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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애 교수 '공존의 공간을 짓다'

2015.06.26.

학자는 우리 사회가 자꾸만 무언가 상실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백서원(如白書院)은 그렇게 탄생했다.

모두의 이야기가 있는 곳

전영애 교수
전영애 교수

서울에서 1시간 30분 남짓. 전영애 독어독문학과 교수가 작년에 지은 여백서원은 경기도 여주에 자리한다. 서원에 들어서면 요즘엔 쉽게 볼 수 없는 기와집과 그 뒤의 넓은 뜰이 눈에 띈다. 궁금한 것이 많은 서울 방문객들은 도착하자마자 질문을 쏟아냈다. 전 교수는 대답 대신 산책을 권했다. “작은 밭이 하나 있는데, 들어오실 때 보셨나요? 우전(友田)이에요. 친구들 밭
이죠. 오시는 분은 마음에 드는 허브를 따와 서원 안에서 차로 마셔요.” 우리는 1,200평 부지의 넓은 땅을 느리게 걸었다. “이건 괴테송이고요, 저건 시(詩)송, 저기 있는 건 어머니를 생각하며 심은 모(母)송, 여기 가지 많은 건 후학송이에요. 아, 저기 나무는 아침의 지혜이고요. 독일 고전주의 재단에서 오신 분이 이름 지었죠.” 전 교수는 바로 전날에도 100여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그렇게나 많은 나무에 모두 이름을 붙였다. “이곳을 찾아오시는 분들은 나무를 심기도 하고 이름 짓기도 해요.” 나무를 정해 이름 지어도 된다는 말에 다른 사람 것이면 어쩌나 했다. “나무가 많아서 괜찮고, 중복 돼도 큰일 날 것 없습니다.” 소유하고자 짓는 이름이 아니었다.
뒤뜰에서부터 서원을 크게 둘러보다 보면 수많은 시와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제자가 가져온 석류나무를 위해 만든 온실에서부터 독일에서 씨앗을 구해와 심은 낭만주의를 상징하는 푸른 꽃밭, 여백서원을 지을 때 도움을 건넨 분들의 사연이 깃든 석물들. 이곳에 사연 없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기본이 상실된 시대 , 너와 나를 연결하다

괴테 연구자로서 세계적인 반열에 오른 전영애 교수. 뒤늦게 시작한 연구였지만 그녀는 2011년 괴테 연구자들이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 ‘괴테금메달’을 수상했다. 도무지 계산할 줄을 모르고, 몸 아픈 것도 몰라 갑자기 쓰러지기도 한다는 전 교수의 우직함이 그러한 학문적 성취를 만들었을 것이다. 여백서원도 그것에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넓고 좋은 땅을 어떻게 혼자서만 쓰겠어요.” 근처 마을에 폐농가를 집필실로 두고 오갔던 전 교수는 그곳이 너무 좋아 덜컥 서원 부지를 샀다. “이해라는 평범한 단어가 절실해진 시대예요. 남의 입장에 서 봐야 같이 갈 수 있는데, 혼자의 입장만 있죠. 그러면 끝없이 불행해져요.”
함께 살아가는 것, 그녀는 마땅히 지켜져야 할 기본적인 것들이 상실되어 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여백서원이 그러한 상실을 조금이나마 채우길 바랐다. “어머니는 콩이 한 개라도 반쪽씩 나누라고 하셨어요. 끼니가 어려워도 거지에게 쌀을 나누어주던 분이시죠.” 가슴 깊이 그리움으로 간직한 어머니를 떠올리며 전영애 교수는 공존을 위한 배려와 존중은 여유 있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 그러한 의식 속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뒤따라야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타개할 수 있음을 거듭 강조했다.

함께 읽고 나누며 공존을 배우다

공존하지 못하는 사회, 문학이 치유할 수 있을까? “모든 인생을 다 살 수는 없잖아요. 문학은 허구를 통해 진실을 전달하는 기능이 있어요. 치유까지는 아니지만, 문학을 통해 다른 삶을 경험하면서 타인의 입장에 서보는 거죠.” 서울대학교 명강의로 꼽히는 ‘독일 명작의 이해’에서 전영애 교수가 학생들에게 <파우스트>를 고집해 읽게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을 공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책에서 삶의 어떤 실용적인 지혜를 얻진 못해요. 하지만 누군가가 6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여백서원의 매월 마지막 토요일은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다. 정해진 프로그램은 없다. “서원을 찾아주신 분들이 모여서 마음 맞으면 함께 책도 읽고 시 낭송도 해요. 수업을 같지 듣지 않아 서로 모르던 제자들도 여기서 금세 친해져 밤새 이야기 나누기도 하고요. 이 공간의 의미는 오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하기 전 서원을 둘러보며 숨 고를 여유를 선사한 전영애 교수의 배려. 여백서원의 존재 이유를 몸소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너그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의 수필집 <인생을 배우다>의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세상이 무법천지 같아 살아가기 막막하고, 무슨 수든 쓰지 않고는 못 살 듯하지만, 살아보니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도 살아진다. 남을 배려하고 격려하며 살면, 조금 더 잘 살아진다. 쓸데없이 계산하느라, 남들과 비교하느라 힘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제법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도 하다. 내가 거쳐온 시간이, 내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