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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30만원 인턴으로 시작한 공연기획자의 꿈

2008.12.26.

안영리월 30만원 인턴으로 시작한 공연기획자의 꿈!!

안영리 | 소비자학과 99년 졸업

- 아버지 사업 부도로 유학의 꿈 좌절
- 공연기획 분야에서 7년간 일한 후 유학 성공

IMF여파로 유학을 포기하고 예술의 전당 공연기획팀에서 정부지원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세종문화회관 공연기획담당, 금호아시아나그룹 문화재단의 홍보팀장을 거쳐 현재 카네기멜런대에서 예술경영 석사과정 중이다.

- IMF 위기로 찾아온 불행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이다. 1998년 12월, 졸업을 앞둔 나는 인생 최초의 절박한 순간에 놓여 있었다. 1년 전 1997년, 절대 일어나지 말아달라고 절실히 기도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30년 간 할아버지 때부터 일궈온 아버지의 수산업은 IMF의 고유가와 고환율의 직격타를 맞으며 급기야 부도 처리에 이르렀고, 돈과 사람을 잃은 충격보다 가족 어른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과 허무함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자식으로서의 무력함과 슬픔이 20대 초의 내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 공연 기획자가 되겠다는 꿈
그동안 좋은 가정과 사회 환경 속에서 자라온 나는, 인생은 장미빛에 가까울 것이라 확신하며 살았던 듯 하다. 대학교 3학년 때까지 한번도 심각하게 직업인이 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없었다.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에 들어가 좋은 교수님들과 지우들 틈에서 잘 지내왔지만, 나의 꿈은 줄곧 예술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졸업 후 미학 이나 음악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 유학을 포기했으나 취업도 쉽지 않아
그런 내게 덜컹 다가온 부모님 사업의 부도와 사회의 위기는 곧 바로 내 개인의 위기가 되고 말았다. IMF 이후 4학년이 되는 40명 급우들 중 15명 남짓한 친구들만이 졸업을 결정했고, 나는 그 중 하나였다. 줄곧 독일로의 유학을 원했지만, 아버지는 큰 딸인 내가 유학보다는 하루 빨리 직업인이 되기를 원하셨다. 결국 나는 마지막 학기 동안 적성과는 상관 없이, 특별한 준비도 없이 공채를 뽑는 소수 몇몇 기업들에 원서들을 넣었고, 결과는 실패였다.

- 뜻하지 않게 찾아온 기회
그러던 중 12월 초, 나의 가정 형편과 공연 예술에 대한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알아차린 소비자학과 여정성 교수님께서 IMF 하에서 정부가 실시하게 될 정부 지원 인턴제가 있는데, 문화관광부 산하 기관인 예술의전당도 실시하지 않겠느나며 직접 찾아가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을 주셨다. 그래서 교수님의 추천서와 이력서를 들고 예술의전당 총무팀을 찾았다. 교수님 예상대로 예술의전당은 정부 지원 인턴제를 도입, 12명의 인턴 선발을 준비 중에 있었다. 나는 그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고, 1999년 1월부터 예술의전당 공연기획팀의 인턴이라는 예기치 않던 직업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 다시 꿈을 꾸다
월 30만원이라는 적은 보조금이었지만, 예술의전당에서의 인턴 생활은 내 삶에서 축복과 감사함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인턴 인력을 믿고 기꺼이 일을 맡겼던 좋은 팀장들과 선배들 틈에서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동안 관객으로만 대하던 공연예술이 어떤 수 많은 중요한 절차들을 거쳐 완성되는지, 예술가와 예술 관객을 대우하고 서비스하는 일이 얼마나 민감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배워갔다. 그리고, 공연 자료와 문서들이 잘 정리되어 있고 열람이 가능한 예술의전당 조직 문화 덕에 틈틈이 여러 자료들을 낱낱이 읽고 공부할 수 있었다.

- 공연기획자로 세종문화회관 입성
6개월의 인턴 기간을 마친 후 서울시 산하 기관에서 재단법인화로의 큰 변화를 앞 둔 세종문화회관의 공연기획팀으로 입사하게 되었고, 서울시 교향악단 공연과 ASEM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공연 등을 맡으며 공연기획자로 성장해 갔다. 그러던 중 지휘자 금난새 선생님께서 창단한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성장을 위한 조직 정비와 홍보 전략에 필요한 인력을 찾고 있었고, 나는 이른 나이에 오케스트라 활동의 전반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곳에서 2년은 정부 산하 예술 조직과는 다른 민간 예술 조직이 인력과 재정의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혁신적인 자율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서울과 지방을 아우르는 다양한 예술 청중과 사업 파트너를 개발하고, 외국의 예술 단체와 연계하여 성장을 꾀할 수 있는지 등을 가르쳐 준 값진 직업 인생의 한 페이지였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적은 임금과 가장 높은 업무 시간으로 기록될 일터이겠지만 말이다.

- 굵직한 공연을 책임지는 팀장으로 성장
이후 세계 10대 오케스트라 초청 프로젝트를 앞두고 오케스트라와 홍보 일 모두에 경험이 있는 홍보 책임자를 찾고 있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문화재단과 인연이 닿았다. 나는 그 곳에서 고인이 되신 고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을 수장으로 모시고, 뉴욕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을 초청하는 기업의 문화지원사업팀의 일원으로서 국내외 문화 단체와 한국 출신의 음악인들로 구성된 다양한 음악 공연을 홍보하고 마케팅하는 일을 맡아 3년간 일했다.

- 접었던 유학의 꿈을 내 힘으로 실현
문화공연 분야에서 일한 지난 7년은 어떻게 보면 운 좋고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부분 열정에 의지해 온 직업 인생에 위기를 느끼게 되었고, 공연 예술과 경영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배움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여 2006년 5월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했다. 현재, 나는 카네기멜런 대학교에서 예술 경영 석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2009년 5월 졸업을 앞두고 있다.

- 새로운 위기에 휩싸인 후배들에게
나는 10년 전의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을 후배들을 생각하며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있다. 또한, 지금의 나 역시 10년 전보다는 충격이 덜하지만 새로운 위기 속에서 또다시 졸업 후의 진로가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위기를 극복해온 지난 10년의 경험이 있어 크게 두렵지 않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대처하면 결국에는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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