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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학과 노명호 교수, 고려시대의 국가와 관련된 집단의식 탐구, ‘고려국가와 집단의식’ 집필

2010.10.27.

국사학과 노명호 교수, 고려시대의 국가와 관련된 집단의식 탐구, ‘고려국가와 집단의식’ 집필

삼국이 분립하여 쟁투하던 시절에도 그들 사이에는 ‘우리’ 혹은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이 있었을까?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다양한 집단의식을 천착하여 <고려국가와 집단의식>을 집필한 역사학자 국사학과 노명호 교수의 대답이다.

<고려국가와 집단의식>은 고려의 강역과 만주, 동북아 국제관계까지를 아우르며 고려시대의 국가와 관련된 집단의식을 탐구한 책이다. 책 제목에서 집단의식이란 ‘우리’ 의식이다. “동일집단의 성원이라는 공통된 자각과 그에 기반한 사고와 정서”다.

노 교수는 삼한일통, 곧 ‘삼국 주민이 하나’라는 인식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을 융합하기 위해 키워낸 이념일 것이라고 말한다. 7세기 무렵에 격화한 삼국 간 전쟁 과정에서 삼한일통이라는 생각이 일각에서 자라났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공통관념으로 확립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10세기부터 14세기 말까지 존속한 고려(918~1392)는 그 국호에서 보듯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태조 왕건은 이를 대내외에 공포했고, 고려 왕실은 고구려 출신임이 강조되었다.

한데 삼국통일이 된 지 250년 만에 등장한 나라가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다? 삼국통일전쟁이 남긴 피정복민의 상처와 정복자에 대한 반감은 고구려 유민과 백제 유민의 집단기억 속에 새겨져 신라 말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골품제에 입각한 신라국가의 체제는 피정복민을 권력 중심부에서 배제하는 체제였기에 삼한일통의식이 삼국 유민 의식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신라 정부의 통치력 와해를 계기로 후삼국으로 재분열됨으로써 삼국 유민 의식은 삼한일통 의식을 압도한다. 그렇다면, 후삼국 통일로 삼한의 재통합을 이룬 고려 때에는 어땠을까. 국가 단위의 ‘우리’ 의식이 있었을까?

고려시대 사람들은 다양한 ‘우리’ 의식을 갖고 있었다. 삼국 유민 의식이 삼한일통 의식과 충돌했고, 무엇보다 지역자위공동체 의식이 광범했다. 삼국유민의식은 13세기 초까지도 지방 민란들에서 삼국 부흥이 표방될 정도로 존속했다. 지역자위공동체는 “행정·군사·경제적인 운명 공동체”였다. 전란이 났을 때 1차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뭉쳤던 지역자위공동체 의식은 거란과 몽고의 침입 때 큰 힘을 발휘한다. 거란 대군의 공세에 겁을 먹고 중앙정부군이 도망친 상태에서 서경민들이 서경성 방어에 성공한 것은 그 한 예다.

국가 단위에 가장 가까운 집단의식이라 할 삼한일통론을 둘러싸고도 고려 내부에서 두 입장이 충돌하고 있었다. 왕건을 비롯하여 건국을 주도한 고구려계 지배층은 삼한일통론을 내세웠는데, 삼한일통에 같은 고구려계이자 동명신화 등을 공유하는 발해(발해 유민)와 탐라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신라 계열의 삼한일통 의식은 ‘우리’에서 그들을 배제했다.

또한 이들은 삼한일통을 인정하면서도, 고구려를 계승한 것인가 신라를 계승한 것인가라는 역사계승 의식을 싸고 대립했다. 태조로 존숭된 왕건이 고구려 계승을 내세웠으므로, 고구려 계승 의식은 고려의 공식적 역사의식으로 12세기 중엽까지 강력하게 작동했다. 이를 한때 뒤집은 것이 김부식이다. 김부식은 묘청 등 정적들을 쿠데타적인 방식으로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삼국사기>를 통해 신라를 정통으로 보는 신라 계승 의식을 공표했으며, 발해를 ‘우리’ 역사의 범위에서 제외시켰다.

<삼국사기>의 역사의식은 고구려 유민계에서 표방한 고구려 계승 의식의 일방적 주도에 제동을 건 것인데, 이 과정에서 불거지는 것이 ‘천하론’을 둘러싼 견해차다. 고려 군주가 황제를 칭하는 데 반대했던 김부식은 당·송 등 한족의 국가만이 유일한 천자국으로 보았다. 12세기 중반 인종대에 잠시 정국을 주도한 묘청은 고려만이 진정한 천자국이라고 생각했다. 김부식과 묘청이 기본적으로 일원적 천하론을 폈다면, 왕건에서 비롯된 주류 지배층이 표방한 건 천하의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각기 다른 중심을 갖는 몇 개의 소천하들이 병존한다는 다원적 천하관이었다. 천하 다원론자인 윤언이는 고려 군주가 황제를 칭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신라뿐 아니라 발해의 전례를 제시했는데, 김부식은 윤언이를 묘청 일파로 몰아 제거하였다.

고려인들에게 국가 단위 집단의식, 곧 ‘고려는 우리나라’라는 의식이 확고해진 것은 장기간 원나라의 압제를 겪고 난 뒤인 고려 말기(14세기 말) 들어서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성립한 근대 민족의식과는 거리가 있지만, 삼한일통 의식은 고려를 원의 한 지방으로 복속하려는 정책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했을 때 왕조만 왕씨에서 이씨로 바뀌었을 뿐 국가·사회가 온전히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삼한일통론은 비로소 고려 말, 조선 초에야 온전히 구현된 셈이다.

2009. 11. 14
서울대학교 연구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