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안내

서울대 소식

뉴스

뉴스

과학이야기

과학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까?

2009.06.11.

켈빈 경 19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찰스 듀얼 당시 미국 특허청장, 켄 올스 DEC 창립자, 토마스 왓슨 당시 IBM 회장, 빌 게이츠 MS사 창립자

글: 홍성욱 교수, 과학사와 과학철학 협동과정

빌게이츠도 컴퓨터 속도가 이렇게 빨라질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과학기술 분야에 대해서 가장 정통한 과학기술자들조차 미래를 엉뚱하게 예측하는 경우가 많다. 켈빈은 송수신 거리가 짧은 초기 라디오가 장난감 이상이 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라디오는 유선 전신처럼 대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1980년대 이후에 컴퓨터 산업을 주도했던 빌 게이츠도 1981년에는 컴퓨터의 연산능력과 속도가 지금처럼 빨라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미국 스미쏘니언 박물관에서 발행한 『어제의 내일 Yesterday's Tomorrow』(1984)이라는 책이 있다. 어제의 내일이라 하면 오늘을 의미하는데, 이 책에는 20세기 초ㆍ중엽의 사람들이 예측한 몇 십 년 후의 세상에 대한 이미지가 가득하다. 당시 사람들은 20세기 말이 되면 로켓 모양의 자동차가 200 킬로가 넘는 빠른 속도로 도로를 질주하게 될 것이며, 개인 헬리콥터가 보편화되고, 사람들은 거대한 빌딩들이 고가도로로 직접 연결되어 바로 자동차를 타고 왕래하는 형태의 도시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런데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조차 이러한 예측이 언제 이루어 질 지 요원하다.

미래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미래를 발명하는 것?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또 다른 의미에서 미래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미래 사회를 알기 위해서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과학기술의 방향을 예측해야 하는데, 포퍼에 따르면 과학지식이 어떤 방향으로 발제록스사의 팔로 알토 연구소에서 개발한 최초의 컴퓨터 알토전할지 예측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에 의하면 과학의 핵심은 대담한 가설을 던지고 다른 과학자들이 이를 논박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이너북(Dynabook)이라는 최초의 랩톱 컴퓨터를 고안한 미국의 컴퓨터 파이오니어 앨런 케이(Alan Kay)는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발명하는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런데 미래를 발명하는 것은 쉬운 일일까? 앨런 케이는 제록스의 팔로 알토 연구소에서 초기 컴퓨터 연구를 담당했다. 팔로 알토 연구소는 다이너북같은 혁신적인 컴퓨터 개념을 비롯해서 마우스,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등을 발명했으며, 이를 토대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라고 볼 수 있는 알토(Alto)를 개발했다. 그렇지만 제록스사는 이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미래를 꿰뚫어보는 데 실패했고, 이들이 발명한 기술은 이후 애플 컴퓨터사에 의해서 채택되었다. 케이는 미래에 대한 놀랄만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발명하는 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미래를 알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미래 연구소들이 미래 예측을 쏟아 놓지만, 이 중에는 한참을 빗나간 것도 꽤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미래 예측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에게 소중하다. 미래 예측은 불확실성, 자기충족적인 요소들, 그리고 희망과 정치(politics)가 포함되어 있는데, 어떤 조건들이 만족될 때 미래에 대한 예측이 상대적으로 더 의미가 있었는가를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과거의 역사에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위한 작은 시도이다.

미래를 잘 예측하기로 유명한 문명이론가 레이몬드 커즈웨일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특이점이 온다』는 책으로 잘 알려진 문명이론가 레이몬드 커즈웨일은 미래를 잘 예측한 것으로도 정평이 있다. 1980년대 말엽에 집필해서 1990년에 출판한 저서 『똑똑한 기계의 시대 The Age of Intelligent Machines』에서 커즈웨일은 통신기술의 발전 때문에 소련과 같은 전제주의 국가가 붕괴하며, 1998년 무렵에는 컴퓨터가 세계 체스 챔피언을 이길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1990년대에 인터넷 사용의 폭발적인 증가가 있을 것이라는 점도 예견했고, 인터넷의 문서가 만화, 소리, 비디오를 포함하는 형태로 존재할 것이라는 점도 예견했다. 그는 무인 자동차가 2010년까지 기술적으로는 가능해 질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인 자동차는 사람들의 저항에 부딪쳐서 앞으로 수 십년 동안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커즈웨일은 1999년에 출판된 『신성한 기계의 시대 The Age of Spiritual Machines』에서 2009, 2019, 2029년, 그리고 21세기의 마지막인 2099년의 미래를 예측했다. 지금이 2008년 연말이니까 2009년에 대한 예측 중 무엇이 현실화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있을 것이다. 2009년에 대한 커즈웨일의 예측 중에 들어맞은 것도 있지만 아직 실현되지 못한 것도 많이 있다. 그는 2009년의 개인용 PC가 작게는 브로치 같은 보석 장식의 크기에서 얇은 책의 크기 정도까지 적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 예측이 들어맞았는가 아닌가는 논쟁적일 수 있다. 그는 또 인터넷 케이블이 사라질 것이고 고속무선전신이 보편화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지금 분명한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만화 캐릭터를 닮은 가상존재가 사람들이 여행하는 것을 대신해서 회의에 참석하는 경향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은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2009년에 대한 커즈웨일의 예측 중 다음은 아직 요원하다. 눈이 먼 사람들을 위한 컴퓨터 독서기. 귀가 먼 사람들을 위한 ‘청각 기계.’ 사지가 마비된 사람을 위한 기계의 광범위한 사용. 통역 전화의 광범위한 사용. 인간 연주자들과 사이버네틱(로봇) 연주자들의 섞임. 컴퓨터의 키보드가 사라지고 대부분의 컴퓨터가 사람이 말로 하는 명령을 통해 작동되는 것. 우리가 쓰는 텍스트의 대부분이 음성인식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사람이 읽는 것을 기록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 가구 당 100개의 컴퓨터의 보유. 컴퓨터 이미지가 망막에 상을 투사해서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이미지를 볼 수 있는 안경 등. 그가 예측한 2019년, 2029년의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그 때가 되어야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경향을 보면 이 중 상당 부분이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도 농후하다고 볼 수 있겠다.

미래 로봇에 대한 예측들은 맞을까?

최근에 등장한 로봇에 대한 미래 전망을 보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인지로봇연구단은 앞으로 5년 뒤에 유리그릇을 깨지지 않게 잡아서 식기 세척기로 나를 수 있는 ‘파출부 로봇’ 시제품을 내놓을 수 있다고 본다. 포항공대의 연구팀은 한번 본 사람의 얼굴은 잊지 않고 간단한 대화도 가능한 ‘안내원 로봇’을 만들어 이를 내년에 경상북도 포항시청에 배치해서 민원인들의 도움이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연구팀은 5년 내로 짐꾼 역할을 대신 하는 ‘견마(犬馬) 로봇’을 개발할 계획이란다.

그렇지만 이러한 예측에는 오차가 많다. 무엇보다 이러한 예측은 자신들의 연구를 위해 더 큰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수사적 담론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13년에 가사 일을 대신 해 주는 파출부 로봇이 나와서 주부들을 힘든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는 섣부르다. 가사 로봇이 곧 등장하리라는 예측은 수십 년 전부터 이루어졌었지만 이는 가까운 미래에도 요원한 일로 남아 있다.

다른 예를 보자. 지금부터 7년 전인 2001년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의 두 교수는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해서 만들어진 '지은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신문기사 작성을 위한 용도로 개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소프트웨어 로봇은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흥미로운 내용을 뽑아내서 이를 기사로 만들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조만간 기자들이 하는 일의 일부를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도 이러한 로봇 소프트웨어가 신문사에서 기자들의 일을 덜어준다는 얘기는 접할 수 없다.

2002년에 MIT의 미디어 연구소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화성탐사선을 모델로 삼은 종군 뉴스봇(newsbot)인 '아프간 익스플로러'의 개발에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이 로봇은 위험한 전쟁지역을 누비면서 이미지를 송신하고 따라서 종군기자가 하는 일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로봇이 전장에 투입되었거나 개발되었다는 후속 뉴스는 지금까지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2차대전 직후의 21세기 예측 - The Year 2000

20세기를 2/3정도 살았던 1967년에 사람들은 20세기의 남은 1/3 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2000년에는 대체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궁금해 했다. 미국 허드슨 연구소의 전략가 허먼 칸은 당시에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하게 발전한 과학기술의 역사를 추적하고 여기에 통계적 기법을 동원해서 『2000년 The Year 2000』이라는 책에서 21세기 초엽의 세상을 그려냈다. 그가 예측한 것 중에는 컴퓨터와 컴퓨터 산업이 사회의 핵심이 된다는 것과 사람들이 컴퓨터를 이용해서 돈을 전송하고, 범세계적인 통신망이 구축되리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그는 유전공학의 발달로 유전자를 조작하고 이를 이용해서 질병을 치료하는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제시된 미래 예측 중에는 틀린 것도 꽤 있었다. 칸은 1970년대 내로 실용적인 레이저 살상무기가 개발될 것이라고 했고, 2000년에는 로봇이 대부분 집안일을 할 것이며 홀로그래피를 이용한 3차원 TV가 보편화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레이저, 로봇, 홀로그래피 등 칸의 예측이 크게 빗나간 부분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러한 기술이 칸이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던 1960년대에 미래를 이끌 기술로 등장하고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기술이었다는 것이다. 즉 칸은 유전학, 컴퓨터, 전화와 같이 비교적 오랫동안 발전했던 과학기술의 미래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정확한 예측을 이룬 데 비해, 갑자기 등장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기술에 대해서는 그 발전 가능성을 너무 과장해서 잡았던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오류는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최근 미래의 산업기술을 이끌어 나갈 총아로 각광을 받는 나노기술과 같은 기술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크게 잡힌 것은 아닌가를 반성적으로 돌이켜 볼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코닥사의 조지 이스트먼 사례 - 성공을 부르는 것은 미래 예측이 아니라 문제해결능력

예상되었던 과학기술의 발전도 다시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예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측이 빗나갔을 경우나 새로운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창의력과 적응력을 키우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카메라를 발명한 코닥사의 조지 이스트먼의 사례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원래 최초의 사진은 프랑스의 발명가 다게르에 의해서 1839년에 만들어졌다. 그의 방법은 은판위에 요오드 증기를 쬐어 감광선이 있는 옥화은층을 만들고 여기에 상을 노출시킨 뒤에 수은 증기로 현상해서 수은과 은의 화합물로 상을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초기 다게레오타입은 노출시간이 길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렌즈의 사용으로 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가 사진을 발명하고 약 10년 후인 1850년경이 되면 미국에서만 1만여명의 전문 사진사가 다게레오타입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게레오타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진을 찍는 과정이 매우 복잡했다는 것이다. 건판은 은도금된 동판에 요오드 증기를 쬐어서 옥화은층을 만든 것을 사용했다. 이것을 어둠상자(카메라 옵스큐라)에 넣고 노출을 오래 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보통 몇 분 동안 노출을 해야 했고 따라서 인물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몇 분 동안 꼼짝 않고 있어야 했다. 사진을 찍은 뒤에는 감광된 은판에 수은증기를 쐬어 현상을 시켰고, 상을 정착시키는 과정을 염화나트륨이나 황산나트륨 용액을 사용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보완하기 위해서 1860년대 이후에는 알부민을 사용한 인화지, 콜로디온 습판, 젤라틴 건판 등이 새로운 기술로 개발되었다.

은행원으로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던 아마추어 사진사 조지 이스트먼은 우연한 기회에 사진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스트먼은 당시 영국에서 개발된 젤라틴 건판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를 개량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각고의 노력을 한 결과 그는 아주 뛰어난 젤라틴 건판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이스트먼은 자신이 만든 건판에 특허를 내고 작은 빌딩의 한 층을 세내서 이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자금을 마련한 그는 1881년 1월 1일에 이스트먼 건판회사를 설립했고, 자신이 다니던 은행에 사표를 제출했다.

1881년부터 1883년까지 젤라틴 건판을 제조하던 이스트먼 건판 회사는 미국 전역에 명성을 확립했으며, 그 결과 매출과 이윤도 증가했다. 그러나 건판 산업은 기본적으로 진입장벽이 매우 낮은 산업이었고, 곳곳에서 사업의 이윤이 크다는 점에 끌린 많은 신생 기업이 이 산업으로 몰려들었다. 이스트먼의 회사는 처음에는 전국 단위의 도매상과 독점 관계를 맺고 있어 여전히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나, 1883년을 기점으로 1884년에 이르면 가격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서 이윤이 급락했다. 이스트먼은 이윤 감소에 직면해 자신의 사업을 재검토하고 새 전략을 다시 짜야 했다.

그의 새로운 전략은 유리 건판을 대체할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필름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스트먼은 이를 위해 건판 생산업자인 워커를 영입하여 개발업무를 진행시켰다. 이스트만과 워커는 유리나 금속이 아니라 종이처럼 둘둘 말 수 있는 롤필름을 개발하는 데에 연구 목표를 두었다. 이들은 롤필름 시스템의 구성요소를 1) 롤 홀더 메커니즘 2) 롤필름 3) 롤필름 생산기계의 세 가지로 나누었다. 1884년 초가을이 되자 이 세 가지 구성요소의 개발이 일단락되었고, 이스트먼은 독자적인 판촉부를 만들고 유럽에도 도매점을 열어 국제적인 영업을 시작하였다. 회사의 도약이 눈앞에 펼쳐지던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성공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스트먼의 롤필름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롤필름이 전문사진사들을 전혀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필름의 조작과 처리과정이 너무나 복잡하다는 점을 지적했고, 무엇보다 사진의 질이 떨어진다는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이스트먼은 애초에 모든 전문 사진가들이 간편한 필름으로 전환하리라고 기대했으나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사진사만이 롤필름으로 전환했다. 수년간에 걸친 노력과 사업이 물거품이 되려던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이스트만은 혁신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롤필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진은 (1) 감광물질(예를 들어 건판이나 필름)을 준비하는 과정, (2)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과정, (3) 현상, 인화의 과정이라는 세 가지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중 이스트먼사는 롤필름을 통해서 (1)을 이미 간편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제 (2)와 (3)만 (즉 카메라와 현상만) 간단한 것으로 만들면 더 많은 대중을 사진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즉, 왜 사진은 전문 사진가에게만 국한되어야 하는가?

이스트먼이 개발한 기술은 기존의 시장(즉 전문사진사)의 수요에 적합한 것은 아니었지만, 훨씬 더 규모가 큰 완전히 새로운 시장(아마추어 대중 사진사들)을 여는 기술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스트먼은 새로운 아마추어 롤필름 카메라를 만들어 이를 ‘코닥’(Kodak)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제 초심자들도 카메라를 사물 쪽으로 향한 후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다 쓴 필름이 든 카메라를 돈과 함께 공장으로 보내기만 하면 현상된 사진과 함께 새 필름이 들어간 카메라를 집으로 배달받을 수 있었다. “셔터만 누르십시오. 나머지는 우리가 맡겠습니다”가 당시 코닥 카메라의 광고 문안이었다. 1888년에 롤필름을 포함해서 개당 25달러에 시장에 나온 코닥 카메라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는 사진술에서 대중 시장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스트먼은 건판이 성공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끝에 새로운 건판을 내 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이 건판 시장이 곧바로 여러 회사들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고, 이윤이 감소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서 건판이 아닌 전혀 새로운 롤필름에 대한 비전을 보고 이를 개발했다. 그렇지만 그가 롤필름을 개발했을 때, 그는 사진사들이 필름의 질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예상하지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여기서 간편한 카메라를 사용해서 사진을 찍는 보통 사람이라는 새로운 수요의 창출이라는 창의적인 발상의 전환이 나타났다. 이스트먼의 예는 기술 혁신의 핵심이 시장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인간 활동을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창조 행위임을 잘 보여준다.

그래도 예측해 본다, 20년 후의 과학

결국 중요한 것은 미래의 트렌드를 기계적으로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나리오와 이에 대한 유연한 대응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유연한 대응 능력은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한 준비와 연습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무리 이런 저런 발전 가능성을 점을 쳐도, 과학기술은 항상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진정의로 의미 있는 적응 능력은 창의성에서 나오며, 창의성은 튼튼한 ‘기초’ 위에 다져지는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 20여년 뒤에 과학의 트렌드를 생각해 보자. 1980년 이후에 등장한 과학기술분야의 가장 강력한 트렌드는 컨버전스, 융합, 잡종의 트렌드이다. 기존의 분야들이 합쳐져서 새로운 분야가 만들어지고, 이렇게 만들어진 몇 가지 새로운 분야가 또 합쳐져서 시너지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트렌드를 볼 때 미래에는 과학과 기술,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의 경계가 섞이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분야들이 연구를 주도할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다. 나노과학기술, 생명공학, 물질공학, 뇌과학, 인지과학 등이 이러한 융합의 예이다. 이러한 경향을 생각해 보면 연구대학의 성공은 잘 변하지 않는 기존의 전문분야(discipline)에 요동치는 융합적 학문의 부침을 어떻게 잘 접목시키는 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융합은 과학기술 분야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과학기술과 다른 학문적ㆍ문화적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과학기술과 예술, 과학기술과 철학, 과학기술과 법 등 20세기에는 서로 별개의 영역으로 간주되던 영역사이의 혼성이 강조된다는 얘기다. 이는 급격하게 바뀌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도덕, 법률의 필요성에서 기인한다. 인간의 유전자를 가진 동물이 만들어지고, 동물의 장기가 인간의 몸에 이식되고 있으며, 생각만으로 기계를 작동시키는 인간-기계의 인터페이스도 실험의 수준을 지나 곧 현실화되는 단계에 와 있다. 유전자 결정론에 이어서 뇌결정론(brain determinism)이 새로운 도덕적ㆍ법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인간-동물-기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미래의 세상에서 철학, 법, 과학기술의 지식의 교류도 촉진되고 가속화될 것이며, 이렇게 전통적으로 상반된 분야를 넘나들 수 있는 훈련이 더 중요한 것으로 부상할 것이다.

‘연구를 위한 연구’와 ‘복지를 위한 연구’ 사이의 경계도 더 흐려지면서, 더 많은 연구가 시민의 복리,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의 행복, 환경적 정의를 지향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과학기술의 상업화, 자본화 경향과 갈등을 빚게 될 가능성이 크며, 이러한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과학기술을 정립하는 데 핵심적인 이슈가 될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과학기술의 연구결과 중 불확실하고 위험한 것들이 늘어날 것이며, 이에 비례해서 시민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지금보다 더 참여하고 간섭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과학과 시민사회의 소통을 담당하는 새로운 전문가들이 중요한 직종으로 등장할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에 2005년 이후에 과학해석자(science interpreter)를 교육하는 대학원 과정이 10개 이상 만들어졌다. 20세기 후반 이후의 트렌드를 볼 때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과학 연구의 국제화의 정도는 증가하고 인터넷을 통한 협동연구 역시 증가할 것이다.

20년 이후의 과학기술의 세부 내용을 지금 예측하기는 쉽지 않지만, 융합학문과 학제간연구의 지배적 패러다임화, 과학과 타문화의 혼성화, 사회를 위한 과학기술의 역할 증대, 과학기술 연구의 불확실성과 위험 문제의 가시화, 국제화와 협동연구의 증가라는 트렌드는 앞으로 20년 뒤의 과학기술을 특징짓는 뚜렷한 트렌드가 될 것임을 예측해 볼 수 있다.

[자연과학] 25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