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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에서 자율로,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史

2023.03.31.

학생에게 군인처럼 나라를 지키도록 강제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름하여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이다. 1949년 9월 28일 대통령령으로 정한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에 의해 결성된 학도호국단은 ‘一面勉學(일면면학), 一面護國(일면호국)'의 기치를 내건 학생훈련단체였다. 학도호국단의 결성 이유는 당시 대한민국의 단독 정부수립과 관련이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군정의 폐지로 인해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 생긴 전력 공백 문제를 처리할 예비 전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대한민국 최초의 예비군이자 ’나라를 수호하는 군대‘인 호국군(護國軍)을 창설하고 대학을 비롯한 중등학교 이상의 각급 학생조직을 군대식 편제로 갖추어 학도호국단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규정에 따르면 학도호국단의 설치 목적은 “민족의식을 양양하고 체력을 단련하고 학술예능을 연구연마하고 학원과 향토를 방위하여 국가발전에 헌신 봉사하는 정신과 실천력을 기른다”라는 것이었다. 이는 정부가 학도호국단을 통해 반공주의 교육을 실행하여 투철한 민족의식과 국가관을 정립함으로써 유사시에 국방의 의무를 담당하도록 한 것인데, 일종의 학원(學園)의 병영화(兵營化)를 의미하였다. 1948년 12월. 국가 비상시국 수습대책의 일부로 학교별 학도호국단의 조직을 위한 ‘학도호국단 요강’을 발표하였고, 지방학도호국대 조직을 완료하자 1949년 4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 중앙학도호국단 결성식을 열었다. 학도호국단이 만들어지면서 대학 내 존재했던 수많은 학생조직은 해체되었다.

국립 서울대 학도호국단, 연도미상, 이오봉 동문 기증
국립 서울대 학도호국단, 연도미상, 이오봉 동문 기증
서울 동대문 옛 서울운동장(現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행사에 동원된 국립 서울대 학도호국단 대열이다.
사진 중앙의 오른쪽에 도열해 있다. 깃발에는 “지키자 삼일정신, 뭉치자 호국학도”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창단 시 학도호국단의 조직 체계는 대통령(총재)-문교부 장·차관(중앙학도호국단 단장·부단장)-시장·도지사·교육감(각 도 및 특별시 단장)-총장·학장·교장(각급 학교 단장)으로 내려오는 하향식 편제였다. 중학교 이상의 학생 및 교직원들은 모두 학도호국단 단원이 되었고, 학생 간부는 학도부장 또는 대대장에 임명되었다. 학도호국단 결성 시에는 42개의 대학교 학도호국단과 28,000여 명의 단원이 있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공대, 농대, 문리대, 미대, 법대, 사대, 상대, 수의대. 약대, 음대, 의대, 치대 등 단과대학별로 학도호국단이 결성되고 단과대학 학도호국단의 연합체인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이 신설되었다. 초대 단장에는 제4대 최규동 총장이, 초대 학생위원장에는 박영덕이 자리하였다. 대학 학도호국단 조직은 단장·부단장이 주재하는 지도위원회와 그 하위에 학생위원회 위원장을 두었다. 학생위원회 산하에는 훈련부, 체육부, U·N학생부, 후생부, 학예부, 규율부, 공작부, 총무부의 집행 부서를 두었다. 대학 학도호국단에서는 필요시 대대, 중대, 소대로 편성하여 단대 단체훈련을 실시하였다. 대학 교무과에서는 호국단 운영 및 사업 관련 사항을 지도하고, 학생과에서는 규율부에 협조하여 교풍의 확립과 단원 교외생활을 지도했으며, 서무과에서는 각 부 예·결산 사항을 담당했다. 여학생과 관련한 집행 부서는 없었다.

학도호국단의 존재 이유는 학내에 존재하는 좌파 학생들을 제거하고, 학생들이 좌익사상에 물들지 않도록 반공사상 교육과 군대식 훈련을 통해 직접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운영위원회 부서 중 규율부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 규율부는 학내에 존재하는 소위 ‘불순분자’들을 감시하고 제거하는 역할을 하였다. 학도호국단은 근본적으로 군사동원 조직이었으며, 이러한 성격은 행동 강령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1. 우리는 배움과 수련에 전념하여 학도의 본분을 다하고 내일의 실력있는 지도자가 된다.
2. 우리는 멸공 호국에 앞장서서 민족의 시련을 극복하고 조국 통일의 역군이 된다.
3. 우리는 민족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겨레의 중흥을 이룩하고 자주의 긍지를 이 땅에 심는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으로 인해 학도호국단은 자연히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중앙학도호국단은 피난 학도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학생들을 전시연합대학에 등록하도록 하고, 학생들에게 전시 학생증을 교부하는 등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하였다. 각지로 흩어진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국방부 정훈국의 지원 하에 1950년 7월 19일 ‘대한학도의용대’를 조직하여 참전했다. 문교부는 대한학도의용대가 학도호국단의 존립 목적에 대치하므로 학도의용대를 해체하고 학도호국단을 활성화시키자고 주장했으나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문교부는 1951년 8월 24일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개정안’(대통령령 제523호)을 공포하여 학도호국단을 정부 주도의 준군사적 조직에서 개별 학교 중심의 학생 자치조직으로 개편하였다. 학도호국단의 운영 목적을 “학생의 과외활동을 통하여 개성의 발전을 조장하고 자치능력을 배양하며 학도의 애국운동을 통일지도하여 사회봉사의 실행을 기한다”로 변경하였는데, 이는 이전부터 제기된 학도호국단의 군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비판과 학생들의 자치 조직에 대한 요구를 반영한 조치이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가두행진, 1953.3.1., 김후란 동문 기증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가두행진, 1953.3.1., 김후란 동문 기증
1953년 3·1절 기념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가두행진 사진이다.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관중들이 몰려있는 가운데 선두에 태극기를 든 여학생들과
서울대학교 가나다순으로 공과대학 교기와 플래카드를 든 학생들이 행진하고 있다.

학도호국단 내에서 일부 자치 활동을 할 수 있게되자 서울대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직접 운영위원장을 선출하기 시작했다. 단과대학 운영위원장 선거는 1952년 12월 법대에서 처음으로 실시했고 각 단과대학으로 확산되었다. 법대, 사범대, 수의대는 직선으로 운영위원장을 선출했고, 나머지 단과대학은 운영위원회를 감시하기 위해 단과대학별로 조직된 ‘대의원회’를 통해 간선으로 운영위원장을 선출했다. 단과대학의 운영위원장들은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차례대로 돌아가며 운영위원회장을 맡았다.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운영위원회’와 같은 단과대학 연합체 성격의 ‘서울대학교 대의원회’(총대의원회)는 1955년에 조직되었다. 각 단과대학에서 500명씩 선임하여 모두 38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었다. 대의원회에서는 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하거나 추인했고, 예산과 결산을 심의했다. 학도호국단의 경비는 등록금과 함께 거두어 마련되었다. 이후 해마다 단과대학 호국단 운영위원장을 선출하였다. 농대·문리대·미대·상대·약대·치대의 경우 5월에 선거를 실시했으며, 공대·법대·사범대·수의대는 10월에 선거를 실시했다. 1958년에는 호국단 산하에 여학생부가 창설되었다.

1950년대 학도호국단의 활동은 학생들의 정신무장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위한 집단 훈련이 주를 이루었다. 정부는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행사와 관제데모에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일이 빈번했다. 대표적인 학원 동원 사례로는 북진통일 학생 궐기대회(1953), 휴전 회담 반대 데모(1953), 적성 휴전 감위 축출 군민 대회(1955), 이박사 대통령 재출마 요청 데모(1956), 재일 교포 북송 반대 데모(1959) 등이 있었다. 학도호국단은 학생 동원 기능과 함께 민주적 절차를 통해 얻은 자치 기능까지 겸하게 되면서 각종 체육대회, 반공·애국 웅변대회, 연극공연 등을 개최하였다.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도 사상 순화운동, 문화·학술활동, 계몽운동, 교지 및 학보 발간, 훈련소 위문, 체육훈련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당시 호국단의 활동은 대부분 단과대학별로 이루어졌다. 미대는 반공 강연회(1958)를 개최하여 사상 순화운동을 벌이고, 의대에서는 6개 단과대학 연합음악회(1952)를 개최하였다. 법대에서는 모의재판(1953) 및 웅변대회(1954)를 매년 개최하였고 약대와 음대에서는 음악 감상회(1954)와 음악제(1955)를, 문리대에서는 전국 정치학도 정책 토론회(1957)를 열었다. 같은 해 상대는 학생연구회를 발족했다. 학도호국단은 학교를 대표하여 대외행사 및 회의도 주관했는데, 총장기 쟁탈 전국 남녀 구기 대회 등을 개최했으며 농대에서는 전국 농과대학 학생위원장 회의(1955)를 추진하였다. 계몽활동으로는 수의대·농대·약대가 농촌에 향토계몽대를 파견하고 가축 치료 활동(1949)을 하였다. 또한 각 단과대학별로 교지 및 학보를 발간했는데, 상록지(농대), 상대평론(상대), 의대(의대), 함춘월보(의대), 약원(약대) 등을 펴냈다. 이외 사범대에서는 대학 학도의용병 전몰자 충혼비 제막식(1957)을 거행하기도 했다.

학도호국단은 1951년 규정 개정 이후 그 성격이 정부의 관제동원기구에서 학생 자치기구로 일부 바뀌었으나, 근본적으로 정부로부터 대학 내 단원까지 이어지는 직접적인 하향식 통제 체제였기 때문에 학교는 학도호국단 운영 과정에 있어 정부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또한 학도호국단 외 학생단체를 조직할 시에는 문교부 장관의 인가가 필수였다. 1950년대 내내 학생들은 가두행진 등 정부에 의한 각종 정치적 동원에 자주 시달려 학업에 매진하기 어려웠고, 규율부를 통한 학도호국단 간부들의 월권행위가 더해지자 학내에는 학도호국단의 해체를 요구하는 여론이 팽배했다.

1960년 4·19혁명이 이루어지자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학내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어용(御用) 교수의 사퇴를 촉구하며 맹휴를 결의하고 학장 배척 운동을 벌였다. 학도호국단에 대한 불만도 터져 나왔는데, 공대와 상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후 4월 30일 학생총회를 개최해 학도호국단을 해체할 것을 결의했으며, 문리대와 법대의 교수회에서도 학도호국단 해체를 요구했다. 전국 각 대학교수회와 학생총회에서도 학도호국단 해체와 대학 당국의 시책에 대한 시정요구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허정 과도 정부는 5월 3일 국무회의에서 학도호국단의 정식 해체를 의결했다. 이에 따라 서울대는 5월 5일 학장회의를 열어 ‘학생자치 기구의 조직에 관한 결의’를 채택해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새롭게 학생자치 기구를 조직하도록 했다. 이로써 국가권력 주도하에 반대 정치세력을 탄압하고 제거하는 도구로 악용되었던 학도호국단은 이승만 정권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다.

학도호국단 드디어 해체-학생위 월말까진 구성, 일부 단대에선 이미 대의원선거, 대학신문, 1960.5.9.

학도호국단 드디어 해체-학생위 월말까진 구성, 일부 단대에선 이미 대의원선거
대학신문, 1960.5.9.


“4월 29일 학생들이 복교한 이래 제일 먼저 고창되었던 학도호국단의 해체가 단행되었다.
이러한 행정조치는 3일 아침의 국무회의에서 결정을 보아 해체된 것인데 관제기관이라는 이유로 해체당한 동학호국(同學護國)은 4282년 9월 28일 대통령령 86호로써 결단을 보아 만 10년 6개월 동안 존속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동학호국에 대체할 순연한 학생자치기관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는바 서울대학교 12 단과대학의 경우를 보면 대게 5월말까지는 단대별 학생위원회가 선출 조성될 것으로 보인다.
일부 단과대학에서는 이미 대의원선거가 본격화하였는바 어용기관을 탈피할 새로운 학생자치기관구성에 있어 대다수 학생들은 자발적인 열의를 띄고 있으며 종래와 같은 선거 및 운영에 있어 당국의 간섭이 가해지지 않기를 이구동성으로 학생들은 요망하고 있다.”

이후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각 학교엔 호국단 대신 학생회라는 자치 조직이 결성된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곧바로 학생회 조직에 착수하여 단과대학별로 학생회칙을 제정하고, 단과대학 학생회장을 선출했다. 학생회장 선거는 1960년 5월 16일 법대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후 다른 단과대학들로 이어졌다. 문리대에서는 각 학과별로 학생 30명당 1명의 대의원을 뽑은 후 대의원회에서 학생회장을 선출했다. 5월 23일 12개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은 ‘서울대학교 학생회헌장’을 제정하여 ‘제1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를 출범시켰다. 6월 3일에는 각 단과대학 여학생 대표들이 모여 ‘여학생회’를 따로 구성했다. 총학생회는 12개 단과대학 학생회장과 여학생 대표 1명으로 구성되었다. 학생회는 학도호국단과는 달리 학생들의 자율성이 보장된, 온전한 의미의 자치 기구로 기능할 수 있었다.

하지만 4·19혁명으로 열린 학생회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75년 초부터 학생들의 학원 민주화 요구가 가열되기 시작하자, 학교 당국은 4월 8일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한 직후, 5월 15일에 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다. 개강 이후 학생활동에 대한 규제가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 정부는 5월 20일 전국의 98개 대학 총장회의를 소집하여 모든 대학과 고등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설치할 것과 대학에서 군사교육을 강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날 국무회의에서 대통령령 제7645호로 ‘학도호국단설치령’을 의결했고, 6월 28일 문교부는 ‘학도호국단설치령 시행세칙’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대학교에서는 6월 30일 학도호국단 발단식이 열렸다. 1960년 4·19혁명으로 사라졌던 학도호국단이 15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자체검열, 1975.11.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자체검열, 1975.11.
1975년 11월 17일부터 27일까지 서울대학교 대운동장에서 거행된 학도호국단 자체검열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1975년 11월부터 학생들은 정규 교련 시간 외에 별도로 학도호국단 검열을 실시했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순으로
1. 13대 총장 윤천주 박사가 단상에서 경례하고 있는 모습,
2. 의대, 치대, 음대 학생들의 사열 모습,
3. 여학생들이 붕대 처치 훈련을 수행 중인 모습,
4. 여학생들이 줄을 맞추어 행진하는 모습이다.

유신정권이 부활시킨 학도호국단은 과거와 달리 시·도 학도호국단을 거치지 않고 중앙 학도호국단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대학 학도호국단의 조직은 단장(총장)-부단장(학생처장, 학생군사교육단장)-분과지도위원장(학장)으로 하고 지도위원회 하에 학생제대(學生梯隊)와 운영위원회를 위치시켰다. 학생제대는 사단, 연대, 대대, 중대, 소대, 분대 단위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은 1개 사단, 6개 연대, 22개 대대, 82개 중대, 316개의 소대로 구성되었다. 학생제대 산하에는 총무부, 훈련부, 문예부, 새마을부, 체육부, 지도부, 여학생부 등 집행 부서를 두었다. 1950년대에는 학생들이 학도호국단 간부들을 선출할 수 있었으나 이제 학생 간부들은 부단장과 분과지도위원장의 추천으로 단장이 임명하였다. 학생회 여학생부는 학도호국단 여학생부로 바뀌었다.

학생회가 ‘자율·자치’의 이념을 내세웠던 것과 달리 학도호국단은 ‘안보(安保)’의 이념을 내세웠다. 문교부는 학도호국단을 부활시키면서 “과거의 호국단은 ‘학생단체로의 성격’을 못 벗어났으나 이번 것은 ‘난국에 처한 학원전체의 대비체제’를 갖추는데 역점이 있으므로 그 근본적인 성격이 다르다.” (“15년 만에 부활한 학도호국단", 「동아일보」, 1975.5.21.)며, 부활한 학도호국단을 통해 유신 체제의 국가 안보의식을 학생들에게 주입하고자 하였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운영규정」에 따라 ‘국가 안보에 관한 정신 교육 실시’, ‘전시하 구호사업 전개’, ‘작전지역에서의 군사지원 협조’ 등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요구받았으며, 1969년부터 시작된 교련과 함께 병영 집체훈련 등의 상시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정기검열, 1976.10.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정기검열, 1976.10.
1976년 10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간 2, 3학년을 대상으로 실시된
학도호국단 정기검열 및 실기경연에서 학생들이 줄지어 행진하는 모습이다.
대학생들은 매주 2시간(학기당 30시간, 1학점)씩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렇듯 학도호국단은 학생조직을 군사조직으로 대체하는 것이었고 나아가 기존 학생운동을 대규모로 조직하던 학생조직을 해체하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학도호국단은 어용 학생조직이라는 비난을 피하기위해 기존의 학생회에서 다루던 사업을 그대로 이어받아 진행하고 새마을 활동을 비롯한 봉사활동 등의 역할을 맡았다. 또한 교내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학생들이 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제거함으로써 학생운동 조직의 약화를 초래하고자 하였다. 1975년 이후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이 주최한 학내 행사내용을 살펴보면 대학축전의 경우 연극공연, 토론대회, 민속제는 프로그램에 포함하지 않았고, 학도호국단 여학생부가 개최한 여울제에서는 꽃꽂이 강좌, 장기자랑, 오픈 하우스를 주요 프로그램으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의 비판의식과 문제의식을 길러줄 수 있는 심포지엄이나 강연회 등은 거의 없다시피 하여 대학신문에서는 이를 두고 ‘알맹이 없는 행사’라고 꼬집어 말하기도 하였다. 그에 비해 체육행사의 수는 많았다. 일례로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에서는 당시 학도호국단비를 1인당 5천원씩 거두었는데, 이 중 2천원은 체육진흥비로 썼고, 나머지 3천원은 서클지원비 등 학생활동 경비로 책정하였으나 실제로 서클에 지원한 액수는 거의 없었다.

긴급조치 시대에 들어 학도호국단이 재등장하자 모든 학생활동은 위축되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학칙 제76조에는 “학도호국단에 소속되지 아니한 학생단체를 조직하고자 할 때는 학도호국단 지도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문교부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어서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의 틀 안에서만 서클 등록과 행사 등의 학생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서클 승인절차는 훨씬 까다로워졌다. 운영 규정상 서클등록서류를 분과지도위원장(학장)의 승인을 받고 본부에 있는 지도위원회장(총장)의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실질적으로는 각 단과대에 위치한 학생담당행정실과 본부의 상담지도관실에서 승인을 받아야했다. 또한 ‘안보’를 기준으로 하여 이념 서클이 아닌 ‘건전한 서클’ 이어야만 승인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1975년 이후 학술단체의 수는 줄었고 체육부 산하의 운동서클의 수가 늘어났다. 이 때문에 비공개 학회인 ‘언더서클’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후 언더서클은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학생 언론은 『대학신문』만 유일하게 남았으며 개별적으로 학보를 발간해오던 단과대학 학보사들은 학보 발행을 중단하였고, 학도호국단이 발행하는 통합 교지 『서울대』가 창간되었다. 또한 학교 당국은 학생 간행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학생 간행물 발간지침’을 시행하였다. 이는 학생 간행물의 종류를 총호국단지, 단과대학 제대지(梯隊誌), 과(科)회지로 구분하고, 발행인을 총장·학장·학과장이 맡도록 하였다. 당시 원고를 검열하고 삭제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므로 학생 언론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울대 창간호,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1976.6.30.

서울대 창간호,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1976.6.30.

학도호국단이 펴낸 서울대학교 통합 교지이다. 1976년 당시 학교 당국은 단과대학 학보사 연합체인 상설 편집장 회의를 통한 통합 교지 발간에 대한 단과대학 학보사 편집장들의 건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통합 교지의 편집진을 구성하여 『서울대 창간호』를 펴냈다. 창간호에는 총장 윤천주 박사의 창간사를 비롯하여 〈특집·현대문학의 추세〉, 〈논단〉코너에서 교수들의 학술논문을 실었으며, 이외 〈문단-수필·작가론·창작 〉과 〈편집실 기획-종합화의 시점에 서서〉를 수록하였다. 또한 1975학년도 학도호국단 활동개요도 게재하였다.

학도호국단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은 호의적일 수 없었다. 호국단은 일방적인 예산집행이나 서클등록, 대학축전 개최를 비롯한 제도의 문제가 있었고, 특히 학생들은 자신들의 의사가 배제된 호국단 간부의 선출 방식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이에 1977년 대학 내에서는 ‘대의원회’를 부활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학생자치 문제는 학내의 주된 논쟁거리가 되었고, 계속해서 학생들이 학교 당국이 임명한 호국단 간부를 대표로 인정하지 않자 1977년의 제3기 학도호국단 내부에서는 임명제에서 간선제를 통한 선출로의 방향 전환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학교 당국과 문교부가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으나 1977년 11월 30일 문교부는 호국단의 조직체계 변경을 골자로 한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원래 교련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학도호국단 편제를 각 학과단위 중심으로 변경하고 단과대학에 과연락학생을 두며, 학생들의 의견을 모아 학과 교수회의의 심의를 거쳐 2인 이상의 학생을 추천하면 학교 당국이 한 사람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는 여전히 임명제를 고수하는 방식으로 학생자치 문제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78년 새로운 방식으로 선임된 제4기 학도호국단 중 사회대 학도호국단은 사회대 과회장회의에서 과회장회의는 의사결정기구로, 학도호국단은 대학본부와의 중재와 실천 역할을 담당하기로 합의하여 학생들이 호국단과 협력하여 학생자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학도호국단과 학생들과의 유대가 일부 강화될 수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자 유신체제는 무너졌다. 10·26 사태 이후 전국의 각 대학은 비상계엄령으로 휴교했다가 11월 16일 개강하였다. 개강 직후인 11월 22일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학원의 민주화를 위한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8개 단과대학 37개 과회장 연석회의에서는 ‘학생회부활추진위원회’(약칭, 학추위) 구성을 결의하여 27일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학추위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학추위는 1980년 1월 8일 서울대학교총학생회회칙 시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2월 5일 인문대학 학생총회를 시작으로 10개 단과대학 총회를 열어 학도호국단 폐지와 학생회 부활의 당위성을 확인한 후 2월 12일 ‘제1차 서울대 학생총회’를 열었다.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자리한 가운데, 단과대학 학생 총회에서 논의한 의견을 바탕으로 작성한 「학원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결의」를 채택하였다.

학원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결의

학원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결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사회대학·약학대학·사범대학·자연대학·법과대학·경영대학·공과대학·가정대학·농과대학 학생총회, 의과대학 학생회장단, 1980.2.12. 김진균 교수 기증


서울대 각 단과대학 학생총회 및 학생회장단은 제1차 서울대 학생총회에서 “학도호국단을 존속시키려는 어떠한 절충적 시도도 시대착오적인 것임”을 선언하면서 학도호국단의 철폐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학도호국단의 설치 목적이 독재정권 유지를 위한 학생들의 민주운동을 조직적으로 탄압하는데 있으며, 둘째, 하향식의 군편제를 학원 내에 주입하여 학생들의 비판적 사유능력을 말살하고 민주적 훈련의 기회를 박탈하여 대학의 본질을 부정하고 왜곡하였고, 셋째, 대학문화의 창조적 기능을 오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학원 민주화를 위한 대학 구성원들의 노력을 무시한 채, 1980년 2월 15일 학도호국단의 운영 방식만 변경하는 내용의 ‘학도호국단설치령개정령’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였다. 호국단 제도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학생들의 호국안보의식 고취와 유사시 대비 비상동원체제가 절실하므로 호국단을 존속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2월 22일 ‘제2차 서울대 학생 총회’를 열고, 이 자리에서 「교수님께 보내는 건의문」과 함께 서울대를 포함한 5개 대학 공동 명의의 ‘학원 민주화를 위한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학도호국단의 구성을 저지하기 위해 학도호국단비의 납부를 거부하고, 학생회비를 각 학과에서 자율적으로 수납하도록 하였다. 3월 개강 직후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각 단과대학 학생총회를 다시 개최하여 새로운 학생회칙을 제정하였다. 3월 25일 각 단과대학 학생회 재건을 완료하고 28일 총학생회장을 선출하여 해체된 지 6년 만에 총학생회를 재건하였다. 학생회 재건을 이끌었던 학추위는 구성한 지 120일 만에 해체하였다.

새롭게 출범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산하에 총대위원회, 운영위원회, 학생활동위원회, 집행위원회를 두었다. 운영위원회 산하에는 총무부, 문예부, 사회부, 체육부 등 집행부가 있었다. 학생회는 학생 활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학생 운동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으로 ‘학생 권리헌장’ 시안을 발표하고 학원과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4월에 열린 서울대학교 학장회의에서도 학생회를 유일한 자치기구로 인정하고 학도호국단과 지도 교수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학칙 개정안을 문교부에 승인 요청하였다. 그러나 학생회는 문교부의 인준을 받지 못하였고, 5·17 쿠데타로 각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총학생회장이 구속되고, 총학생회는 다시 해체되었다. 이로써 학도호국단이 계속 실질적인 학생 대표 기구로 유지되었다. 10·26 사태 이후 활발히 전개되던 학원민주화 논의도 한순간에 좌절되고 말았다.

1980학년도 학도호국단 편제표, 서울대학교, 임선웅 전 직원 기증
1980학년도 학도호국단 편제표, 서울대학교, 임선웅 전 직원 기증

학생회 재건의 실패는 학도호국단 체제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했다. 5·17 쿠데타로 전국 각 대학이 휴교 상태이던 1980년 7월, 문교부는 새로운 ‘학도호국단 규칙 준칙’을 각 대학에 시달하였다. 준칙의 내용은 종래 중앙학도호국단과 시·도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지도위원회만 두며, 부서 및 학생서클활동 조직 운영을 학교장에게 위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서울대도 학도호국단을 재조직하였다. 학년 단위 편성을 학과 단위 편성으로 변경했고, 사단, 연대와 같은 편제 명칭을 최고제대(전체), 중간제대(단과대학), 단위제대(학과) 등으로 고쳤다. 임원 명칭도 사단장, 연대장 등 군대식 호칭에서 총학생장, 단과대학 학생장, 과학생장, 학년학생장 등으로 바꾸었다. 간부 또한 임명제 방식에서 선거제 방식으로 일부 바뀌었는데, 과학생장은 학과장의 추천을 받아 총장이 임명하고, 단과대학 학생장은 과학생장들 가운데서 투표를 통해 선출하여 학장이 승인하고, 총학생장은 단과대학과 과학생장들이 선출하여 총장의 승인을 받는 방식을 택하였다.

임명제에서 간선제로 선출된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학생활동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1981년 4월 6일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은 대학 당국에 학생 서클활동 금지조치를 완화하고, 학원정상화 3단계 조치를 취해줄 것을 건의했다. 구체적으로 ‘1. 서클 자체 내 집회 및 세미나 등의 기본 활동 허용, 2. 학과별 신입생 환영회 개최 허용, 3. 학도호국단 각 부서의 회의 개최 허용’이 그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3월 19일부터 학생교내 시위 후 전면 금지 당했던 학생집회활동을 5월 8일부터 재개할 수 있게 되었고, 학도호국단과 각 서클은 학예제 등 행사를 열었다. 학생들이 학도호국단 간부 선출에 참여하면서 학도호국단은 점차 민주화되기 시작했다. 1982년 학도호국단 총학생장·총부학생장 선거에 과학생장(단위제대)들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과학생장은 학과장의 책임 아래 학과 구성원들의 직접 비밀 투표로 선출되었다. 총학생장에는 언더서클 농촌법학회 회원인 김상준(사회학과, 3학년)이 당선되었다. 언더서클 주도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을 학생들의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조직으로 바꾸고자 했고, 학도호국단을 이용하여 더 많은 학생들을 집회와 시위에 끌어모으려 했다. 일례로 1982년의 학도호국단 간부 4명은 박정희 정권 때 폐지되었던 ‘학생의 날 부활’ 등을 위하여 학생총회를 주도하고 반정부 시위를 벌여 지도휴학 처분을 받고 군대로 강제 징집되었다. 학도호국단은 학생 운동 중심 세력이 주도하는 학생 자치 조직으로 변화하여 나갔다.

1983년 정부가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하고 1984년 유화국면이 조성되자 학생들은 학원 민주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학생회를 재건하고자 한다. 1983년 12월 정부의 발표로 구속학생들의 석방과 제적학생들의 복학이 이루어졌으며, 교내에 상주했던 경찰들은 철수하게 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학원 자율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생대표기구인 서울대 학도호국단은 3월 6일 학원 자율화에 관한 공개좌담회를 열어 ‘학칙 개정을 통한 학생대표기구의 민주화’, ‘서클장회의와 편집장회의의 상설화 및 공식화’, ‘서클 등록 문제 해소 및 일상행사의 보장’, ‘강제징집 및 지도휴학제의 폐지’ 등을 주장하여 학생회 재건에 앞장섰다. 3월 9일 아크로폴리스에서 학생 7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공개운영위원회’를 주최하였다. 이날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약칭, 학자추위)를 구성하였다. ‘대학의 자율성 확보’라는 목적에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연석회의 결과보고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도호국단, 1984.3.5.

연석회의 결과보고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도호국단, 1984.3.5.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도호국단이 “자율성의 확보”라는 기본 취지를 가지고 앞으로의 호국단 활동과 사범대학 각종 학생활동에 대해 논의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이다. “과총회는 과내의 의견수렴기구로서 반드시 상설화되어야 한다는 점”, “써클장 모임을 공식화 해야 한다는 점”, “호국단 운영위원회 결과보고의 공개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꼽고 3월 6일에 예정된 ‘학원자율화에 관한 좌담회’를 요구한 총단 입장을 적극 지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학원자율화를 위한 학생문제백서,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1984.3.22.

학원자율화를 위한 학생문제백서,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1984.3.22.

1984년 결성된 서울대학교 학자추위는 학칙, 교육, 문화, 언론 등의 4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하고 3월 14일 아크로폴리스에서 ‘학자추위 제1차 총회’를 가졌다. 당시 존재하는 학원이 가진 제반 문제로는 비민주적 학칙, 비판이 용인되지 않는 학내 언론,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학생 활동, 비민주적 학생자치조직 등을 언급했다. 하루 뒤인 3월 23일,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 처음으로 열린 교수-학생 공개 간담회에서 학교 당국은 학자추위를 학도호국단의 자문기구로 인정하고, 학칙 개정 문제 검토에 대해 이야기 하는 등 학자추위에 대한 소극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에 학생들은 지속적으로 학자추위를 공식적인 학생 자치 조직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학자추위가 결성되고 학생회 재건 속도에 불이 붙자 학생들은 학도호국단과 학자추위와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학도호국단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기구이지만, 그 자체로 모순을 갖고 있었다. 처음부터 민주적인 조직으로 자율화를 추진하려 했던 학생들의 중론에 따라 학자추위의 위원장을 학도호국단 총학생장이 겸임하는 안은 부결되었다. 학생 자치와 학원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노력은 계속되었는데, 학생들은 각 학과 및 단과대학에 학자추위를 속속 구성하고 4월 2일 학도호국단과 학자추위 대표 12명은 학자추위를 공식 기구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단식 농성을 벌였으며, 아크로 집회와 ‘민주화 총회’를 열고 「학원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1980년대에 들어 학도호국단은 본래의 성격이 많이 퇴색되었지만, 국가가 만든 ‘관제 조직’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으며 그 기능 또한 학생회와 양립할 수 없었으므로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학생 대표 조직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서울대에서는 1984년 8월 15일 학도호국단·학자추위·언론협의체·서클협의회가 ‘학생대표기구개선협의회(학생회부활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학원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첫 발걸음을 뗐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 학도호국단은 호국단비를 학생활동비로 전용하려는 시도를 했고, 2학기에 들어 총장을 상대로 하여 호국단비 반환소송을 내기도 했다. 9월 14일 학생들은 학생총회에서 새 학생회칙을 확정하고, 9월 25일부터 27일까지 실시한 투표를 통해 총학생회장을 선출하여 9월 28일 23대 총학생회의 구성을 완료했다. 정식으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 출범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사퇴하고 학도호국단 해체를 선언했다.

하지만 문교부와 학교 당국은 학도호국단 이외의 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84년 10월 문교부는 “총학생회와 학자추위는 불법단체이므로 예산을 지원하지 않으며 호국단은 폐지할 의사가 없다”고 발표했다. 학내에는 총학생회와 학도호국단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전개되었고, 1984년 서울대 학도호국단 총학생장으로 피선된 백태웅(공법학과, 4학년) 등 4명은 외부인 감금 폭행사건과 민한당사 농성을 비롯하여 학내 사태에 부정적 역할을 해왔다는 이유로 학교 당국으로부터 경찰에 고발되어 제명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생회 재건에 대한 학생들의 열망을 정부가 계속 외면할 수는 없었다. 결국, 1985년 1월 문교부는 학도호국단의 폐지와 학생회의 부활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학원의 소요와 분쟁의 불씨의 하나가 되어왔던 학도호국단이 사실상 폐지되고 학생자치기구가 부활케 되었다. 한국대학협의회가 지난 24일 학도호국단의 개편 및 학생자치기구 신설을 위한 건의안을 내고 이것을 문교당국이 받아들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동안의 학원 소요의 소지를 없애고 학원자율화의 기틀을 굳히는데 그 뜻이 있음은 물론이다.…대학이 사회와 분리되어 하나의 상아탑으로만 존재하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그것은 사회와 함께 호흡하면서 그 사회가 갖고있는 갖가지 현상과 사실들을 직접·간접으로 투영시키고 있음이 현실이다. 그런 만큼 학생자치기구가 전체학생을 대표하고 그 의사를 잘 반영하는 명실상부한 기구로 조직되고 운영될 것인지가 앞으로의 과제이다.…” (“학생자치 기구의 부활”, 「매일경제」, 1985.1.28.)

1949년 학도호국단의 창설 이래로 학도호국단이 존재하는 기간 동안 대학은 병영화되었고, 그로 인해 학생들은 강제로 군사주의적 사고와 행동방식을 집단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학도호국단은 독재정부와 군사정부의 정권 유지를 위한 통제장치로 기능하여 대학 내 경직되고 억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대학의 독자적 자율성과 대학인의 비판은 사회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학생 운동과 자치 활동의 암흑시대를 겪으면서도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정부와 대학, 그리고 학도호국단의 테두리 안과 그 바깥에서 학원의 자율권을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투쟁했다. 그 과정에서 1960년 4·19혁명 이후 학생회를 조직할 수 있었으며. 1975년 안보정세를 계기로 재등장한 학도호국단 대신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대학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활발히 움직여 총학생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비록 신군부의 대학 통제 강화로 학도호국단은 존속되었지만 학원 자율화를 열망하는 학생들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학도호국단은 점차 학생운동 주도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학생운동의 힘을 대중적으로 결집시키는 조직으로 그 성격이 변모하게 되었고 학생들은 이를 발판삼아 명실상부한 학생자치조직으로서 민주적 학생회를 재건할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의 역사는 학생운동의 역사,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타율적인 학생조직인 ‘학도호국단’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학생조직인 ‘학생회’로 나아가는 고난의 노정은 민주화를 이룩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기에 충분하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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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1권 시대사』, 한울, 2020.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2권 사회문화사』, 한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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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은, 「감시에서 동원으로, 동원에서 규율로 – 1950년대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14, 역사학연구소, 2004.
오제연, 「1960~19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4.
국가법령정보센터 http://www.law.go.kr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신문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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