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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동아시아의 백과전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2015.08.24.

노대환(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1. 우리와도 관련이 있는 『고금도서집성』

『고금도서집성』은 1728년(청 옹정 6)에 중국에서 출간된 방대한 규모의 백과전서이다. 얼마나 방대한가를 짐작하는 데는 몇 가지 숫자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총 권 수는 10,000권, 수록된 글자 수는 대략 1억 6천 만 자이며, 6,484매의 삽화가 들어 있고, 인용된 서적은 6천종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고금도서집성』이 사실상 진몽뢰陳夢雷(1650~1741)라는 한 개인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후일 교정 과정에 다른 이들이 참여하기는 했지만 작업의 상당 부분은 진몽뢰가 맡아서 하였다.

『고금도서집성』은 우리와도 관련이 깊은 서적이다. 『고금도서집성』 원본은 베이징의 중국국가도서관과 타이완의 국립고궁박물원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10여 부 밖에 남아 있지 않은 희귀본이다. 그런데 그 전질이 바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1777년(정조 1)에 청에서 구입하여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던 것이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가 해방 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인수되면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소장 자료가 된 것이다.

『고금도서집성』에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인용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를 끈다. 인용된 부분은 모두 33항목인데 어떤 항목은 전체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였고 어떤 항목은 일부를 발췌하여 인용하기도 하였다. 『동의보감』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고금도서집성』에 인용된 것은 한국과 중국 간의 의학 교류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고금도서집성』은 세계 출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우리와도 관련이 있는 서적이지만 이 책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2. 한 개인의 집념의 산물

『고금도서집성』을 편찬한 진몽뢰는 복건성 출신으로 21세에 진사가 되어 관료 생활을 시작한 후 한림원 편수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오삼계吳三桂를 비롯한 삼번三蕃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에 반대했지만 내응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유배를 가는 등 그리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다행히 1698년(강희 37) 강희제가 동순東巡할 때 억울함을 호소하여 강희제의 명으로 북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북경으로 돌아온 후 진몽뢰는 강희제의 셋째 아들 성친왕誠親王을 보좌하였다. 진몽뢰는 50년 동안 1만 여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할 정도로 학문에 관심이 많고 학식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그는 성친왕의 자문에 응하기 위해 자료를 정리・분류하는 작업을 했는데, 그러던 중 성친왕으로부터 대소大小를 일관하고 상하고금上下古今의 일을 유형별로 분류한 책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황제 계승 경쟁을 벌이던 성친왕이 강희제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유서 편찬 작업을 구상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성친왕의 명을 받은 진몽뢰는 1701년부터 『고금도서집성』의 편찬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성친왕이 내려준 협일당協一堂의 장서와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책 등 1만 5천 여 권의 전적을 바탕으로 “눈으로 들여다보고 손으로 찾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틈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쉴 새 없이 작업을 진행하여 1706년 초고를 완성하였다. 초고의 이름은 『휘편彙編』이었는데 『휘편』은 후에 『고금도서집성』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진몽뢰는 『휘편』을 완성한 후 성친왕에게 ‘진휘편계進彙編啓’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그가 『고금도서집성』을 편찬하게 된 계기와 과정 등이 잘 나타나 있다.

『휘편』은 진몽뢰 스스로 세상의 크고 작은 사항을 모두 거론하였다고 자신할 만큼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스스로 50년 동안 1만 여 권의 책을 섭렵하였다고 할 정도로 학식이 풍부하였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진몽뢰는 자신의 작업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는 참고하지 못한 책들을 더 구해 내용을 증보하고 철저한 교정을 통해 자획 하나도 잘못되지 않게 한 후에 황제에게 올려 서문을 받아 출간하기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진몽뢰의 계획은 1722년 강희제가 세상을 떠나면서 틀어지고 말았다. 성친왕이 황제 계승 싸움에서 밀려남에 따라 그를 보좌했던 진몽뢰는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고 1723년 흑룡강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새로 즉위한 옹정제는 『고금도서집성』의 보완 작업을 장정석蔣廷錫(1669~1732)에게 맡겼고 마침내 장정석의 주도로 1726년 5,020책 분량의 책이 완성되었다. 옹정제는 서문에서 “이 책은 또한 바다처럼 넓고 땅처럼 두터우며 경사와 제자백가를 집대성했다. 이보다 앞선 책들은 미비한 점들이 있었지만 후에 책을 만드는 자가 또 무슨 내용을 덧붙이겠는가”라면서 도서 완비의 극치를 이루었다고 크게 칭송하였다.

편찬이 완료된 후 황실에 직속된 무영전에서 1726년부터 1728년까지 64부를 인쇄하였다. 『고금도서집성』은 6휘편彙編, 32전典, 6,109부部의 체제를 갖추고 있다. 대항목에 해당하는 휘편 아래 중항목인 전, 소항목인 부를 둔 것인데 6휘편은 천문天文을 기록한 ‘역상휘편曆象彙篇’, 지리・풍속의 ‘방여휘편方輿彙篇’, 제왕・백관의 기록인 ‘명륜휘편明倫彙篇’, 의학・종교 등의 ‘박물휘편博物彙篇’, 문학 등의 ‘이학휘편理學彙篇’, 과거・음악・군사 등의 기록인 ‘경제휘편經濟彙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부에는 자료의 성격에 따라 휘고彙考, 총론總論, 도圖, 표表, 열전列傳 등을 두었다. 이렇게 체계적인 체제를 갖춘 유서는 『고금도서집성』이 최초였다.

3. 조선에서 새롭게 단장된 『고금도서집성』

18세기에 들어 조선과 청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조선은 청으로부터 각종 서적을 활발히 수집하였다. 1713년(숙종 39)에 들여온 『고문연감古文淵鑑』・『패문운부佩文韻府』, 1723년(경종 3)에 구입한 『주자전서朱子全書』, 1729년(영조 5)에 구매한 『강희자전康煕字典』・『성리정의性理精義』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 1769년에 서명응徐命膺은 사행에서 『수리정온數理精蘊』・『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 등을 포함하여 약 500여 권의 천문・역학 서적을 한 번에 구입해 들여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조 말년에 들어 청으로부터의 서적 수입은 전면 금지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 주린朱璘의 『명기집략明紀輯略』이 수입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1771년(영조 47)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관련 인물 10여 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영조는 차후 중국에서 새로운 서적을 사오지 못하도록 엄칙하면서 만약 책을 들여올 경우 관직에 있는 자는 종신 금고에 처하고, 선비는 청금록靑衿錄에서 이름을 지워버리도록 지시하였다. 영조의 강력한 서적 수입 금지책으로 인해 청으로부터의 서적 유입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다시 변화하였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학문을 매우 좋아하였고 청조의 학술 동향에도 관심이 많았다. 우문정책右文政策을 지향했던 정조는 집권하자마자 청으로부터 서적 도입을 시도하였는데 그 첫 성과가 『고금도서집성』이었다. 『고금도서집성』은 1776년에 파견된 진하 겸 사은사 일행에 의해 1777년 2월 조선에 수입되었다. 그런데 정조가 본래 사들여오고자 했던 것은 『고금도서집성』이 아니라 『사고전서四庫全書』였다. 당시는 중국에서 한참 『사고전서』가 편찬 중일 때였는데 이러한 정보를 알고 있던 정조는 사신들에게 『사고전서』가 완성되었으면 구입해 오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중국에 가서 탐문해 본 결과 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으로 전체 분량 중 간인된 것은 10분도 1도 되지 않아 구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에 사신 일행은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고금도서집성』을 먼저 구입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사정은 사행의 다음 보고를 통해 알 수 있다.

진하 겸 사은 정사正使 이은李溵, 부사副使 서호수徐浩修 등이 장계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 삼가 생각건대 『사고전서』는 실로 『도서집성』에 의거하여 그 규모를 확대한 것이니, 『도서집성』이 바로 『사고전서』의 원본原本입니다. 이미 『사고전서』를 구득하지 못할 바에는 먼저 『도서집성』을 사오고 나서 다시 공역이 끝나기를 기다려 계속 『사고전서』를 구입하여 오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 같기에, 서반序班들에게 문의하여 『고금도서집성』을 찾아냈는데 모두 5천 20권에 5백 2갑匣이었습니다. 그 값으로 은자銀子 2천 1백 50냥을 지급했는데, 지금 막 실려 오고 있습니다.” 하였다. 『정조실록』 권3, 정조 1년 2월 24일

사신 일행의 자체적인 판단으로 『고금도서집성』을 대신 구입하였던 것이다. 『고금도서집성』도 매우 귀한 책이었는데, 유득공柳得恭의 숙부로 사행에 참여했던 유금柳琴이 한림원의 지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구할 수 있었다. 은과 상평통보의 교환 비율은 대개 4:1이고 상평통보 1냥의 현재 가치는 대략 5만 원이다. 따라서 『고금도서집성』의 구입 비용이 어림잡아 4억 이상이 되니 실로 거금이 아닐 수 없다.

1777년은 『고금도서집성』이 청에서 출간된 지 이미 5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18세기에 들어 청에서 많은 책들이 조선에 수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고금도서집성』의 구입은 상당히 늦었다. 존재 자체를 몰랐던 것인지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구입 이전 시기의 사료 가운데 『고금도서집성』에 관한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당시 북경의 시장 사람들이 조선은 학문을 숭상한다고 하면서 어째서 편찬된 지 50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고금도서집성』을 처음 구매하는 것이냐고 물으며 일본은 나가사키에 1부, 에도에 2부 등 이미 3건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끄러워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규장각 소장 『고금도서집성』에는 네 개의 도장이 찍혀 있다. 타원형 도장은 ‘조선국朝鮮國’이라고 되어 있고, 사각형 도장은 위로부터 정조의 호인 ‘홍재弘齋’, 바쁜 틈을 쪼개 독서를 한다는 ‘만기지가萬機之暇’, 임금을 뜻하는 ‘극極’이 각각 새겨져 있다.
규장각 소장 『고금도서집성』에는 네 개의 도장이 찍혀 있다. 타원형 도장은 ‘조선국朝鮮國’이라고 되어 있고, 사각형 도장은 위로부터 정조의 호인 ‘홍재弘齋’, 바쁜 틈을 쪼개 독서를 한다는 ‘만기지가萬機之暇’, 임금을 뜻하는 ‘극極’이 각각 새겨져 있다.

책이 들어오자 정조의 명령으로 『고금도서집성』의 개장 작업이 시작되었다. 청의 종이는 질이 워낙 좋지 않기 때문에 조선의 종이로 표지를 만들고 다시 장정을 한 것이다. 5,020책을 해체하여 일일이 표지를 바꾸고 다시 책으로 묶는 것은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개장된 책은 중국 도서를 소장하던 도서실인 개유와皆有窩에 보관되었다. 1780년 봄 정조는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 규장각 검서관들에게 『고금도서집성』의 부목部目을 베끼라는 명을 내렸다. 책의 목차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명을 받은 이덕무는 1778년 연행하여 북경에 유람할 때 서점에서 책을 사다가 『도서집성』의 산질散帙이 있는 것을 보고 대단한 것을 본 양 기뻐한 일이 있었는데 직접 전질을 열람할 수 있게 되자 매우 감격해 하였다.

검서관들이 베낀 부목은 책에 매어 놓았다가 글씨를 잘 쓰는 이들로 하여금 쓰게 하였다. 상의주부尙衣主簿 조윤형曺允亨이 서명을, 사자관寫字官은 부목을 쓰게 하여 40일 만에 끝마쳤다. 조윤형은 명필로 소문이 났던 탓에 ‘도서집성’이라는 글자를 무려 5,022번을 써야 했다. 본래 중국에서 들여올 때 『고금도서집성』은 5,020책이었는데 분편 과정에서 늘었는지 원편 5,002책과 목록 20책 등 총 5,022책으로 정리된 상태였다. 큰 고생을 한 조윤형에게 이덕무는 농으로 ‘도서집성’이라고 쓴 글씨를 얻고 싶다고 부탁했다. 조윤형이 그 이유를 묻자 이덕무는 5,022번이나 쓴 글자이니 명필 왕희지의 글씨보다도 더 나을 것 같아 글씨 연습을 하는데 사용하려고 한다고 대답하여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조선에 수입된 『고금도서집성』은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탄생하였다. 현재 『고금도서집성』 원본 전질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데 우리나라에 소장된 것은 더욱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규장각 각신이 아니면 볼 수 없던 책

정조는 『고금도서집성』을 매우 중시하여 규장각 각신이 아니면 열람할 수 없게 하였다. 반면 규장각 각신들에게는 마음껏 책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각신들이 업무를 볼 때나 혹은 숙직하면서 수시로 책을 보아 학식을 넓히고 혹시 잘못된 부분은 수정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후에 정조는 규장각 각신들이 책을 함부로 가져다 보고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아 책이 유실될 염려가 있다고 개탄하였는데 이는 각신들이 자유롭게 책을 열람하였음을 반증한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창덕궁 개유와와 열고관 전경. 오른쪽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개유와이다. 개유와와 열고관은 중국책을 보관하던 도서실이었는데 『고금도서집성』을 들여와 이곳에 보관하였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창덕궁 개유와와 열고관 전경. 오른쪽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개유와이다. 개유와와 열고관은 중국책을 보관하던 도서실이었는데 『고금도서집성』을 들여와 이곳에 보관하였다.

정조 역시 『고금도서집성』을 애독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화성 건설 당시 정약용丁若鏞이 성을 쌓는 제도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자 정조는 옹성甕城・포루砲樓・현안懸眼 등의 제도와 기중起重의 모든 설說을 빨리 강구하라며 『고금도서집성』에 들어 있는 『기기도설奇器圖說』을 하사하였다. 『고금도서집성』을 내용을 이미 검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정조가 지시한대로 옹성을 비롯하여 기중법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제도를 연구하여 글을 지어 올렸다. 정약용의 연구가 화성 건설에 유용하게 활용되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기중가起重架는 중요한 역할을 하여 성역이 끝난 후 정조는 기중가를 써서 4만 냥의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고 크게 칭찬하기도 하였다. 한편 정약용은 1796년(정조 20) 겨울 규장각 교서로 재직할 때 『기기도설』을 열람하고 돌아와서 그림 잘 그리는 이로 하여금 그 내용을 옮겨 그리게 하였다. 정약용은 『기기도설』에 있는 여러 제도를 군사와 농업 방면에 이용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왼쪽은 『기기도설』에 있는 기중가 설계도, 오른쪽은 정약용이 『기기도설』을 참조하여 고안한 기중가 설계도. 『기기도설』에는 11장의 기중가 도면이 있는데 정약용은 이 가운데 상대적으로 그림 내용이 분명한 제8도와 제11도 두 장을 주로 이용하여 기중가를 설계하였다.
왼쪽은 『기기도설』에 있는 기중가 설계도, 오른쪽은 정약용이 『기기도설』을 참조하여 고안한 기중가 설계도. 『기기도설』에는 11장의 기중가 도면이 있는데 정약용은 이 가운데 상대적으로 그림 내용이 분명한 제8도와 제11도 두 장을 주로 이용하여 기중가를 설계하였다.

『기기도설』의 예는 『고금도서집성』의 활용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고금도서집성』은 그리 활발하게 이용되지는 못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규장각 각신들에게만 열람을 허용하여 접근성이 떨어졌다는 점이다. 『고금도서집성』을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는 정조의 사위 홍현주洪顯周가 1827년 익종翼宗에게 자신은 각신이 아니어서 『도서집성』을 평생 보지 못했다면서 빌려줄 것을 간청하여 겨우 책을 볼 수 있었다는 일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정조의 사위조차 이런 형편이었으니 일반 지식인들의 경우 『고금도서집성』을 구경하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로 인해 『고금도서집성』을 살펴보았던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은 서명응徐命膺, 서유구徐有榘 등 몇 사람에 불과하였다. 서명응은 『위사緯史』를 찬술할 때 『고금도서집성』의 지리 관계 자료를 이용하였고, 서유구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편찬하면서 의학 관련 자료를 활용하였다. 서명응은 『고금도서집성』을 들여온 서호수의 부친이고 서유구는 서호수의 아들로, 두 사람 모두 규장각 각신을 역임하였으므로 『고금도서집성』을 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고금도서집성』 자체의 문제이다. 백과전서가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양한 방면의 최신 성과가 반영되어야 하는데 『고금도서집성』은 진몽뢰의 개인 작업으로 이루어진데다가 당대 학술 정책의 영향을 받았던 탓에 그러지 못하였다. 우선 전체적으로 성리학 관련 내용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성의 측면에서 한계가 드러난다. 『고금도서집성』에서 유가적 윤리와 관련된 「명륜휘편」이 압도적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불교나 도교 방면 자료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이규경李圭景은 아무리 이단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치더라도 불교나 도교 관련 사실을 싣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최신 성과의 반영이라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특히 서양의 과학기술 성과가 제대로 수용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예를 들어 당시 최신의 수학적 성과물이라 할 수 있는 『수리정온數理精蘊』에 수록된 『기하원본幾何原本』과 『산법원본算法原本』은 『고금도서집성』에 실리지 않았다. 또 1718년에 완성된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는 지리학 분야에서 당시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는 업적이지만 적극적으로 인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조선의 경우는 『고금도서집성』이 출간된지 50년이 지난 후에야 이 책을 수입했기 때문에 서양 과학기술의 성과는 『기기도설』과 같이 극히 제한된 책에 한해서만 이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고금도서집성』은 18세기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적 능력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고금도서집성』 출간보다 조금 늦은 1751년 디드로Denis Diderot(1713~1784)와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1717~1783) 등의 주도하에 유럽에서 『백과전서』 첫 판이 출판되고 1772년 마지막 권이 간행되었다. 유럽 최고 지식인 150명이 참여해 만든 이 책은 유럽 사회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켜 출판 후 30년 동안 대략 2만 5천부가 인쇄되었다고 한다. 지식의 집대성을 목표로 한 점에서는 두 책이 큰 차이가 없었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안타깝게도 동아시아 사회에서 지식은 여전히 소수 지식인의 독점물이었다.

노대환 교수

글쓴이   노 대 환
  (현) 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전)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전) 동양대학교 교수
주요 저서
 『동도서기론 형성 과정 연구』, 2005, 일지사.
 『조선의 아웃사이더』, 2007, 역사의아침.
 『문명』, 2010, 소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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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풍석楓石[서유구]의 부친인 판서 서호수가 정조 원년(1776)에 부사[필자 주 : 원문에는 상개(上价), 즉 정사로 되어 있는데 사실 관계에 따라 바로 잡음]로 연경에 갔을 때 청나라 고종이 바야흐로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사고전서』를 찬수하게 하였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었다. 정조가 서호수에게 만일 『사고전서』의 공역이 끝났으면 한 질을 사오도록 하라고 일렀다. 서호수가 명을 받고 가서 사려고 하니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결국 별비은別備銀 몇 천 냥을 써서 『도서집성』 한 부를 사왔는데, 이는 유서類書로서 목록을 합해 5,020권이었다.

상이 열람하고 크게 기뻐하여 당장 우리나라 종이로 개장하라고 명을 내리고 또 내규장각 검서관 이덕무・박제가・유득공 등으로 하여금 먼저 작은 제목을 쓰게 하고, 글씨를 잘 쓰는 지사知事 조윤형曺允亨에게 그 바깥 제목을 쓰도록 명하였다. 주합루宙合樓에 보관하였는데 각신閣臣이 아니면 감히 내어달라고 청할 수 없었다. 보배처럼 매우 중요하게 여겨 각신 이외의 신하들과 서생書生들 중에는 구경해 본 자가 없었다.

내가 듣건대 병신년(1776)에 사올 때 연경의 시장 사람들이 비웃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책이 간행된 지는 거의 50년이 지났는데, 귀국은 문文을 숭상한다고 하면서 어째서 이제야 사 가는지요. 일본은 나가사키에서 1부, 에도에서 2부 등 이미 3부를 구해 갔습니다.”라고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끄러워 대답을 못했다고 한다.

지난 정해년(1827) 여름에 익종翼宗께서 대리代理하실 때 나의 재종형 해거공海居公[홍현주洪顯周]이 왕의 사위로서 일찍이 사적으로 모시고 있었다. 공이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은 각신이 아니라 『도서집성』을 일생 동안 보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한번 빌려 주시기를 빕니다.” 하니, 익종이 웃으며 허락하고 액례掖隸에게 명하여 공의 집에 보내주었다. 공이 나를 불러 함께 열람했기 때문에 나 역시 한 두 번 가서 그 대강을 보았다. 홍한주洪翰周, 『지수념필智水拈筆』

홍한주(1798~1868)가 쓴 『지수념필』에 들어 있는 자료로 『고금도서집성』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후반부에 소개된 두 가지 일화가 흥미를 끄는데 특히 구입 과정에서 북경 상인들에게 핀잔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고금도서집성』과 같이 중요한 저작물이 청에서 출간된 지 50년 후에야 조선에 수입되었던 것은 조선이 대외 동향에 무감각하였음을 보여준다. 북경 상인들이 제기했던 문제는 당시 조선 지식인들도 공감하던 것이었다. 때문에 박지원을 비롯하여 여러 지식인들은 조선이 해외통상을 하지 않아 서적이 제대로 수입되지 않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일본에 문화적으로 뒤처지고 있다면서 조선도 통상에 적극 나설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