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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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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전한 서울대생들 - 한국전쟁 70주년을 기념하여(1)

2020. 9. 17.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전쟁’은 70년 전,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진 비극이자 아직 현재진행형인 전쟁이다. 해방 직후 혼란 상황에서 학교의 기틀을 잡아가던 서울대학교는 한국전쟁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고, 대학의 피난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각종 기자재와 장서가 북한군 수중으로 넘어갔을 뿐만 아니라 미처 피난하지 못한 교직원이나 학생들의 희생 또한 이어졌다. 학교는 전쟁 전 좌익으로 활동한 학생이나 교원이 주도하였고, 우익으로 활동한 사람들은 피난을 가거나 피난을 가지 못한 사람은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학교 사학과 김성칠 교수는 당시의 상황을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28일 낮에는 학교 깃대에 인공국기가 나부끼게 되었고, 어제까지 우익 청년단인 대한청년단 감찰부 완장을 찼던 청년이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는 모습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30일 학교에는 ‘6월 30일 오후 한 시 문리대 교수 · 학생 모이라’는 전단이 붙었고, 교정의 이곳저곳엔 평소에 좌익으로 지목받던 학생, 졸업생 또는 퇴학이나 제명 처분당한 학생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7월 1일 학교는 이미 인민군이 들어와서 그 일부분을 쓰고 있고 연구실에는 아직도 들지 아니하였으나 책은 내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비, 2009.)

한국전쟁으로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학업에만 열중할 수 없었다. 전쟁의 피폐함 속에 학교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고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또는 징집에 의하여 전쟁에 나갔다.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학생들은 국방부 정훈국장의 주선 아래 ‘학도위문대’를 조직하고, 국군 장병들을 위해 위문활동을 했다. 전쟁 전 각 학교에는 현역 장교들이 파견 나와 학생들에게 군사훈련 등을 가르치는 ‘학도호국단’이 존재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각 학교의 배속장교들 대부분은 지원 또는 소집에 의해 현역에 편입되었으며, 학생들도 대다수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거나 피난하면서 학생군사훈련이 자연 중단되었다. 28일 한강 다리가 폭파되고 서울 시내 각 학교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들을 포함한 학생들은 서울을 벗어나 29일 수원에 집결하여 경기도 일대 다른 대학 학생들과 함께 ‘비상학도대’를 조직하였고, 대전으로 후퇴한 학생들은 충청도 지방 학생들과 함께 ‘의용학도대’를 조직하였다. 두 학도대는 정부를 따라 대구로 이동하여 국방부 정훈국의 지원 하에 7월 19일 대한학도의용대로 개편한 뒤 무장을 갖추어 일선에 배치되었다. 학생들 대부분은 대한학도의용대를 거쳐 학도병으로 입대하였으며, 당시 국군 10개 사단과 그 예하 부대에는 학도의용군이 참전하지 않은 부대가 없을 정도였다. 학생들은 피난민 구호, 전황 보도 및 가두 선전 등 주로 후방에서의 선무공작을 담당하였고 9·28 서울 수복을 전후로 하여 여자 학도의용군이 조직되어 각 전투부대에 입대하여 행정업무, 간호업무, 선무활동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가두행진, 김후란 동문 기증, 1953, 한국전쟁 중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교기를 들고 행진하는 학생들 모습이다.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가두행진, 김후란 동문 기증, 1953
한국전쟁 중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교기를 들고 행진하는 학생들 모습이다.

1951년 전선이 38선 일대로 고착되자 3월 1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의 앞날을 짊어질 청년학도들은 시급히 학원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라.”라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문교부는 전국에 흩어진 학생들에게 복교령을 내렸다. 후방지역 학도의용대원은 전원 복교할 수 있었으나, 수업·연구의 지속성 확보와 병역 의무 수행 사이에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 논란이 일어났다. 이에 다음해 2월 국방부·문교부·서울대학교는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징집을 보류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합의에 따라 1952년 1학기부터 현역장교가 대학의 훈련교관으로 배치되어 매주 4시간씩 남학생을 대상으로 교련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정부의 명령으로 해산한 학도의용군은 국군 정규부대에 편입하여 전투에 계속 참가하거나 하사관학교 및 종합학교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나중에 국군하사관이나 장교로 임관되어 계속해서 군대에 복무하기도 하였으며, 복교령 이후 학업에 복귀한 경우도 있었다.

전시학생증, 안준영 동문 기증, 1953

전시학생증
안준영 동문 기증, 1953

문교부는 징집이 유보된 학생의 신분을 보장하기 위하여 ‘전시학생증 교부기준’을 마련하고 이 기준에 따라 신분증을 발급하였다. 학생들은 항상 전시학생증을 소지하고 다니면서 학생임을 증명해야 했는데, 매달 교수들을 통해 학생과에 신분증을 제출하여 출석을 확인한 후 학생과장과 배속장교의 도장을 동시에 받아야 했다. 이를 통해 징집이 연기되어 “대학은 병역기피소”라는 말이 나왔다.

학도의용병들은 한국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모두 2만 2,700여명에 이르렀고, 후방지역 또는 수복지역에서 선무활동에 종사한 학생들은 20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처음엔 후방에서 피난민 구호와 전쟁의 공포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며 지역사회의 안전을 도모하는 선무 심리 활동을 담당했지만 상황이 불리해지면서 학생들은 전쟁터로 직접 뛰어들게 된다. 한반도 전쟁이라는 큰 비극 앞에서 서울대학교 재학생 중 많은 이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다. 난리 통에 관련 기록이 대부분 소실되어 재학생 신분의 참전자 명단은 아직 완벽하게 파악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서울대 학생들 가운데 총 29명의 순국자가 확인되었다. 이들의 이름은 관악캠퍼스 문화관 로비 벽면에 걸려있는 흑요암 석판에 새겨져 있다.

“본교 재학 중 한국전쟁(1950.6.25.-1953.7.27.)에 참전하여 전사한 학생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공적을 기려 명예졸업증서를 수여하고 그 이름을 여기에 새긴다. 당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여 산화한 학생도 43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수많은 재학생과 졸업생이 조국을 위해 몸 바쳤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름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이제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을 맞아 모든 서울대학교인들은 이들의 숭고한 기상과 빛나는 뜻을 높이 기리고자 한다. 1996년 10월 15일 서울대학교 총장”

문화관에 위치한 한국전쟁 전몰자 추모비
문화관에 위치한 한국전쟁 전몰자 추모비
추모비에 새겨진 서울대학교 재학생 한국전쟁 참전 전몰자 명단: 대학, 이름(생몰일자), 학과 및 학년을 제공하는 표
대 학 이 름(생몰일자) 학과 및 학년
공과대학 권석홍 (權錫洪, 1930. 2. 15-1953. 2. 25) 섬유공학과 3학년
김기태 (金基邰, 1929. 1. 16-1950.10. 22) 기계공학과 3학년
김재권 (金載權, 1930. 8. 28-1950. 9. 13) 조선항공공학과 1학년
김정세 (金政世, 1930. 4. 29-1951. 1. 20) 채광학과 1학년
문창열 (文昌烈, 1930. 2. 23-1951. 6. 27) 건축공학과 1학년
박무근 (朴武根, 1927. 7. 29-1951. 2. 9) 기계공학과 2학년
선우창범 (鮮于昌範, 1929.3.15-1951. 4. 23) 화학공학과 2학년
이준익 (李俊翼, 1928.10. 9-1951. 5. 18) 전기공학과 3학년
이진묵 (李珍默, 1926.10. 10-1950. 9. 5) 항공조선공학과 3학년
정태용 (鄭台鎔, 1924.12. 8-1951. 2. 11) 섬유공학과 3학년
한경인 (韓敬仁, 1928. 9. 10-1950.11. 25) 토목공학과 3학년
농과대학 윤필효 (尹畢孝, 1931. 2. 1-1953. 7. 14) 농학과 1학년
정상순 (鄭尙淳, 1930. 8. 20-1950.10. 20) 축산학과 2학년
문리과대학 김선용 (金善龍, 1930. 8. 31-1951. 5. 18) 정치학과 1학년
김세환 (金世煥, 1927.12. 14-1951. 8. 2) 국어국문학과 4학년
전성재 (全成梓, 1930. 8. 12-1951. 9. 24) 의예과 1학년
법과대학 박관민 (朴觀敏, 1925. 1. 26-1951. 5. 21) 법학과 3학년
박승환 (朴勝桓, 1927. 8. 11-1951. 1. 3) 법학과 4학년
장정근 (張正根, 1930. 3. 5-1951.11. 27) 법학과 1학년
사범대학 김명훈 (金明壎, 1929.10. 22-1950. 7. 10) 교육과 2학년
김철기 (金澈起, 1925. 2. 5-1950. 8. 23) 사회과 2학년
이건형 (李建衡, 1928. 5. 24-1950.12. 24) 사회과 2학년
이기구 (李奇九, 1930. 8. 23-1952. 2. 28) 영문과 1학년
상과대학 김내순 (金乃洵, 1930. 1. 20-1951. 1. 1) 경제학과 3학년
김중만 (金重萬, 1928. 8. 2-1951. 8. 13) 경제학과 3학년
수의과대학 정해봉 (丁海鳳, 1930. 2. 20-1951. 6. 17) 수의학과 1학년
의과대학 박승익 (朴勝翊, 1929.12. 18-1951. 5. 18) 의학과 3학년
치과대학 이진형 (李振炯, 1930. 1. 10-1951. 6. 26) 치의학과 3학년
약학대학 송득규 (宋得奎, 1924. 2. 13.-1950.10. 3.) 약학과 3학년

추모비에 새겨진 서울대학교 재학생 한국전쟁 참전 전몰자 명단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던 권석홍(權錫洪)은 한국전쟁 발발 후 제10기 포병간부 후보생으로 육군종합학교에 입교 후 제1기 도미유학 포병장교로 선발되어 미 육군포병학교에 입교하였다. 입교 후 한국에서의 전쟁 상황이 급박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포병중위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전장으로 떠나며 “만일의 경우에는 저 세상에서 복을 빌겠다.”라고 쓴 것처럼 안타깝게도 이 편지는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 되었다.

故 권석홍이 입대 직전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남긴 편지
故 권석홍이 입대 직전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남긴 편지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필리(會者必離)라고 하는 세상에 형생(亨生)하여 이십 유여 일 년. 그렇다할 만 일도 못하고 더구나 부모의 은혜는 조금도 갚지도 못하고 후진약소(後進弱少) 민족의 서러움을 안고 방랑의 길, 재귀는 기약 못할 길을 떠나게 되니 이 한을 어찌하리오. 운명을 개척하여 많은 복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진정한 진리, 삶이 무엇인가 탐구해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만일의 경우에는 저 세상에서 복을 빌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동생들 그리고 여러벗들. 재회의 날, 환희에 찬 얼굴로 지난날의 노고를 이야기나 하기로 합시다. 안녕히들 계세요.
- 권석홍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이던 김세환(金世煥)은 전쟁이 발발하자 결혼한 지 5년 만에 아내와 딸을 남기고 학도호국대 장교(소위)로 지원했다. 1951년 8월 강원 고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군복무 시절의 김세환
군복무 시절의 김세환
문리과대학 학도호국단 학생등록증, 1950.10.29.
문리과대학 학도호국단 학생등록증, 1950.10.29.단기 4283년 10월 29일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도호국단에서 발행한
김세환의 학생등록증이다.
당시 김세환은 국어국문학과 4학년이었다.
학도호국대수첩
학도호국대수첩‘우리의 맹서’, ‘학생의 맹서’,
‘학생의 노래’, ‘학도호국대의 노래’,
‘학도호국단취지’와 ‘대한민국학도호국단규정(抄)’,
‘隊행사출석표’ 등이 실려 있다.

1948년 서울약학대학에 입학하여 전쟁 당시 약학대학 3학년생이었던 송득규(宋得奎)는 1950년 7월 육군 제3사단의 일원으로 참전(군번: 0332499)하였다가 1950년 10월 3일 전사하였다. 그의 이름과 사진은 약학대학의 『단기 4283년 학생사진첩』에 54번 학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위패(12-7-043)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져 있으며, 이름은 전쟁기념관의 025-ㄱ-036에 위치한 명비에 새겨져 있다.

전사확인증, 1957.1.2.
전사확인증, 1957.1.2.송득규의 형 송웅규의 이름으로 발행된 송득규 전사확인증이다.
군인유족기장수여증서(앞), 1958.5.12.
군인유족기장수여증서(앞), 1958.5.12.국방부장관이 송웅규에게
수여한 군인유족기장수여증서이다.
군인유족기장수여증서(뒤), 1958.5.12.
군인유족기장수여증서(뒤), 1958.5.12.사망 장소가 원산 지구임을 알 수 있다.
청사에 빛날 학도병의 충의 학도병현충탑건립 21일·제막식도 장엄 대학신문, 1955.6.27.

청사에 빛날 학도병의 충의
학도병현충탑건립 21일·제막식도 장엄
대학신문, 1955.6.27.

한국전쟁으로부터 5년 후인 1955년 6월 21일 전몰학도 의용병의 충의를 기리기 위한 학도병 현충비를 포항 흑석동 국군묘지 입구에 건립하고 제막식을 거행하였으며 유가족 및 생존자에게 기념품 및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이를 비롯하여 1954년 10월 21일에는 중앙학도호국단학생위원회에서 전쟁 당시 전몰학도의 위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충혼탑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각과 김종영 주임교수가 감독을 맡아 높이 31척에 넓이 3척의 충혼탑을 치열한 격전지였던 포항 용흥동에 건립하고 1957년 6월 25일 ‘전몰학도 충혼탑 제막식’을 진행하였다.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끝까지 수호하기 위하여 위기일발의 포항전선에서 적과 용감히 대결, 꽃같이 사라진 전몰학도 의용병의 충의를 영원히 명기할 학도병 현충비가 흑석동 국군묘지 입구에 건립되어 대한민국 호국학도의 영원한 상징이 되고 있다.”

서울대학교는 1946년 개교 이후 불과 4년 만에 발발한 한국전쟁이라는 큰 비극 앞에서 많은 상흔을 입었으며, 재학생 중 많은 이들이 참전하여 고귀한 목숨을 희생하였다. 해마다 6월이면 본부 보직 교수들이 호국정신과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선배들의 희생정신을 기리자는 의미에서 추모비를 참배한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지키려 “펜 대신 총”을 쥐고 참전하였던 이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땅과 삶의 증거가 된다. 또 다른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젊음과 학업, 나아가 일신을 희생한 선배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또 잊지 않아야 한다.

참고문헌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비, 2009.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7.
서울대학교 기록관, 『고등교육의 새 요람 서울대학교 1945-1953』, 2015.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2016.
안경식, 「한국전쟁기 대한민국 학생의 삶」, 『교육사상연구』 24, 한국교육사상연구회, 2010.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사료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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