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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칼럼] "규장각과 규장각 사람들"을 시작하면서

2015.08.10.

김인걸(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장)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하 규장각으로 약칭)은 국내외 학자들이 즐겨 찾는 연구기관이면서, 동시에 연구자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로부터도 사랑을 받는, 특히 서울대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명소’입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에게 많이 익숙해진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 조선왕조 의궤 등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재들을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보다 큰 이유는 ‘정조의 규장각’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번에 규장각에서는 여러분들의 규장각 사랑에 보답하고자 하는 뜻을 담아 규장각 칼럼 “규장각과 규장각 사람들”을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규장각과 규장각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들의 궁금증이 다소나마 풀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주말이면 많은 초·중등학생들이 규장각에 ‘견학’와서 선생님들한테 설명을 듣고 질문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나치다가 우연히 듣게 된 질문 가운데 하나는 “‘규장각’이 왜 서울대학교에 있나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조 임금님이 세운 ‘규장각’은 궁궐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여기에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선생님이 어떤 답을 해주실까 궁금했지만 학생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느라 듣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이 중학교 초년생쯤 되어 보이는 학생의 질문에 대해서는 조금만 준비하면 다음과 같은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 22대 국왕 정조 임금이 즉위하면서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설립했는데, 건물 하나만 덜렁 지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책들을 모아서 보관할 도서관도 갖추도록 했고, 젊은 신하들이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여러 제도들도 만들었다. 정조는 신하들과 중요한 책들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것은 단순히 경전과 역사책을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또 민생의 어려움과 같은 당시의 중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당시 규장각은 국립 도서관이자 학문을 연구하는 학술 기관이고 정책 자문기구였다고 할 수 있으니, 건물과 책 중 어느 하나도 빠질 수 없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군신君臣, 사람들이지만.....

당시 수집하고 찍어 낸 규장각의 여러 도서들은 정조 임금이 돌아가신 후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흩어지고 보태져서 일제 때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이관되었고, 1945년 해방 이후 같은 자리에서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넘겨받게 되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도서관은 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 앞인 동숭동 문리대 자리에 있었는데,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이전하면서 도서관에 보관된 규장각 도서도 함께 오게 되었다. 여러분이 보는 이 규장각은 창덕궁 후원에 있는 규장각 건물이 아니라 규장각 도서를 관리하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다.

이 정도까지 얘기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이 나오겠지요. 그렇지만 아직까지 탄성이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 규장각 도서는 중앙도서관 1층에서 보관했었다. 1990년도에 이 자리에 한옥식 기와를 얹은 새 규장각 건물을 짓고 규장각 도서들을 옮겨 온 다음, 1992년에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독립 기구가 되었다. 그 뒤 2006년도에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와 합쳐져서 현재의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되었다. 한국문화연구소는 서울대학교가 동숭동에 있던 시절인 1969년에 창립된 연구소인데, 한국문화연구소와 규장각을 합친 목적은 연구와 자료의 결합을 통한 시너지효과를 거두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의 정확한 명칭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인데, 흔히 ‘규장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머릿돌에 새겨진 이름 때문인 것 같다. 현관과 머릿돌에 ‘규장각’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은 규장각 정신을 계승한다는 점을 표방한 것 같은데, ‘정신’, 즉 규장각 도서가 ‘몸’, 즉 창덕궁에 있는 규장각 건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 현재 규장각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이 네 가지나 보관되어 있고 수많은 국보급 보물들이 있는데, 이 자료들은 그냥 보물이 아니라 학술연구를 통해서 계속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게 되는 학술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규장각’이라는 글씨는 정조의 증조할아버지인 숙종대왕의 친필이다.

숙종어필 ‘규장각奎章閣’ 머릿돌
숙종어필 ‘규장각奎章閣’ 머릿돌

이 정도 설명할 때쯤이면 듣는 학생들 사이에서 “우와~~”하는 소리가 나겠지요?

그런데 일부 교수님이나 전문 연구자들은 일반 학생들과는 조금 차원이 다른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규장각 도서가 어떻게 형성된 것이고 어떠한 성격의 것인가?”, “그 구성은 어떻게 되어있는가?” 등등. 제대로 된 답변을 하려면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하겠습니다. “한술 밥에 배부를 수는 없다.”는 속담처럼 당장 모든 답을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제 그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첫 발을 내딛는다는 의미에서 ‘규장각 칼럼’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지켜오고 규장각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던 서명응은 국가 운영의 깊은 이치를 담고 있는 책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전에 국왕이 마음을 수양하여 덕을 좋아하고 욕심을 물리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바 있습니다. 이 책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의 자세를 뒤돌아보게 하는 말입니다.

‘규장각 도서’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경성제국대학에 넘겨준 것으로서, 1945년 해방 이후 1946년에 개교한 서울대학교가 동숭동의 같은 자리에서 인계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들 자료에는 원래의 규장각 도서뿐만 아니라 일제가 식민 지배를 위해 결집시킨 조선시대[대한제국 포함] 여러 사고史庫 및 관청의 소장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규장각 도서는 조선의 국정 운영에 관한 중요 자료를 망라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의 역사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독보적인 자료들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식민 지배를 위한 도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와 정 반대의 역할도 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실제 해방 이후 규장각 도서는 전혀 새로운 보석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해방 후 선배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일제가 씌워놓은 식민사관의 굴레가 벗겨지고, 규장각 도서에는 새로운 생명력이 부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게 되었고, 규장각 도서도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문화재에서 나아가 세계적인 기록유산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규장각 도서는 일반 박물관의 ‘보물들’과는 달리 연구와 결합됐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학술문화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후학들의 노력이 선배들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 시야나 자세의 문제도 그렇고, 과거보다 크게 개선된 연구 환경에 비추어 볼 때 자료 취급의 방법에서도 큰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정조대 규장각의 중심 건물이었던 창덕궁 주합루의 전경
정조대 규장각의 중심 건물이었던 창덕궁 주합루의 전경

규장각에서는 239년 전 정조가 세운 ‘규장각’과 규장각 도서가 있었기에 한국학 연구가 오늘날의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며, 앞으로 100년, 200년 뒤 우리의 후배들에게 어떠한 자료와 연구 시스템을 물려줄 것인가를 논의해 오고 있습니다. 소장 자료를 잘 보존하는 일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자료에 접근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하는 일에도 나서고 있습니다. 문화재 보존·수리 및 전산화 사업, 자료 이용의 고도화를 위한 21세기 신규장각 자료 구축 사업 등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최근에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착란시켜 놓은 자료 체계의 복원을 위해 전근대 국가아카이브 구축 사업도 시작하였습니다. 연구의 기반을 다지고 연구 수준을 한 차원 높이기 위한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고 힘이 부치는 때가 많습니다.

규장각 도서가 그 본연의 빛을 한껏 발하여 우리의 흐린 눈을 뜨게 하고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하며, 그래서 뒤에 오는 이들이 모든 편견과 독선을 넘어 선현들이 꿈꾸었던 대동大同 세계로까지 나아가겠다는 당찬 포부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특정 분야, 몇몇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규장각 도서는 문학, 역사, 철학 등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 음악, 미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학술 분야의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지역적 범위도 조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서적도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 자료가 제 빛을 발하기 위해서 국내외 많은 연구자들의 협력이 요청되는 이유입니다.

이번에 시작하는 “규장각과 규장각 사람들”이란 규장각 칼럼은 정조의 ‘규장각’과 규장각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규장각 관련 내용들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들을 쉽게 풀어 규장각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는데 1차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아울러 규장각을 통해 앞으로 어떠한 기록문화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것도 큰 목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규장각 칼럼이 조선왕조의 규장각과 규장각 사람들을 다루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규장각을 사랑하는 지금 현재의 규장각과 규장각 사람들에게까지 빛을 비추는 장으로 전화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규장각 칼럼’은 1차로 총 30편을 기획하였으며, 매주 화요일마다 새 칼럼이 연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