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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에디슨 다시보기

2009.05.28.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 다시보기

에디슨은 단순한 발명가가 아니라 1,000개 넘는 특허를 받은 '기술경영자'
거대한 전기 기업을 설립하고, 시장경쟁에 이기기 위해 사업가 기질 발휘
아무리 우수한 기술 있어도 시장개척력이 있어야 성공한다는 전례 세워


이공계 위기 속, 대안은 기술경영

에디슨의 젊은 시절“이공계 위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화두가 되었다. 2002년을 전후하여 이공계 위기라는 화두가 우리 사회를 강타하면서 이에 대한 다양한 대책도 강구되었다. 그 중의 하나는 이공계 대학의 교육을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 이후에 주요 공과대학을 중심으로 공학교육인증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공학교육인증제도는 공학교육을 공학소양, 전공기초, 전공심화로 구분하고 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공학소양교육이다. 공학소양교육의 목록에는 기술의 역사, 기술과 사회, 공학윤리, 기술경제, 기술경영, 과학기술정책, 의사소통, 리더십, 팀워크 등이 포함된다.

이와 같은 공학소양교육 중에서 최근에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것은 기술경영(Management of Technology, MOT)이다. 이공계 학생들에게 과학기술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지를 가르침으로써 단순한 과학기술자를 넘어 기업이나 사회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기술경영에 접근할 때에도 역사 속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우리에게 “발명왕”으로 알려져 있는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을 들 수 있다. 그는 발명왕이란 별명이 무색치 않게 미국에서만 1,093개의 특허를 받았다.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이처럼 에디슨에게는 발명가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상 그는 단순한 발명가가 아니라 기술과 경영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발명왕 에디슨은 1,000개 넘는 특허를 받은 기술경영자

에디슨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전기의 시대”를 개막한 백열등의 발명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백열등을 발명할 때에도 경제적 관념을 가지고 접근하였다. 에디슨은 기존의 가스등과 경제적으로 경쟁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백열등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그는 체계적인 비용 분석을 통하여 전도체에 사용되는 값비싼 구리가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점을 밝혀낸 후, 백열등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하면서도 전도체의 경제성을 보장하는 것을 핵심적인 문제로 규정하였다. 그는 오옴의 법칙과 주울의 법칙을 활용하여 전도체의 길이를 줄이고 횡단면적을 작게 하는 방법을 탐색하였고, 결국 오늘날과 같은 1A 100Ω 짜리 고저항 필라멘트라는 개념에 도달하였다.

에디슨이 백열등만을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발전, 송전, 배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전기 모터, 발전소, 전선, 소켓, 스위치, 퓨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에디슨이 발명한 것은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기술이 결합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에디슨에 앞서 백열등을 발명한 사람은 많았지만 에디슨을 진정한 백열등의 발명가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에디슨은 전등을 시스템적 차원에서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전등의 상업화와 관련된 활동도 시스템적으로 전개하였다. 즉, 전등의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회사, 전력을 공급하는 회사, 발전기를 생산하는 회사, 전선을 생산하는 회사 등을 잇달아 설립하여 전기에 관한 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에디슨 제국”(Edison Empire)을 구성했던 것이다. 이상의 기업들은 1880년에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Edison General Electric)사로 통합되었으며, 그 회사는 1882년에 뉴욕 시에 세계 최초로 중앙 발전소를 설립하는 것을 계기로 미국의 전기산업을 석권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에디슨이 전등을 개발하고 상업화하는 과정에 주목하게 되면, 그는 전등과 관련된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인 시스템 구축가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에디슨은 기술과 경영 모든 분야에서 혁신적인 사고와 행동을 보여준 인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전개되었던 직류와 교류의 경쟁에서 나타나는 에디슨의 모습은 새로운 기술혁신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보수주의자에 다름 아니었다.

거대 전기 기업 설립해 사업가 면모 보여

주지하듯이, 에디슨 제국은 직류방식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전소를 소비지역과 인접한 곳에 설치해야 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교류방식에서는 중앙 발전소에서 생산된 수천 볼트의 전기를 전송하면 각 소비지역에 설치된 전신주의 변압기에서 전압을 내리면 되기 때문에 석탄이나 물의 공급이 용이한 지역에 발전소를 설치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급기야 전력 시스템의 표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직류 방식의 대표 기업인 에디슨사와 교류 방식의 대표기업이었던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사는 “전류 전쟁”(Current War)이라 불릴 정도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에디슨은 당시 최고의 기술자와 수학잗르과 함께 먼로 파크 실험실에서 직류전기발전시스템을 발명했다교류가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자 에디슨은 교류방식의 위험성을 선전하면서 반격을 시도하였다. 그는 “에디슨사가 경고합니다”는 팜플렛에서 웨스팅하우스를 살인자로 몰아세웠다. 그것은 고전압 교류선에 가까이 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면서 고압 전류에 의해 전기구이가 된 사람들의 명단까지 실었다. 팜플렛의 마지막 부분에서 에디슨은 “이렇게 무서운 교류를 가정에서 사용하시겠습니까?”는 질문을 던졌는데, 팜플렛을 읽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오게끔 되어 있었다.

심지어 에디슨은 “전기사형 작전”이라는 치졸한 방법까지 동원하였다. 때마침 뉴욕주는 교수형을 대신할 인도적인(?) 사형 방법을 찾고 있었다. 에디슨은 교류가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최소한의 고통으로 사형을 집행시켜 줄 최선의 방책”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형집행에 사용될 기구로 웨스팅하우스의 발전기를 제안하였다. 웨스팅하우스가 발전기를 판매할 리는 만무했으므로 에디슨은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구입하였다. 1890년 8월 6일에 뉴욕주의 오번 형무소에서는 세계 최초로 전기사형이 실시되어 “전기구이가 된 사형수”에 관한 기사가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에디슨의 기대와는 달리 전기사형 작전도 교류의 상승세를 저지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결국 웨스팅하우스사는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에디슨사를 제치고 전기시설 독점권을 따내었다.

에디슨의 또 다른 면모는 축음기에서 엿볼 수 있다. 전류 전쟁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던 1887년에 에디슨은 축음기를 상업화하는 작업을 추진했지만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축음기의 오락적 가능성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동전을 넣으면 대중음악을 자동적으로 선택해 연주할 수 있도록 축음기를 주크박스(juke-box)로 변경시켜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에디슨은 축음기를 “속기사 없이 사람의 말을 받아쓰는” 기계로 생각했지, 음악재생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주크박스가 인기를 얻자 사무실 내에서 사용되어야 할 축음기가 왜곡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에디슨은 대중문화를 선도했던 축음기를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성장한 새로운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역설적인 삶을 살았다.

영화의 경우에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 에디슨은 1891년에 “키네토스코프”로 불린 활동 사진기를 개발한 후 1893년에 세계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인 “검은 마리아”를 차렸다.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증하자 미국 곳곳에서는 5센트만 내면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들이 번창하였다. 5센트 극장은 대중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스타를 키우는 일이나 화면을 크게 하는 일에 과감히 투자하였다. 이에 반해 에디슨은 흥미보다는 교육과 관련된 영화를 제작하였고, 스타나 화면과 같은 외형적인 것보다는 영사기의 성능을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그는 5센트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비판하면서 검열 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러한 에디슨의 사업전략은 점점 소비자의 기호와 멀어지게 되어 에디슨은 “영화를 발명했지만 영화사업에서는 실패한 사람”이 되었다.

기술경영의 관점에서 에디슨의 생애는 오늘날에도 새겨 볼 만한 다양한 쟁점을 제기하고 있다. 과학기술자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해당 과학기술에 대한 능력뿐만 아니라 시장을 개척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자신의 것보다 뛰어난 과학기술이 등장할 경우에는 과거의 과학기술을 과감히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또한 아무리 우수한 과학기술적 성과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배경으로 등장한 새로운 문화의 흐름도 읽어내야 한다. 이러한 세 박자를 겸비한 훌륭한 과학기술자들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발간[자연과학] 24호
글: 송성수(부산대학교 교양교육원, 과학기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