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안내

대학소개 / 역사

기록으로 만나는 서울대

역사 /

기록으로 만나는 서울대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

2020.05.15.

“4·19혁명 60주년을 기념하여”

6·25 전쟁을 겪은 1950년대의 혼란한 정치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서울대학교도 이제 막 터를 잡기 시작한 처지에서 학생들의 정치적 각성도 본격화되지 않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전횡이 더해가면서 학생들도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정점을 이룬 사건이 4·19혁명이었다.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 시위를 시작으로 선거 전부터 크고 작은 시위가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선거는 ‘사상 최대의 부정선거’로 온 국민의 분노를 유발시켰고 선거 당일인 3월 15일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가 터져 나왔는데, 그중 마산에서 경찰 발포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3월 방학을 마치고 4월 개강한 서울대생들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움직였다. 4월 11일 김주열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직후인 4월 14일 문리대 정치학과 3학년 학생들은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결의하여 11개 단과대학이 함께 19일 오전 11시에 궐기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하루 전 날인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하다가 정치 깡패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19일 아침 대광고 학생들이 시위에 나서자 서울대 학생들은 시작 시간을 9시 20분으로 앞당겼다. 1960년 4월 19일,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총궐기하였으며 서울대학교 학생들도 각 단과대학별로 거리에 나섰다.1)
1) 당시 서울대학교는 단과대학들이 분산되어 있었는데, 문리대·음대·미대·법대는 동숭동에, 의대와 약대, 수의대는 문리대 건너편 연건동에, 사대는 을지로 6가에, 상대는 안암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혁명의 불길 4·19 피의 기록, 대학신문, 1960.5.2.

혁명의 불길 4·19 피의 기록
대학신문, 1960.5.2.
오전 9시 20분경, 동숭동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게시판에 격문이 나붙었고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정문 앞에 모여선 100여 명의 학생들 사이에서 준비된 전단이 살포되고 플래카드가 등장하였다. 문리대 학생들은 “데모가 이적(利敵)이냐 폭정이 이적이다”, “이 놈 저 놈 다 글렀다 국민은 통곡한다”, “이승만 박사 물러가라”, “3·15선거를 불법으로 감행한 책임자를 이 자리에 불러내자” “학원자유 보장하여 애국애족 선봉되자”, “민주 위한 학생 데모 총칼로써 막지 말라”라고 외치며 교문을 나섰다. 문리대를 선두로 이어서 법대, 미대, 수의대, 약대, 의대, 상대, 사대 등도 합세하였다.

“여기 대학의 양심은 증언한다. 우리는 보다 안타까이 조국을 사랑하기에 보다 조국의 운명을 염려한다.
우리는 공산당과의 투쟁에서 피를 흘려온 것처럼 우리는 또한 사이비 민주주의 독재를 배격한다.
조국에의 사랑과 염원이 맹목적 분격에 흐를까?
우리는 얼마나 참아왔는가?
보라! 갖가지의 부정과 사회악이 민족적 정의의 심판을 받을 때는 왔다.
이제 우리는 대학의 엄연한 양심으로 일어나노니 총칼로 저지 말라, 우리는 살아있다!
동포의 무참한 살상 앞에 안일만을 탐할 소냐! 한숨만 쉴소냐!
학도여! 우리 모두 정의를 위하여 총 궐기하자!“(4·19 그날 아침 문리대캠퍼스에 나붙었던 격문)

이때 시위에 나선 3천여 명의 서울대 학생들은 사전 배치된 100여 명의 완전무장한 경찰관들의 저지에 가로막혀 쌍방 간에 일대 충돌이 발생하였으며 한동안 수라장을 이루었다. 경관들의 무자비한 난타, 구타, 폭행으로 학생들은 머리가 터지고 얼굴이 찢어졌다. 경찰의 저지망을 뚫는 동안 점점 수가 늘어난 법대, 문리대, 미대, 약대, 수의대 등 5개 단과대 학생들은 열을 지어 종로2가까지 진출하였다.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앞 인사동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이 처음으로 십여 발의 최루탄과 연막탄을 발사하면서 학생들의 전진을 완강히 제지하였다. 서울대학교 학생을 포함한 3만여 명의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을 뚫고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을 향해 달려갔다. 시위대는 첩첩이 포진한 소방차를 지나 을지로 입구 내무부(현 외환은행 본점 자리) 앞과 시청 앞을 거쳐 오전 10시 30분경 국회의사당(현 서울특별시 의회)에 도착했다. 의사당 앞에서 강력히 제지하는 경찰대와 잠시 충돌한 시위대는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의사당 앞에 모인 학생들 중 서울대 여학생 한 명이 앞에 나가 선언문을 낭독했다.

4·19 선언문 필사본 사본. 이수정 동문 기증, 1960.4.19.
4·19 선언문 필사본 사본. 이수정 동문 기증, 1960.4.19.

문리대 신문 『새세대』의 주간 겸 편집장을 맡고 있던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3학년 이수정이 4월 18일 명륜동 하숙집에서 선언문을 기초하였다고 한다.
“상아(象牙)의 진리탑(眞理塔)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疾風)과 같은 역사(歷史)의 조류(潮流)에 자신(自身)을 참여(參與)시킴으로써 이성(理性)과 진리(眞理) 그리고 자유(自由)의 대학정신(大學情神)을 현실(現實)의 참담한 박토(薄土)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자신(自身)들의 지성(知性)과 양심(良心)의 엄숙한 명령(命令)으로 하여 사악(邪惡)과 잔학(殘虐)의 현상을 규탄(糾彈),광정(匡正)하려는 주체적(主體的) 판단(판단)과 사명감(使命感)의 발로(發露)임을 떳떳이 선명(宣明)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知性)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現狀)이 민주(民主)와 자유(自由)를 위장(僞裝)한 전제주의(專制主義)의 표독한 전횡(專橫)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斷定)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정치사(政治史)는 자유(自由)의 투쟁사(鬪爭史)다. 그것은 또한 여하(如何)한 형태(形態)의 전제(專制)로 민중(民衆) 앞에 군림(君臨)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 같이 헤슬픈 것임을 교시(敎示)한다.
한국(韓國)의 일천(日淺)한 대학사가 적색전제(赤色專制)에의 과감(果敢)한 투쟁(鬪爭)의 거획(巨劃)을 장(掌)하고 있는데 크나큰 자부(自負)를 느끼는 것과 똑같은 논리(論理)의 연역(演繹)에서,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위장(僞裝)한 백색전제(白色專制)에의 항의(抗議)를 가장 높은 영광(榮光)으로 우리는 자부(自負)한다.
근대적(近代的) 민주주의(民主主義)의 기간(基幹)은 자유(自由)다.
우리에게서 자유(自由)는 상실(喪失)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박탈(剝奪)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理性)의 혜안(慧眼)으로 직시(直視)한다.
이제 막 자유(自由)의 전장(戰場)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상(正常)히 가져야 할 권리(權利)를 탈환(奪還)하기 위한 자유(自由)의 투쟁(鬪爭)은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자유의 전역(戰域)은 바야흐로 풍성(豊盛)해 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民主主義)와 민중(民衆)의 공복(公僕)이며 중립적(中立的) 권력체(權力体)인 관료(官僚)와 경찰(警察)은 민주(民主)를 위장(僞裝)한 가부장적(家父長的) 전제 권력(專制權力)의 하수인(下手人)으로 발 벗었다.
민주주의(民主主義) 이념(理念)의 최저(最低)의 공리(公理)인 선거권(選擧權)마저 권력(權力)의 마수(魔手) 앞에 농단(壟斷)되었다.
언론(言論)⋅출판(出版)⋅집회(集會)⋅결사(結社) 및 사상(思想)의 자유(自由)의 불빛은 무식한 전제권력(專制勸力)의 악랄한 발악(發惡)으로 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漆黑) 같은 밤의 계속(繼續)이다.
나이 어린 학생(學生) 김주열(金朱烈)의 참시(斬屍) 보라! 그것은 가식(假飾) 없는 전제주의(專制主義) 전횡(專橫)의 발가벗은 나상(裸像)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卑屈)하게도 위하(威嚇)와 폭력(暴力)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白步)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人間的)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구(學究)의 양심(良心)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自由)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沈默)에 자유(自由)의 종(鐘)을 난타(亂打)하는 타수(打手)의 일익(一翼)임을 자랑한다. 일제(日帝)의 철퇴(鐵槌) 아래 미칠 듯 자유(自由)를 환호(歡呼)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兄)들과 같이-
양심(良心)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永遠)한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사수파(死守派)는 영광(榮光)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現實)의 뒷골목에서 용기(勇氣) 없는 자학(自虐)을 되씹는 자(者)까지 우리의 대열(隊列)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自由)의 비밀(秘密)은 용기(勇氣)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隊列)은 이성(理性)과 양심(良心)과 평화(平和), 그리고 자유(自由)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隊列)이다. 모든 법(法)은 우리를 보장(保障)한다.
1960년 4월 19일 서울대학교문리과대학학생일동”

4·19 1주년 서울대 데모대의 행진코스, 대학신문, 1961.4.17.

4·19 1주년 서울대 데모대의 행진코스
대학신문, 1961.4.17.
4·19 혁명 1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서울대생 데모대가 행진한 코스를 따라가 보자는 취지에서 쓴 대학신문 기사이다.

“4월 19일 상오 9시 20분에 서울대 정문을 출발한 데모대는 독재의 아성인 경무대에 이르기까지 아홉 군데서나 경찰의 저지에 부딪혔다. 난타되는 경찰 곤봉은 데모대가 전진함에 따라 최루탄과 총검으로 바뀌었고 드디어 경무대 입구에서는 피의 실탄 사격으로 변하였다. 경찰의 완강한 저지선을 뚫은 데모대는 해일처럼 거리를 달려가 국회 앞과 중앙청 앞에서 연좌하였다가 마침내 경무대 앞에 이르러 최후의 대치를 하였다.”

10시 50분경 상대 학생 약 2천 명과 사대 학생 1천여 명이 국회의사당에 도착했다. 의대와 약대 학생 1천여 명도 하얀 가운을 입고서 중앙청을 향해 시위를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이승만 박사 물러가라!”, “불법으로 치룬 3·15선거를 불법으로 감행한 책임자를 이 자리에 불러내자!”며 목이 쉬도록 구호를 외쳤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세종로에 이르는 길에 모인 시민들은 1만여 명이 넘었고, 이 일대의 교통은 완전 마비되었다. 11시 40분경, 동국대 시위대가 이승만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현 청와대) 쪽으로 향하자 뒤이어 서울대 사대와 의대, 동성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학교에서 나온 1만여 명의 학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서울대, 성균관대, 동국대, 건국대, 숙명여대, 중앙대, 고려대, 연세대, 경기대, 홍익대, 동성고, 대광고, 휘문고 등 총 2만 여명의 학생들이 경무대 쪽으로 밀려들자 경찰은 실탄사격을 계속하면서 후퇴하여 최후의 바리케이드인 경무대 입구 효자동 전차 종점에 집결하였다. 이때가 약 1시경이었다. 헌병과 경찰들은 하늘을 향해 수백 발의 총을 발사했으며, 소방차의 붉은 물줄기가 시위대를 향해 뿌려졌다. 탈취한 소방차를 앞세운 시위대와 경찰 최후 저지선의 간격이 10여 미터로 줄었을 때 경찰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경찰의 무차별 사격에 시위대 행렬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오후 2시경, 옥인동과 통의동 일대의 병원들은 총상을 입은 중상자로 가득 찼다. 경찰은 경무대뿐만 아니라 중앙청 앞, 서대문 이기붕 집, 태평로 파출소, 을지로 내무부, 동대문 경찰서 등에서도 발포하였다. 시위대도 이승만 독재의 상징이었던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 등을 불태웠다. 정부는 이날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 5개 도시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집회는 즉각 해산’, ‘일절의 옥외집회 불허’, ‘각급 학생의 등교중지’, ‘통행금지시간 19시’, ‘언론 · 출판 · 보도의 사전검열’ 등 광범위하고 강력한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4월 19일 이날 서울에서 100명이 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희생되었다. 의대생들은 경찰과 대치하며 실탄 사격과 무차별 구타로 부상을 입은 시민들을 치료하기 위해 중앙청 앞에서 서대문으로, 내무부 앞으로, 동대문 경찰서로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부상자 구료활동을 하였다. 서울대학교에서도 문리과대학 김치호(수학58, 3학년), 미술대학 고순자(회화56, 3학년), 법과대학 박동훈(법학60, 1학년), 사범대학 유재식(체육교육57, 3학년), 사범대학 손중근(국어교육57, 4학년), 상과대학 안승준(경제57, 3학년) 등 6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었다. 언론은 이 날을 ‘피의 화요일’로 명명하였다.

 손중근 유고집, 안병옥 동문 기증, 1962

손중근 유고집
안병옥 동문 기증, 1962
4·19혁명 와중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4학년이었던 손중근이 서울대생으로서 첫 희생자가 되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실탄 사격으로 사망이 확인된 학생은 손중근과 성명이 미확인된 또 다른 한 명, 적십자 병원으로 후송된 5-6명을 합해 도합 20여 명에 달하였다”라고 보도하였다.(『동아일보』 1960. 4. 20 조1·2면)
손중근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사범대에 4·19기념 동상이 세워졌다. 후에 4·19 혁명 유공자로 인정받아 국립 4·19 민주묘지에 안장되었고 동문들이 그의 일기와 글을 모아 유고집을 펴냈다. 손중근은 데모에 나서기 전날인 1960년 4월 18일 일기에 새 시대를 예감하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을 썼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 태어나려 하는 자는 한 개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4월 19일 계엄령 발동 이후 문교부 장관은 오후 서울시내 각급 학교 및 지방 중·고교 및 대학의 임시휴교를 지시하였고 집회를 일체 금지했다. 하지만 4월 25일 이번에는 전국 각 대학교 교수 258명이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여 문리과대학 이희승 교수 등 기초위원 9인(고려대, 서울법대, 연세대, 중앙대, 동국대, 성균관대, 외국어대, 고려대, 서울대 문리대)이 작성한 14개 항의 시국선언문을 채택, 낭독한 후 “각 대학교수단 -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에 나섰다. 교수들이 시위에 나서자 학생들과 시민들 역시 하나둘씩 행렬에 동참했고 그 인원은 만 명을 헤아렸다. 교수단은 종로, 을지로 입구, 미국대사관 앞을 거쳐 국회의사당에 도착하여 시국 선언문을 다시 한 번 낭독하고 만세 삼창과 애국가를 부른 뒤 시위를 마쳤다. 이 날 교수단은 시국 선언문을 통해 ‘이승만 하야’를 분명하게 요구했고 이는 항쟁의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시민과 학생들은 교수단이 해산한 후에도 세종로 로터리에 집결, “부정선거의 원흉을 잡아내라!”, “형제들의 피의 대가를 찾자!” 등 각종 구호를 외치며 또다시 궐기하였다. 4·19혁명 이후 사회 안정을 위해 애쓰던 군에서는 처음으로 탱크 3대와 약 1개 대대로 추정되는 무장병력을 국회의사당 앞에 배치하였다. 이기붕 집과 해무청 앞, 종로 5가에서 발포가 있어 또다시 유혈참사가 발생하였다. 이 날 시위대는 야간시위에 이어 26일 새벽까지 시가를 휩쓸었다.
26일 오전 10시 30분, 드디어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겠다.”는 중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국회 본회의에서 대통령의 즉시 하야와 함께 정부통령선거를 재실시하고 과도내각하에 완전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하며, 개헌 통과 후 민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제1공화국은 11년 8개월 12일 만에 마침내 막을 내렸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독재 정권을 스스로의 힘으로 무너뜨렸고 4월 26일은 ‘승리의 화요일’이 되었다.

문리과대학 4·19 기념탑 제막식. 1961
문리과대학 4·19 기념탑 제막식. 1961
4·19 공원 기념탑. 2020
4·19 공원 기념탑. 2020

문리과대학 캠퍼스 양지바른 터 위에는 4·19 기념탑이 남쪽을 향해 서 있었다. 이 기념탑은 4·19혁명 때 민족과 국가를 위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간 당시 본교 재학생이자 희생자인 학생들의 영령을 추모하고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고자 세워졌다. 현재 4·19 기념탑은 4·19 기념동상과 함께 관악캠퍼스 두레문예관 앞 4·19 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4·19 기념식. 대학신문, 1989.4.19.
4·19 기념식. 대학신문, 1989.4.19.

4·19 혁명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희생이자 문리대 학생들이 선언문에서 밝힌 것처럼 백색 독재를 거부하는 투쟁으로서 1964년 6·3항쟁, 1980년 5·18광주 항쟁, 1987년 6·10 항쟁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자 학생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계기였다. 학생들은 4·19혁명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결국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스스로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경험을 통해 학생들은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올해는 4·19 혁명이 일어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 현대사에서 자유와 정의에 바탕을 둔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인 4·19 혁명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 보며 새로운 질서의 모색을 부단히 요구했던 당시의 비판 의식을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눈부신 젊은 혼이 목숨을 바쳐 독재를 물리치고 나라 건졌네. 분노가 폭발되던 사월십구일 우렁찬 아우성은 메아리 되어 민주대한역사 위에 길이 남으리”
- ‘4.19의 노래’ 중에서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4월혁명사료총집발간위원회, 『4월혁명 사료총집』 1책 일지편, 2010.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7.
서울대학교 기록관, 『지성과 역동의 시대를 열다 1953-1975』,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도약의 나래를 펴라 1975-2017』, 2017.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사료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담당부서/기록관 (http://archives.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