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해방 이후 한국 최초의 종합대학인 서울대학교는 기존에 있던 여러 학교들을 통합하여 설립되었다. 서울 곳곳에 단과대학이 개별적으로 위치하였고, 이후 교사 이전을 거듭하면서 1960년대 서울대학교의 캠퍼스는 동숭동의 문리과대학·법과대학 캠퍼스, 연건동의 의과대학·미술대학 캠퍼스, 공릉동의 공과대학, 청량리 문리과대학 이학부, 종암동의 상과대학 캠퍼스, 용두동의 사범대학·가정대학 캠퍼스, 을지로 6가의 음악대학 캠퍼스, 수원의 농과대학과 수의과대학 캠퍼스, 소공동의 치과대학 캠퍼스 등 서울과 경기 일대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이는 단순히 지역적인 시설의 분산이라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대학 구조적인 측면에서 한계로 작용하였다. 각각의 독립적 성격을 띠었던 단과대학들은 일체감이 거의 없는 느슨한 연합체로서 존재하였고, 단과대학별 의식이 지나치게 강하여 단과대학 단위를 넘어서는 학술교류나 합동 연구가 기대되기 어려웠다. 또한 동일과목과 시설들이 단과대학별로 중복 설치되어 교육운영상 비효율적인 요소가 많아 학문의 교류와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1958년 당시 문리대 이양하 교수는 서울대가 다른 사립대에 비해 발전이 더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각기 독립되어 있던 여러 대학을 규합하여 11개 대학으로 구성되는 종합대학교를 만들었다. 그러나 각 대학은 반독립체로 각자의 길을 걸어왔고, 이 종합성 결여에서 오는 우리 서울대학교의 약점과 모순은 날이 갈수록 해소될 조짐이 보이지 아니한다.” (이양하, “종합대학으로 가는 길”, 「대학신문」, 1958.10.15.)
서울대학교 내외부에서는 교육과 연구의 내실화를 위해 연립대학의 형태를 뛰어넘어 각 기구를 유기적으로 조직할 필요성이 거론되었고, 분산된 기구들을 한 공간에 모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그리하여 1960년부터 종합대학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기 위한 종합화 계획을 본격적으로 수립하게 되는데, 구체적인 계획은 1960년부터 1971년까지 총 5건이 제출되었다.
1958년 11월에 설치된 서울대학교 종합계획수립위원회는 12개 단과대학의 실태를 파악한 뒤 교사 배치 및 시설의 확충·변경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여 1960년 6월 「서울대학교 종합화7개년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분산된 캠퍼스를 4개 중심지역에 집중시키는 것으로 동숭동 중앙부에 본부·도서관·문리과대학 문학부·상과대학·법과대학·음악대학·미술대학·의과대학·치과대학·약학대학·행정대학원을, 수원에 농과대학·수의과대학을, 공릉동에 공과대학·문리과대학 이학부를, 용두동 및 을지로에 사범대학·부속학교를 설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하지만 문리과대학 분리와 관련한 교육법 개정 문제, 음악대학과 미술대학의 통합 문제, 예산 문제 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종합화7개년계획은 1962년 5월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서울대학교 종합화5개년계획」으로 수정되었다. 1966년까지 ‘동일계 대학의 동일지 집중 원칙’을 더욱 강화하여 6개 센터(인문사회센터, 교육센터, 공업센터, 농업센터, 예능센터, 의치약센터)를 중심으로 동숭동, 연건동, 혜화동 일대에 집중하여 단과대학을 조성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이 계획 또한 정부의 예산 부족과 함께 중앙공업연구소 이전 문제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종합화5개년계획은 1966년에 「종합화6개년계획」으로 변경되었다. 1966년부터 1971년까지 공과대학과 농과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단과대학을 동숭동과 연건동으로 이전하여 메인캠퍼스로 정하고, 공릉동을 공업캠퍼스로, 수원을 농업캠퍼스로 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안은 앞서 제출된 계획과 같이 건물·시설 확보에 중점을 두면서도 기구·조직·인원 등의 대학 기능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1967년 11월 정부 개입으로 이 계획 또한 무산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계획의 기간을 10년(1968~1977)으로 연장하여 서울대학교를 세계적 수준의 대학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보다 큰 규모의 계획을 구상하고 조속히 공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결과 1968년 1월 종합화10개년계획이 성안되었고 정부가 계획을 주도하여 확정하면서 캠퍼스 이전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68년 6월 「서울대학교종합화10개년계획」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이 계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같은 해 7월 ‘서울대학교시설확충특별회계법’(법률 제2034호)이 제정되었다.
종합 캠퍼스 관악 기슭에
71년초 착공, 단계적 이전 - 6백여만평 농·의약계등 제외, 대학신문, 1970.3.23.
“만년웅비의 꿈을 키울 학문의 전당, 서울대학교의 종합캠퍼스 부지가 영등포구 신림동 관악산 일대로 확정됐다. … 서울대학교종합캠퍼스 부지는 現관악컨트리클럽 97만3백30평과 국유·사유지 97460평, 학교 연습림 5146291평으로 총 621481평이다. … 이 계획이 완성되면 동양 최대의 캠퍼스가 될 것이며 동계획은 올해 안에 마스터플랜이 성안되면 71년에 착공되게 된다.”
관악산 기슭을 캠퍼스 부지로 선정하게 된 이유는 서울시 중심부에서 15km 이내에 위치하고, 한강 남쪽에 위치하여 이를 개발하려는 정부방침과 일치하며, 인근에 농대 연습림과 인접하여 광범위한 활동영역을 갖출 수 있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유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동숭동캠퍼스를 활용하고자 했던 이전의 계획들과 달리 「서울대학교종합화10개년계획」은 의과대학과 농과대학을 제외한 모든 단과대학을 새로운 부지로 이전해 종합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부지의 후보지로 검토된 곳은 공릉동 공과대학 주변, 수원 농과대학 주변, 시흥군 안양읍 비산리 등이었다. 태릉 일대가 최종 종합캠퍼스 부지로 발표되기도 하였으나 한강 이남 개발을 추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1970년 2월, 종합캠퍼스 부지를 당시 골프장이었던 관악산 기슭 일대로 최종 결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70년 4월 8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서울대학교 설치령에 의거하여 총장 산하에 기획위원회와 건설본부가 설치되었고, 기획위원회에 ‘교육기구 및 기구조직분과위원회’와 ‘시설분과위원회’를 두어 ‘아카데믹 플랜(Academic plan, 교육기구 개편)’과 ‘마스터 플랜(Master plan, 캠퍼스 종합건설계획)’을 입안하도록 하였다. 아카데믹 플랜은 서울대학교가 지향할 교육이념을 교육기구 및 제도 종합화를 통하여 구현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아카데믹 플랜에서 캠퍼스의 기본 배치는 학문 계열에 따른 센터 위주로 이루어졌다. 교육지원의 핵심이 되는 중앙도서관과 본부, 학생회관은 캠퍼스 중심에 배치하고 주변에 단과대학간의 연계와 교류가 가능하도록 하며, 주변 경관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으로 캠퍼스를 조성해야 한다는 논리가 중시되었다. 이러한 기본방침을 반영하여 캠퍼스 공간에 건물형태로 구현한 마스터 플랜 초안은 1970년 공과대학 응용과학연구소에서 작성하였다. 이 초안을 바탕으로 건설본부는 아세아재단의 도움을 받아 Dober, Paddock, Upton & Associate(DPUA)에 자문을 요청하여 1971년 10월에 최종적인 마스터 플랜이 완성되었다. 공식 확정된 안에서는 캠퍼스 중앙에 중앙도서관·학생회관·교수회관을 배치하여 중심 지구를 두고 동쪽에는 인문·사회학문 분야를, 서쪽에는 이공계 학문 분야를 배치하였으며 주 건물군 사이에 예술 학문 분야를 위한 교육 시설을 배치하였다. 또한 기숙사와 교수아파트로 구성된 주거 지역은 낙성대로 이어지는 캠퍼스 북동쪽에 배치하였고, 지역민들의 이용을 고려하여 교육시설 주변에는 종합운동장, 대강당, 체육관 등을 배치하였다. 건물은 평균 4층으로 처리하고 관악산의 자연환경과 조화를 고려한다는 세부사항을 마련함으로써 현재까지 이어지는 메인캠퍼스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이는 아카데믹 플랜을 거의 그대로 공간화한 것이었다. 대학 인구 또한 아카데믹 플랜의 입장을 수용하여 2만 명으로 한정하였다.
「서울대학교종합화10개년계획」을 바탕으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공식과 착공식이 개최되고, 본격적인 공사단계에 돌입하게 된다. 1971년 4월 2일, 서울대학교 종합화의 구체적인 실현을 알리는 기공식이 관악산 부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음악대학 합창단의 축가로 시작한 기공식은 국기 배례, 국민교육 헌장 낭독, 총장 식사, 학생 대표 축시 낭독, 대통령 치사, 대통령 발파 스위치 점화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 기공식과 함께 사범대학 부속여자중학교 학생들의 경축 매스게임이 이어진 이 날 행사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교수와 학생, 내외귀빈, 보도진, 주민 등 모두 7천여 명이 참가하였다.
건축착공식은 기공식 개최 1년 후인 1972년 7월 20일에 거행되었다. 관악캠퍼스 조성 사업은 총 3단계로 기획되었다. 1단계는 1972년부터 1973년까지 인문·사회관(대학원, 행정대학원, 인문대학, 사회대학, 법학대학, 경영대학, 사범대학), 자연과학관(자연과학대학), 중앙도서관, 학생회관(학생 자치 활동 시설, 식당, 보건진료소), 대학본부, 파워플랜트, 기숙사, 종합운동장, 간이 체육관, 온실 등 핵심 건물을 완공하는 것이 목표로 주어졌다. 하지만 예산부족과 공사 지연으로 기한이 연장되면서 최종적으로 1단계는 1974년 3월 30일에 이루어졌다. 자연히 2단계와 3단계 건설도 연기되었다. 2단계는 1974년 4월부터 1975년까지 진행되어 약학관(약학대학), 환경가정관(환경대학원, 가정대학), ROTC관, 예능관(미술대학, 음악대학), IMC관(종합 시청각 교육관)이 완공되었다. 3단계는 1977년 이후부터 진행되었는데 대강당(現문화관), 박물관, 공학관(공과대학), 실내체육관이 완공되었다. 이 중 공과대학(1980년 완공)을 제외한 나머지 시설들은 종합화 계획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마련된 ‘서울대학교시설확충특별회계법’의 시효 소멸에 따라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어 대강당은 1985년, 실내 체육관은 1986년, 박물관은 1996년에 완공되었다. 1975년 발간된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시설핸드북』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종합화에는 총 투자액 208억 7백 만원, 부지 107만 2천 평(주 시설지구 40만 평)에 건물 10만 4천 평, 정지(整地)공사 면적 90만 ㎥, 도로 면적 15 km가 투입되었다.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건설현황사진첩
서울대학교 건설본부, 1973.9.
1971년부터 시작된 관악캠퍼스 건설 상황에 대하여 1973년 9월 서울대학교 건설본부에서 중간 점검을 위해 남긴 기록사진집이다. 건설 단계별로 색상을 표기한 그림을 시작으로 하여 인문 · 사회 · 교육계, 자연과학계와 교육시설 지역의 터가 잡히고 건물의 뼈대가 올라간 모습이 사진으로 담겨있다.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시설핸드북
서울대학교 건설본부, 1975
1975년 2월, 신축 관악캠퍼스로의 1단계 이전에 맞추어 신축시설에 대한 설명 및 사용 안내를 위해 발간된 책자이다. 캠퍼스종합화계획의 개요를 포함하여 전반적인 캠퍼스 시설 및 설비에 대한 상세내역이 수록되었으며, 권말에는 전체 캠퍼스 배치도가 첨부되어 있다. 방침으로 5가지의 사항을 두었다.
“① 종합대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운영의 합리화를 기하기 위하여 현재 분산되어 있는 캠퍼스를 통합계열화하여 의학 캠퍼스 및 농업캠퍼스는 현 위치에 두고 종합캠퍼스는 새로이 관악산에 건설한다. ② 서울대학교 종합건설계획은 1977년 완성을 목표로 한다. ③ 대학교육을 질적으로 강화하여 점차 대학원중심의 대학교로 개선발전시켜 전문분야별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한다. ④ 종합건설계획의 재원은 의학계 및 농업계 캠퍼스를 제외한 국유재산을 각각충당하고 부족되는 재원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⑤ 교육차관으로 교육연구용 기계기구와 도서를 연차적으로 확충 보강한다.”
관악캠퍼스로의 이전은 건설공사의 단계별 완성에 따라 실시되었다. 1차 이전은 1975년 1학기 개강을 앞두고 1-2월에 진행되었다. 1단계 대상 기관은 대학본부, 대학원, 경영대학원, 교육대학원, 신문대학원, 행정대학원, 문리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가정대학, 교양과정부, 도서관, 박물관, 법학연구소를 비롯한 본부 산하 연구소 6곳 등 모두 20개 기관에 이르렀으며, 이전 기관의 인원은 학생 10,843명, 교수 633명, 직원 385명으로 총 11,861명에 달하였다. 1975년 1월 20일, 관악캠퍼스로의 이전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서울대학교가 도약의 꿈을 안고 관악캠퍼스로 옮기기 시작한 20일, 동숭동 캠퍼스 주변에는 재학생과 교직원, 졸업생, 그리고 대학가 주민들이 모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지성과 낭만의 요람 서울대학교는 동숭동 대학가에 자리한 후 반세기의 긴 격랑을 거쳐 새 터전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매머드 이사 작전은 이날 도서관의 첫 짐이 정든 캠퍼스를 떠남으로써 시작됐다. 이날 서울대학교 이만갑 도서관장이 관악캠퍼스 이훈섭 건설본부장으로부터 열쇠 집기 등 도서관 건물의 인수인계를 마친 다음 첫 트럭이 출발한 것. 대한통운소속 서울 7아 3007호 등 12톤 트럭이 도서관의 책 2백여 상자를 싣고 교문을 나서자 학교에 나와 있던 교직원, 학생들은 물론 대학가 주민들도 발길을 멈추고 떠나는 차에 박수를 보내며 석별을 아쉬워했다. 오는 3월말까지 약2달 동안 계속될 서울대 이전은 도서관 박물관 대학원 등을 먼저 옮긴 뒤 현재 수업이 계속되고 있는 사대 가정대 상대 법대 문리대 대학본부 등의 순으로 끝나게 된다. … 첫 이삿짐이 떠나던 날 동숭동 캠퍼스에서는 문리대 법대 등 대부분의 단과대학이 수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사전날인 19일 동숭동캠퍼스에서는 석별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3백여 명의 졸업생 재학생들이 나와 시계탑 4·19탑 정의의 종 등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며 옛 추억을 더듬기도. 4.19탑과 정의의 종은 관악캠퍼스로 옮겨지나 낭만의 상징인 마로니에와 은행나무 등은 이식이 불가능해 추억과 함께 동숭동에 남겨지게 됐다.” (“반세기 지성 낭만의 요람 뒤로 서울대 캠퍼스 이삿길에”, 「경향신문」, 1975.1.20.)
1975년 8월 약학대학이 약학관으로의 이전을 완료하였고, 1976년 2월 음악대학과 미술대학이, 1976년까지 공과대학과 농과대학, 의과대학, 치과대학, 보건대학원, 수의과대학을 제외한 전 대학과 기관이 이전하였다. 그리고 공과대학 이전은 1979년부터 시작하여 1980년 2월까지 4단계로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이는 종합화 계획의 실질적인 완성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이후 농과대학과 수의과대학은 2003년에, 보건대학원은 2010년에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으며, 2021년 현재 서울대학교 캠퍼스는 메인캠퍼스인 관악캠퍼스를 비롯하여 연건캠퍼스, 수원캠퍼스, 평창캠퍼스, 시흥캠퍼스로 구성되어 있다.
1975년 서울대학교 관악시대의 개막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추진되어 온 종합화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많은 단과대학들이 정든 과거의 캠퍼스를 떠나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는 공간의 변화를 넘어 새로운 도약을 향한 기반이 구축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종합화는 단순히 캠퍼스의 물리적·지리적·공간적 통합뿐만 아니라 새 캠퍼스 이전에 따른 대대적인 교육 기구 개편과 교과과정 변경을 통하여 완성될 수 있었다. 학문 전공의 심화에 발맞추어 분화·발전됨으로써 「서울대학교설치령」 개정 등 고등교육의 새로운 틀을 구축하는 과정을 통해 서울대학교가 세계 수준의 대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50년사』, 199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지성과 역동의 시대를 열다 1953-1975』,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도약의 나래를 펴라, 1975-2017』, 2017.
성나연·전봉희, 「국립 서울대학교 종합화와 캠퍼스 계획론의 도입」, 『대한건축학회논문집』36(6), 대한건축학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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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신문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