 전체 규모는 아직까지 파악되지 않는다.

『보만재집』(16권 8책)은 1838년(헌종 4)에 규장각에서 취진자聚珍字로 간행한 것이다. 정조는 1787년 서명응이 사망한 직후에 그의 문집을 규장각에서 간행하라고 명령했다. 자신의 스승이자 초기 규장각의 최고 책임자였던 서명응을 예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보만재집』은 1838년에 가서야 손자 서유구에 의해 간행되었다. 『보만재집』의 제일 앞에는 정조가 지어준 시와 ‘규장지보奎章之寶’ 도장이 수록되어 있다.

『보만재총서』(60권 31책)는 1783년에 서명응이 직접 정리한 것으로 경사자집經史子集 4부 체제로 분류되어 있다. 1786년에 정조는 서호수를 통해 이 책을 빌려보았으며, “조선의 400년 역사 동안 이처럼 거편鋸篇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서명응도 이 책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그는 이 책이 단순한 시문집이 아니라 경학과 역사학, 천문, 지리 등 다양한 방면을 망라하는 종합 저술이기에 ‘총서’라는 이름에 걸맞다고 평가했다.

명나라에는 『한위총서漢魏叢書』 『당송총서唐宋叢書』 『격치총서格致叢書』가 있지만 모두 여러 사람의 저술을 모아 만든 것으로 한 사람의 말이 아니다. 한 사람의 말로 총서를 만든 것은 당나라 육구몽陸龜蒙의 『입택총서笠澤叢書』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시문뿐이고 저술은 거의 없으니 어찌 ‘총서’라 하겠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육경六經의 본 뜻, 하늘과 땅의 법칙, 예악 정법의 유래를 궁구했고 이를 서술한 글들이 모여 저술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자식과 손자들을 시켜 이를 합치고 교정 대조하여 『보만재총서』를 만들었다. ‘보만재’란 우리 성상[정조]께서 나에게 하사하신 호이다.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 권수卷首, 「보만재총서인保晩齋叢書引」]

『보만재잉간����(64권 25책) 『보만재총서』를 편집하면서 빠트린 저술을 편집한 것이다. 서명응은 1784년에 이를 정리했으며, 여기에 수록된 저술은 한가한 시간에 재미로 편찬하거나 왕의 명령으로 편찬했다가 미처 출판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현존하는 『보만재잉간』 필사본은 수정된 문구가 많고 기록 사이에 상충되는 것도 있어 수정이 진행되던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서명응의 문집 가운데 잡록雜錄에 해당하는 부분인 『보만재잉간保晩齋剩簡』. 총 64권 25책 가운데 규장각에는 13책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규장각에는 서명응의 문집 4종 가운데 3종이 소장되어 있다. 『보만재집』은 활자본이므로 규장각을 비롯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 중앙도서관, 고려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만재총서』의 필사본은 규장각과 고려대 중앙도서관 두 곳에만 있다. 규장각의 필사본을 보면 “소화 10년(1935)에 성낙서成樂緖씨 소장본을 필사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대에 소장된 것이 성낙서 소장본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만재잉간』의 필사본은 완질은 아니지만 규장각에 소장된 것이 유일본이며 그 원본으로 추정된다. 이를 보면 정조대에 시작된 규장각과 서명응의 특별한 인연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김문식 교수

글쓴이   김 문 식
  (현)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주요 저서
 『조선후기 경학사상 연구』, 1996, 일조각.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2000, 문헌과해석사.
 『정조의 제왕학』, 2007, 태학사.
 『조선후기 지식인의 대외인식』, 2009, 새문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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