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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칼럼

‘일’의 조건 - 박태균 교수

2009.05.13.

일의 조건 박태균 국제대학원 교수

3학년이 끝날 무렵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직후 선후배들이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 계속 공부를 해서 훌륭한 학자도 되고, 사회에도 많은 공헌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 때 한 선배가 해 준 말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인생에는 세 가지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해야만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 그리고 내가 이 세 가지 길에 모두 적합한 길을 선택한 것인가에 대해 충분히 생각했느냐고 물어봤다. 그 선배의 말은 그 이후 내 머리 속에 깊숙이 뿌리박혔다.

교수라는 직업 때문인지, 주위에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상담을 요구할 때가 적지 않다. 때로는 학과 선택을 위한 진학 상담에서부터 진학 후 취직 상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의가 들어온다. 어떤 이들은 교수가 ‘철학관’을 운영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이던 간에 나는 그들에게 특정한 답을 내려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을 가장 잘 아는 것은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숙제를 던져준다. 22년 전에 그 선배가 나에게 던져주었던 숙제와 동일한 문제를 풀어보라고 한다.

그리고 때론 나 스스로가 자신에게 반문해 본다. 과연 나는 세 가지 조건에 부합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세 가지 조건에 부합되는 일을 찾아서 살고 있다면, 그 조건들에 맞게 살고 있는 것일까? 그 질문은 때로 나를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하며, 좌표를 잃고 표류하지 않도록 하는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 더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충직한’ 제자들도 있다. ‘세 가지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때로는 세 가지 중 한 가지 또는 두 가지만 충족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요즈음에는 자신 있게 가장 마지막 조건을 제시한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라.’ 아마 23년 전 투사였던 선배는 ‘해야만 하는 일’을 제일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확실하게 그 선배를 배신하고 있다.

2008년 연구년으로 하버드에 있을 때 졸업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스스로의 졸업식에도 사진 찍는 데만 정신이 팔렸던 내가 남의 졸업식에 참석했던 것은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이 축사를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도 궁금했지만, 하버드대학에서 대중 작가에게 축사를 맡겼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데 롤링의 축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기대를 잔뜩 하고 갔던 아이들은 실망했지만. 롤링은 제3세계의 인권과 평화를 위해 활동했던 자신의 젊었던 시절, 그리고 배고팠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리고 하버드대학의 졸업생들에게 부탁했다. ‘당신’들은 졸업 이후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의 중요한 자리에 갈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당신’들이 무엇을 생각하는가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럴 때 소수자와 배고픈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고. 해리포터에 대한 그녀의 영감도 그러한 경험에서 나왔던 것일까?

롤링의 이야기는 ‘해야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특히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또는 중요한 위치에 올라갈 가능성이 큰 사람들에게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도록 해 주었다. 어쩌면 ‘해야만 하는 일’을 고민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자신있게 ‘하고 싶은 일’을 제일 첫손으로 꼽는다. 그리고 해리포터 영화 시리즈를 보면서 더 이상 졸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