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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스무살을 생각할 때.. 소설가 신경숙 기고문

2009.03.02.

먼 훗날 스무살을 생각할 때, 소설가 신경숙이 서울대 신입생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누군가 스무살이라고 하면 얼굴을 빤히 쳐다보게 된다. 스무살이라니! 세상에 스무살이라니. 생김새와 상관없이 다 예뻐 보이고 어깨를 두들겨 주고 싶고 ‘참 좋겠다’하는 마음이 진심에서 우러나온다. 스무살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이제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은 자기네가 지금 인생에서 얼마나 찬란한 시기에 이르렀는지를 모를 것이다. 스무살이란 나이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 나이를 살고 있을 때가 아니라 지나온 후이니까. 이십년 전에 스무살이었던 사람이나 삼십년 전에 스무살이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스무 살을 말할 때면 ‘아, 스무살’이라고 말하게 되어 있다.

내가 스무살이었을 때 나는 한국문학 전집 60권을 읽었다. 가족 중 유일하게 돈을 벌고 있던 사람이 내게 대학 입학 선물로 무엇을 사 줄까 물었고 작가가 되기를 꿈꾸며 하루에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보내는 날들이 수두룩했던 나는 대답도 짧게 ‘책’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생긴 미색 표지의 60권에 담긴 한국문학을 섭렵하는 일로 스무살을 시작했다. 꼬박 삼 개월이 걸렸던 것 같다. 낮에도 내 방의 유리창에 검은 도화지를 붙여 밤처럼 해 놓고 읽었다. 다 읽고 나니 이렇게 봄이 왔었다. 60권에 담긴 한국문학의 힘이었을까. 스무살이 되기 전에 안 봐도 될 것을 봐 버렸던 탓에 두려움이 실려 있던 내 눈이 싱그럽게 찾아온 봄빛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60권에 담긴 식민지시대부터 1970년대 말까지의 사람들을 비록 작품 속에서지만 삼개월 동안 만나고 나니 뭐랄까, 든든한 빽을 얻은 듯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그럴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지금도 나는 스무살을 생각하면 내 눈 속으로 그 깨알 같던 활자들이 쏟아지곤 한다.

지금 스무살이 된 대학 새내기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말하려고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니다. 책이란 영화와 달라서 어느 날 갑자기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읽기는 어느 정도, 아니 거의 습관이다. 시간을 내서 읽는 게 아니라 늘 읽는 것이다. 늘 책 읽는 사람이 되려면 상당 기간 책과 함께 친해지는 습관을 먼저 들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가 자꾸 엇나가는데 내가 마흔이 지난 후 나의 스무살을 생각해 볼 때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상황 때문이기도 했었지만 어쨌든 한국문학 전집 60권을 읽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겐 그 이후 시간들의 눈 밝은 안내자였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다.

스무살이란 나이는 모든 것을 향해 열려있는 나이다. 사람을 만나든, 악기를 배우든, 책을 읽든, 여행을 가든, 어느 한 가지도 그냥 지나가지 않고 마음에 각인되고 기억으로 저장되는 나이다. 그러니 기왕 무엇을 할 것이라면, 또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이미 정해진 행운의 스무살이라면, 그 꿈의 기본이 되는 것을 내 것으로 흡수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 그 시간들이 안내자가 되어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지도를 만들어 줄 것이다. 먼 훗날 자신의 스무살을 생각했을 때, ‘그때 나는 무엇을 했었다’ 고 뚜렷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그때는 스무살 때 꾸었던 꿈을 이루거나 그 가까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되기를!

2009. 3. 2
[서울대 대학신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