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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열심히, 그리고 아쉽지 않게 다시 살고 싶은 그 시절

2007.05.08.

문중양 (국사학과 교수)순진한 시골뜨기였던 나는 과학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과학자가 대단해 보여서 자연대학을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는 최루탄과 짭새가 캠퍼스를 누비던 80년대 전반이었다. 4년 동안 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다. 한때 경제학을 공부해 볼까 기웃거리기도 하던 중에 “과학사 협동과정”이라는 첨 들어보는 대학원 과정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소위 의식있는 천재적인 학생들이 들어가서는 밤새워 공부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귀가 솔깃해졌다. 우리나라 대학에 밤새워 학교 공부를 하는 프로그램이 있단 말이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자연대에 입학했던 전철을 또 다시 밟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때하고는 달랐다. 미래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 고생길이 환히 보이는 그런 길이었다. 게다가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밤새워 공부하던 선배는 감히 들어오라고 반겨주지 못했고, 교수님께는 평생을 춥고 배고플 각오 단단히 하지 않으면 들어올 생각 하지 말라는 경고성 조언을 들었다. 하지만 현실 감각이 둔한 시골뜨기였던지라 오히려 그러한 분위기가 더욱 나를 당겼다. 대학 4년 동안의 목말랐던 갈증을 원 없이 풀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나를 부추겼던 듯하다. 과학자가 되겠다던 어릴 적 꿈을 잃어버린 데 대한 보상을 과학사라는 학문에서 받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대학에 들어온 이후 정말로 공부란 것을 처음으로 했다. 원래 둔한데다가 준비가 안 된 상태였기에 무척 어려웠다. 교수님께 꾸지람도 많이 받았다. 형편없는 기말보고서를 보고 호랑이처럼 가차 없이 질타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석사과정 5학기가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내 인생에 가장 풍부한 마음을 다듬었던 시기였다.

짧지만 길게 느껴진 석사과정을 마치고 대학원에 들어간 지 10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졸업 이후 예전 지도 교수님이 경고하던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춥고 배고픈 날들. 사실 생활의 어려움이야 학위 과정에 있을 때가 더했지만 마음은 더욱 힘들어졌다. 입 밖으로 한번도 내뱉은 적은 없지만 과학사 공부를 괜히 했나 하는 생각도 가끔 들었다. 과거 교수님의 경고를 새겨들을걸! 내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힘든 나날이 상당히 오래 지났을 즈음 일한 만큼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나뿐이 아니지 않은가, 과반수를 훨씬 넘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는 좋은 여건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언젠가 볕들 날이 오겠지 하면서 당시를 과도기로 여기며 위안을 삼던 내가 한심했다. 지금 생각하면 학위 취득 후 짧지 않은 기간을 과도기로만 여기며 시간을 죽였던 것 같다. 아쉽고 아까운 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국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내 인생의 가장 기억에 남는 시기가 있다면 대학원 석사과정 시기와 박사학위 취득 후 전업 시간강사를 하던 두 시기였노라고 말해주고 싶다. 다시 산다면 더 열심히, 그리고 아쉽지 않게 살고 싶다고.

문중양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