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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대가 자랑하고 싶은 사람

2012.02.01.

자랑스러운 자연대인상을 수상하는 조완규 전 총장 자연과학대학이 2011년 제정한 '자랑스러운 자연대인' 상의 제1회 수상자는 조완규 전 총장으로 결정되었다. 조 전 총장은 80년대에 학장과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열악한 연구 환경을 개선하고 현재와 같은 과학 연구가 가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조 총장은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87년 총장에 재임해, 정치 활동을 이유로 징계받은 학생들을 복학시키고 학생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는 파격적인 반정부 정책으로 당시 교수와 학생 사회의 두터운 지지를 받았다. 빌 게이츠로부터 천 오백억원을 지원받는 유엔 산하기관 국제백신연구소가 서울대 관악 캠퍼스 내에 위치하게 된 것도 그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조완규

“자랑스러운 자연대인상”을 수상하고
나에게 “제 1회 자랑스러운 자연대인상”을 주기로 했다는 자연과학대학 김명환 학장의 전화와 곧 이은 그의 편지를 받았다. 나는 매우 망설였다. 실은 내가 총장 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시상제도를 마련할 때 이 상은 서울대학교 명예를 드높인 서울대학교 졸업자 중 초로에 파묻혀 인도적 행적이 뚜렷하거나, 세계적 학자를 발굴하여 시상할 것을 기대했었다. 따라서 이미 세간에 잘 알려진 유명인사가 이 상의 수상자가 되는 것은 원래의 취지로 보아 합당하지 않다. 상 제도가 시행된 이후 근 20년이 되지만 아쉽게도 수상자는 거의 유명인사였다. 이런 일에 불만이었던 내가 바로 자연과학대학이 수여하는 자랑스러운 자연대인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학장과 더 이상 논쟁할 사항이 아니어서 지난 10월 22일, 자연대동창회 총회 때 이 상을 수상했다. 공적보고에는 불모지였던 발생생물학을 개척하였고, 자연과학대학 학장 때 AID 차관사업을 추진하여 기초과학육성에 기여했으며 총장과 교육부장관을 역임했고 국제백신연구소 유치 그리고 한국후원회 이사장으로 봉사하며 개발도상국 어린이 백신 개발 사업을 후원하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나의 그간의 경력을 간추려 소개한 것이다. 수상 뒤 소감을 밝힐 기회를 갖게 되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야기 했다.

“제1회 자랑스러운 자연대인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다만 내가 총장 때 제정한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대상자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사양할 생각이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상을 받기로 했다. 만일 학장을 했거나 총장을 했던 경력을 평가했다면 이는 수상대상자가 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 이유는 그런 보직을 맡으면 당연히 그 직책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 바탕에서 내가 상을 탈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 나름대로 이유를 달았다.

열악했던 국내 연구 현실에서 과학 연구의 기반을 닦다

미 AID 차관 얻어 자연과학 육성에 활용
첫째, 1974년 문리과대학 이학부장으로 봉사할 때, 관악 이전을 앞두고 새로 들어설 자연과학대학의 교육 및 연구 질 향상을 위한 사업으로 미국 AID로부터 5개년 5백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고, 1975년 자연과학대학 초대학장으로 임명되면서 동시에 AID 차관사업의 책임을 맡게 되어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일을 들 수 있다. 차관금의 반을 교수의 미국 내 대학교 연수 파견 및 미국 대학교 교수의 초대 등에 할애하였고, 교수가 연수 후 귀국할 때 연구용 기기의 구입을 지원하여 지속적으로 교수가 연구할 수 있게 하였다.

교수 공채 제도 최초 도입
둘째, 교수의 공채 제도의 도입을 둘 수 있다. 관악으로 이전 후 교수 TO 30개를 배정받았고 이를 모두 공채로 채웠다. 출신대학교는 평가대상이 아니고 다만 박사학위, 이수대학교, 박사 후 과정, 논문의 질 등이 평가의 항목이었다. 결국 공채로 인하여 자연과학대학 교수의 질은 거의 국제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자연대가 공채에 성공하자, 서울대학교 전체가 이 제도를 수용하였고, 나아가 문교부(현 교육과학기술부)가 이 제도를 택하여 전국 대학이 교수를 공채방법으로 충원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나라 기초과학 발전의 기반이 된 기초과학연구소사업 추진
셋째는 연구소의 활성화다. AID 차관사업의 후속조치로 자연과학종합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연구소 기금으로 우선 2천만 원을 모았다. 당시의 2천만 원은 오늘의 6천만원 이상의 크기가 될 것이다. AID차관사업 종료 후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당시의 문교부장관을 면담했다. 기초과학육성을 위하여 교수들이 호주머니 털어서 2천만 원을 모았고 계속 기금이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대사 경력의 장관은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자연과학종합연구소에 4억을 대주겠다고 했다. 나는 이에 2억을 보태서 기초과학연구소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여러 대학에도 기초과학분야의 교수가 있어 이들을 동시에 연구 지원하는 것이 우리나라 기초과학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결국 정부는 나의 제언을 받아드려 1979년부터 자연과학종합연구소에 4억원 그리고 여타 7, 8개 대학교 기초과학연구소에 2억 원을 지원하는 기초과학연구소사업으로 발전시켰다. 그 뒤 지원액이 증가하면서 연구소 사업에 참가하는 대학교수도 늘었다. 이 사업을 평가하는 교수단이 구성되었고 내가 그 책임을 맡았다. 주요평가항목은 연구비의 중앙관리, 국내외 저명학술지에의 연구논문 게재, 타 대학교수와의 협동연구, 대학원학생의 연구 참여 그리고 해당 대학교 총장의 육성의지 등이었다. 5년 주기로 종합평가하여 탈락 여부를 결정하였다. 이 사업은 1995년까지 지속되었고 이 사업은 문교부사업으로 가장 성공한 사업으로 평가되며 우리나라 기초과학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1989년 새해 조완규 전 총장 인터뷰 기사 1987~1991년,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지지 받는 총장

학생의 정치활동을 허가하도록 학칙 개정
1987년 8월, 서울대학교 총장에 임명되었다. 어려운 시기였다. 학칙에 규정된 정치활동 금지조항, 그리고 학사 징계조항으로 제명된 학생 수가 5년 사이에 1,300명이었다.

우선 대학의 자율성 확보를 위하여 학칙을 개정하기로 했다. 학칙에서 ‘정치활동금지조항’과 ‘학사징계조항’을 삭제했다. 당연히 정부는 개정학칙을 승인하지 않았다. ‘정치활동금지조항’을 삭제하면 서울대학교가 각 정당의 기지가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이미 선거, 피선거권이 있는 학생들에게 정치적 견해나 활동을 귀걸이, 코걸이 식으로 판단하고 징계하는 것은 부당하며, 실정법을 위반한 학생들은 잡아가라고 했다. ‘학사징계조항’도 삭제하고 학점 미달 학생에게 4학기를 추가부여하기로 했다. 물론 그리고도 학점이 미달인 학생은 제명된다. 정부와 두 달간 힘겨루기를 했다.

정치활동을 이유로 제명되었던 학생들 전원 복학시켜
결국 당시의 문교부 서명원 장관이 승인을 했다. 그 때 그는 “서울대학교 개교 이래 처음 교수들이 제정한 자율학칙이며 그 정신을 존중하여야 할 것이다. 이 어려운 일을 다음 장관에게 떠맡길 수 없다”고 했다. 그 동안 제명되었던 학생 전원을 다시 복학시켰다. 물론 학칙이 개정된 후도 대학은 큰 일이 없었고 학생들은 보다 더 자유로운 학생활동을 이어갔다. 대학의 자율성이 훨씬 증진된 것이다.

1988년 농촌활동 보조금 5백만 원을 내라는 학생회 측과 마찰이 있었다.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학생들은 총장실로 난입하여 총장실 집기를 밖으로 내 던지고 벽은 붉은 스프레이로 요구조항을 적었다. 들어주지 않으면 계속 응징하겠다고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교수회의는 학생회장을 비롯한 학생회 간부 11명 제명, 11명 무기정학의 무거운 징계처분을 했다. 서울대학교 개교 이래 교수들 자의로 학생을 그같이 중징계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학생들의 반발은 전혀 없었다. 학생 모두 교수가 내린 징계처분을 수용한 것이다. 이런 일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학은 그 뒤 안정을 찾게 되었다. 학칙 개정 없이 난동학생을 총장이 직접 징계하였다면 대학은 다시 더 큰 소요로 이어졌을 것이다.

호암교수회관 설립, 수원 캠퍼스에 랜선 설치, 도서관 전산화.. 서울대 취약점 하나씩 해결
나는 삼성의 지원을 받아 호암교수회관을 건립했다. 외국의 초빙 교수들의 숙소, 식당, 회의실 등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또 역시 삼성의 지원으로 교수연구실, 도서관, 행정부서, 연건캠퍼스 그리고 수원 캠퍼스에 랜(Lan)을 깔아 개개인 교수들이 연구실에서 직접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게 하여 오랫동안의 꿈을 실현시켰다. 또한 정부로부터 250억 원(당시 약 4천만 달러)의 재정지원을 받아 도서관의 전산화를 완성시켰다. 이로써 서울대학교의 3대 취약점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외국 대학교와 적극적인 학술교류를 추진할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의 국제화를 보다 더 효율적으로 추진할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결국 나를 자랑스러운 자연대인상의 수상자로 선정한 근거가 자연과학대학 학장 때의 일, 그리고 총장 때의 일들이었다면 이를 과분하게 평가해준 심사위원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UN 산하기관인 국제백신연구소 서울대에 설치, 매년 80만 아프리카 어린이 구제
소감을 발표하는데 걸린 시간이 길어져서 국제백신연구소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기회를 놓쳤다. 공적보고에는 이 연구소와 나와의 관계가 적혀있었다. 기왕에 글로 남기는 일이라 이 연구소에 봉사한 일을 남기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동안 후진국의 약 7백만 어린이들이 매해 설사병, 말라리아, 혹은 결핵 등 후진국형 전염병으로 5살 이전에 목숨을 잃는다. 1990년 77개국 정상들이 모여 이 문제를 협의하고 국제백신연구소를 설치하여 어린이 백신을 개발하기로 했다. 이 일을 UNDP가 맡아 추진하기로 했다. UNDP는 여러 나라에 연구소 유치를 권유했다. 조건은 5천 평 땅과 5천 평 연구소건물을 제공하고 매해 운영비의 30%를 대야 했다. 그러나 많은 나라가 유치경쟁에 나섰다. 1993년 나는 국제백신유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정부에 연구소 유치를 권유했다. 서울대학교가 땅 5천 평을 내놓았고 당시의 김영삼 대통령도 우리가 꼭 해야 할 인도적 사업이라 하여 적극적으로 유치할 것을 다짐했다. 나는 이 연구소를 유치함으로써 우리나라 생명과학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다. 결국 우리 정부도 UNDP에 유치신청서를 냈다. 1994년 많은 경쟁국 가운데 우리나라가 연구소 유치국으로 선정되었다. 나는 UNDP 국제백신연구소 설립자문위원이 되었다. 1977년 국제백신연구소가 국제기구로 공인됨에 따라 연구소 국제이사회 이사가 되었다. 1999년 연구소 소장이 취임하기 전까지 연구소 소장을 대행하는 연구소상주총괄이사가 되었다. 동시에 1998년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를 조직하고 그의 이사장직을 맡았고 본격적으로 연구소 후원 사업을 추진하였다. 연구소 건물을 민자(民資)로 건축하라는 일관된 예산당국의 무리한 요구에 맞서 예산투쟁을 2000년까지 지속하였다.

후원회 명예회장에 대통령 영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맡게 되면서 건축비 예산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한편 1999년 연구소장이 취임하게 됨에 따라 소장 특별고문직을 맡았다. 1998년 연구소 건물이 준공될 것으로 예정되었지만 예산당국의 끈질긴 예산책정 거부로 결국 건물 준공이 2003년에 끝났고 2004년 노무현대통령 내외분 참석아래 연구소 기증식을 가졌다. 그 때 대통령이 정부가 연구소를 지원할 것이라고 치사를 통하여 약속하였고 그 이후로는 운영비 등 예산을 얻는데 전처럼 힘들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2005년 후원회 이사장을 그만두고 대신 상임고문의 자리에서 연구소 활동을 돕고 있다. 한편 빌 게이츠 재단은 지난 10여년 사이 1억 3천만 달러를 지원하였고 그 지원을 받아 1달러짜리 콜레라 경구백신을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현재 인도가 그 백신을 생산하고 있다. 이제는 매년 콜레라로 숨지는 어린이 7, 80만 명은 국제백신연구소가 개발한 백신으로 더 이상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같은 인도적인 사업에 참여한 것을 나는 매우 보람 있게 생각한다.

자연과학대학 소식지 <자연대 이야기> 13호에 기고 (2011.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