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자치언론은 학내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여 학생들이 스스로 신문이나 잡지 등을 발간하는 독립적인 자치 단위로 학생회나 특정 단과대학에 귀속되지 않은 언론을 말한다. 서울대학교에는 많은 단과대학 교지와 신문이 존재하는데, 그 중 교지편집위원회는 학내 자치언론으로 87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사회 참여적이고 자주적인 대학언론을 세우겠다는 지향점을 가지고 발족되었다. 1987년 총학생회 학술부를 중심으로 85, 86학번이 주축이 되어 교지 준비팀을 구성하게 되었고 1988년 6월, 재정적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교지 창간 준비호 2000부를 발간했다. 경찰서의 불심 검문에 적발·압수당하여 비밀리에 다시 인쇄를 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친 후였다.
“88년 당시 서울대학교만 유독 교지가 없었습니다. 이전에 학도호국단에서 발간된 교지가 있었던 적은 있었다고 합니다. 대학신문도 있고 단과대별로 발간하는 잡지도 있었지만 교지가 없는 데 대해 총학생회 준비위원회와 학내 언론협의회 차원에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교지를 창간하기로 뜻을 모으고 교지 편집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1987년에 총학생회 홍보위원회에서 일했던 적도 있고 해서 제가 초대 편집장으로 선출돼 실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1988년 3월 11일 교지 편집위원회 발족 취지문을 대자보로 써 붙이고 교지실이 첫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지도교수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진보적인 성향이셨던 사회학과의 고 김진균 교수님께 부탁을 드렸고 승낙을 받았습니다. 약 30년 전의 일이라 세부적인 과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1학기 중에 원고작업을 했고 학기가 끝나가는 6월쯤에 창간 준비호를 발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창간 준비호를 인쇄하는 과정에서도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을지로의 인쇄골목에서 교지 창간(준비)호를 인쇄했는데 인쇄제본 과정에서 중부경찰서의 불심 검문에 적발돼 압수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서울지역 교지 편집인 연합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다시 인쇄를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발간한 교지 창간호는 학생회관 앞에서 가판대를 만들어 학우들에게 판매했습니다. 유료판매를 통해 제작비를 충당해야만 했었습니다.” (최연구 초대 편집장)
『관악』 창간호, 교지 관악편집위원회, 1990
창간 준비호가 세상에 나온 지 2년 후인 1990년 2월 20일 교지 『관악』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제호(題號)는 과거 서울대와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관악’으로 정하고, 제자(題字)는 신영복 교수의 글씨를 받았다. 교지 창간부터가 민주언론운동 차원에서 이루어졌기에 이러한 취지에 공감하면서 운동과 언론에 관심이 있는 공대, 사회대, 인문대 등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편집위원과 수습위원으로 참여했고 김인걸 교수, 김진균 교수, 남궁호경 교수가 지도를 맡았다. 창간호에서는 ‘80년대 관악 학생운동사’와 ‘13인 열사평전’이 창간기획으로, ‘민족영화운동의 흐름과 전망’이 문화기획으로 실렸고, 그밖에 특별기고로 ‘북한 통일정책의 과학적 일고찰’이 수록됐다. 창간 준비호 발간 이후 89년부터 학생회비에 교지 대금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재정문제를 일단락 지었으나 완전한 편집자율권과 충분한 예산 확보 등은 교지 편집위원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었다.
“… 학우 여러분! 그리하여 「관악」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학원의 건설, 조국의 자주 · 민주 · 통일’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교지 편집위원회가 2년여의 준비기간 동안 여러 문제를 풀어오면서 수십번 확인해 온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분명하고도 중요한 것은 관악 2만 학우가 자주적인 의사를 개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언론매체를 소유했다는 것과 관악 학우의 창조성이 그것을 더욱 빛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창간을 맞이하며〉, 교지편집위원회)
1990년대 『관악』은 학내외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추구하여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백기완, 유시민, 손석희 등 외부 인사들의 기고도 받았다.
“기고를 하겠다고 저자 스스로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고, 보통 기획안이 있고, 취재하면 수소문하는 중에 원고를 써주겠다고 나서는 분들이 있는데, 기획안을 상세히 알려드릴 필요가 없이 큰 주제만 말씀 드리면 원고를 작성해주는 경우가 있고 이런 경우에 투고, 기고 형태로 싣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김효준 편집장)
또한 학생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감골 까치의 노래’(97년부터 ‘관악 한 학기’), 전야 등 서울대생이 즐겨 찾던 서점의 도서 추천을 받는 ‘붕어가 든 붕어빵 주세요’ 코너를 통해 서울대만의 색깔을 더하기도 했다. 4호부터 ‘매체혁신’을 추구하여 민주언론 운동의 정신은 유지하되 ‘읽히는 교지’를 지향하며 대중성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내용별로 기획 분화를 추진하여 교지 『관악』만의 스타일을 갖추었는데, 1~3호에 실렸던 편집실 기획, 논단, 글터, 문화기획 등 기획형태에서 학원문제를 중심으로 문화, 여성, 언론, 시사 등으로 내용을 세분화하였다. 이는 기획에서의 파편화를 지양하고 각 기사들의 유기적인 관계를 지향하여 책 자체의 일정한 형식을 마련한 것이었다.
『관악』 제4호의 주요내용으로는 ▲화보, ‘사진으로 보는 관악 한 학기’, ▲편집실 기획, ‘관악 진보지성의 오늘을 말한다’, ‘관악 문화풍토의 오늘을 말한다’, ▲특별기고: ‘전대협, 신화가 아닌 우리의 희망!’ ▲학원기획, ‘언론고시 열풍의 관악’, ‘노동자언론에서 말한다’, ▲문화기획, ‘역사를 일구어간 세계의 진보적 음악가들’, ‘진보의 영상으로 역사를 말한다’, ‘변혁의 미술, 미술의 변혁’등을 실었다. 『관악』 제4호의 [전환기를 제기하며]에 이어, 5호 [다시 전환기를 제기하며], 6호 [모색을 넘어 실천의 광장으로], 7호 [내일의 삶을 준비하는 길목에서], 8호 [대학문화의 제자리 찾기를 위하여], 9호 [달라지는 진보운동, 달라지는 서울대]로 이어지는 편집실 기획 코너는 편집위원회가 추구하고자 한 일련의 체계적이고 심화된 기획의 성과이기도 했다.
교지 『관악』의 편집위원이 되려면 수습위원에 지원해야 했고 지원자는 논술과 면접을 치렀다. 수습위원 전형의 논술문제는 대체로 시국 또는 학내 현안이나 언론에 대한 관점을 묻는 것이 많았다. 1996년 제14기 수습모집 논술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1. 한겨레 2월 9일자에 서울대를 졸업하고 20년이 되면 다른 사람에 비해 수억 원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글이 실렸습니다. 누구는 서울대병은 논리와 이성으로 격파될 수 없는 문화적 현상이며 학연중심 사회에서 서울대가 이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면을 말합니다. 그에 반해 서울대법 제정운동이 일어나고 국가경쟁력이라는 면에서 서울대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울대에 다니고 있는 학우로서 요즘 논의되고 있는 서울대 폐교론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혀 보십시오.
2. 과거의 잘못을 반성한 적이 없는 우리 역사에서 요즘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잘못을 평가하는 작업이 활발합니다. 작년에는 5.18을 중심으로 학생, 재야, 시민운동 등 많은 사람이 참가하여 대규모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기존 정치세력도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이름으로 그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그 작업의 정당성을 살리기 위해 기존 정치세력에 동참해야할지 아니면 그것을 이용하는 세력의 허구성에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그 작업에 반대해야할지 의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 흔히 대학언론은 진보언론이며 대항언론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운동권이 자신의 정체성에 많은 의심을 하듯이 대학언론도 자신의 정체성에 많은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교지 「관악」은 어떤 식의 정체성을 가져야 하며 어떤 활동을 해야 할까요?
논술과 면접을 치르고 난 뒤 합격자 통보를 받으면 수습위원으로 한 학기 정도 지속적인 편집 활동을 하고 편집위원으로 승격되었다. 수습위원과 편집위원을 가르는 기준은 교지에 실을 코너 하나를 책임질 수 있는지의 여부였고 수습위원은 대개 편집위원을 도우면서 배웠다. 편집위원회 활동은 정기적으로 편집회의와 기획회의에 참석하고 취재활동을 하며 각종 편집기술과 노하우를 배우는 것이었다. 편집위원들이 대학과 세상을 누비며 담아온 이야기들은 『관악』 편집실에서 치열한 토론을 통해 단단한 글이 되었다.
“편집회의는 정기적으로 1주일에 한번 있었고, 부정기적으로 수차례 있었습니다. 특히 책 발간을 앞두고는 정신없이 많이 있었죠. 기본적으로, 다음호 발간을 위한 회의였으며 이전 호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의 방향 모색을 바탕으로 다음호의 기획기사 주제를 선정하고 기타 꼭지(코너)들의 내용에 대한 기획을 하는 회의였습니다. 기타, 인쇄소 선정이나 예산 문제, 편집장 선출, 수습위원 선발 등의 운영을 위한 내용도 다루었습니다. 편집위원들이 기획안을 작성하여 편집위원회에 제출하고, 그 기획안들을 편집회의에서 논의하여 정리합니다. 현실가능성, 기획의도, 기대되는 내용, 저자 섭외, 꼭지배분 등을 종합적으로 논의하고, 편집위원회가 직접 집필할 것, 외부에 원고 청탁할 것, 취재 대상 및 섭외 대상 등을 토론하여 정하고 현실 가능성을 타진해 본 이후 다음호에 실리기에 충분한 기획의도와 가능성 등이 결론 나면 본격적으로 원고 생산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했습니다. 토론이 길어지는 경우는 하룻밤 꼬박 새는 경우도 많았죠. 특히 책 발간을 앞두고 원고 마감하는 일, 페이지 레이아웃, 사진 배열, 교정, 교열 작업 등을 할 때면 며칠 밤을 꼬박 새는 경우도 빈번했습니다. 급할 때는 인쇄기획사에서 철야를 하거나, 인쇄소에서 철야하는 경우도 있었죠. 그리고 나서 책이 나오면, 한 트럭 가득 책이 학생회관으로 배달되는데, 그 때의 두근거림과 희열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지요. 그런데, 그 배달된 수천 권의 책을 모두 편집위원회 사람들이 배포해야 하는 어려움이 또 기다리고 있죠. 배포가 끝난 그 날 저녁은 밤새 술을 펐습니다.” (김효준 편집장)
잡기장
교지 관악편집위원회 기증, 1990년대
잡기장에는 편집위원들의 일상과 단상이 담겨있다. 이 중 「LOVER&LOVERS」(1996)에 담긴 ‘교편인의 활동 지침’에서는 교편인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하여 “1. 열심히 일해야 한다.”, “2. 우선 읽도록 만들어라”, “3. 글을 쓰는 건 컴퓨터나 펜이 아니라 우리의 두 발이어야 한다.”, “4. 적들과 맞서, 말싸움에서 꼭 이기는 살아 있는 기자가 되자”라고 언급하면서 “우리 대학 교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중심으로” 교지 내용을 작성할 것을 당부하였다.
게릴라 관악 제1호 ~ 제4호
교지 관악편집위원회 기증, 2002
『게릴라 관악』은 교지 관악편집위원회에서 발행한 주간 신문이다. “관악의 모든 과/반 학생회의 민주적, 수평적, 연대에 근거하여 아래로부터 이뤄지는 공론장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자율적 대중 정치 신문”을 표방하였다. 기획 단계부터 ‘학생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편집회의’를 열고, 누구든지 글을 실을 수 있는 지면을 지향했다. 편집회의 공고는 대자보로 알렸다.
“관악에 매체가 적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교지 관악 편집위원회에서 주간신문을 따로 발행하는 이유는 관악에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대중 앞에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자보나 총학생회 게시판도 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며 얼마만큼 많은 사람이 볼지도 의심스러운 일이다. ‘게릴라 관악’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그것이 최소한의 기준만 충족시킨다면 신문에 실릴 것이다. … ‘게릴라 관악’이 관악 학생사회에서 하나의 광장이 되기를 바란다.” (게릴라 관악 제1호, 2002.9.9.)
2000년대에 들어서는 사회 분위기 변화에 따라 교지의 내용과 형식도 변화했다. 교지의 판형은 학생들에게 친숙한 일반적인 단행본 크기로 바꾸었고 필진은 동아리나 학생운동, 자치활동단위에서 활동하는 학부생 위주로 구성되어 학술적인 분석이나 비평보다는 인터뷰를 통해 직접 목소리를 담으려는 시도가 많아졌다. 특히 2011년 제43호에 실린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은 기륭전자 투쟁을 르포 형식으로 다룬 기획기사로 주간지 『시사in』의 대학 기자상(사회 보도 부문)을 수상했으며 그 외에도 ‘용산 참사’(제40호)와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산업재해 논란’(제47호) 등을 보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관악』은 시설노동자, 시간강사, 이주노동자, 성 소수자 차별, 청소년 인권 등 사회 문제에 대한 진보적 담론의 장을 꾸준히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2012년에 펴낸 제44호 ‘기억해야할 지나침’에서는 학생의 시선으로 대학 법인화를 바라본 기사와 자보 모음집을 실어 당시 법인화와 관련한 서울대학교 학생사회 내의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을 심도 있게 다루기도 했다.
이처럼 교지 『관악』은 총학생회 산하 독립상설 자치기구로서 서울대학교 2만 학우의 목소리와 깊이 있는 고민을 담아내는 종합학술매체이자 언론운동매체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시대와 매체의 변화 속에 지원자는 점차 줄어들었고, 2010년대에 들어와 교지 편집위원의 활동기간이 짧아지고 학내 언론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를 보였다. 이에 대해 교지 편집위원회는 여러 언론매체의 출현 및 역할 분담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담론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도 하락에 따른 학내언론 전반의 위기로 인식하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관악』 역시 이와 같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2014년 11월 21일 종간호를 마지막으로 교지 『관악』은 서울대학교 자치언론의 역사 속에서 짧지 않은 역사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지만 26년의 역사를 담은 잡기장, 수습지원·편집활동·재무 관련 문서·백기완 통일문제 연구소 소장 친필 원고, 서울지역 교지편집위원회 연합 활동 관련 문서 등 교지 관악편집위원회가 남긴 기록물은 2014년 기록관으로 이관돼 보존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교지 『관악』이 종간합니다. 1988년 창간 준비호를 시작으로 26년 동안 48권의 책이 『관악』의 이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1,514개의 기사와 198명의 편집위원, 그리고 매 시기의 ‘이만 관악 학우’가 『관악』을 채웠습니다. 『관악』의 종간은 서울대 학생사회의 몰락을 상징하지도 청년실업과 보수정치의 결과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학생기자들이 자신의 손과 발로 진실을 옮겨내고 있고, 늦은 밤 학생회관에는 지금도 불빛이 반짝입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쓰이지 않을 주어 『관악』은, 그 모든 말과 행동을 지지합니다. 고맙습니다.” (교지 『관악』 종간 공고, 길들여지지 않는 시대의 눈동자 교지관악편집위원회)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교지편집위원회, 『관악』.
서울대학교 기록관, 『도약의 나래를 펴라 1975-2017』, 2017.
김효준(2017. 8. 28.). 서면인터뷰.
최연구(2017. 9. 12.). 서면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