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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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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서울대

서울대인의 목소리 – 학생간행물 둘러보기(1)

2022.01.27.

1946년 개교 이후 서울대생들은 스스로의 목소리를 담은 신문, 잡지 등을 펴냈다. 간행물의 발간은 학생들의 자치활동 중에서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이러한 신문, 잡지 등의 간행물은 대학사와 학문연구의 발전과정과 방향성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서울대생이 주체가 되어 발간한 간행물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장 대표적인 간행물은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발간하고 있는 『대학신문』 이다. 『대학신문』은 1952년 한국전쟁 중 부산 전시연합대학 시절 대학과 학생 간의 소통을 위해 서울대를 아우르는 신문의 발간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응답하여 탄생하였다. 개교 이후 각 단과대학에서도 학내신문을 발간하였지만, 환도 이후 『대학신문』이 종합적 성격의 ‘서울대 신문’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단과대학 신문은 점차 중요성이 감소하여 대부분 학보(學報)나 교지(校誌)로 통합되었다.

대학신문사 전경, 1959
대학신문사 전경, 1959대학신문사 사옥은 창간 당시 부산 가교사 내에 있다가 환도 후 동숭동 문리대 구내,
연건동 의대 구내의 생약연구소, 함춘회관 등에 자리하였다. 사진은 1959년 연건동 의대 구내 시절의 모습이다.

각 단과대학 간행물 창간호
각 단과대학 간행물 창간호 상단 왼쪽부터 『문학』, 『미학보』, 『사대학보』(박장순 동문 기증), 『문리대학보』(김민수 동문 기증),
두 번째줄 왼쪽부터 『법대학보』(최종고 명예교수 기증), 『상대평론』(고광직 동문 기증),
『여울』, 『수의대학보』(권준현 동문 기증), 하단 왼쪽부터 『치원』(변석두 동문 기증),
『향연』, 『아람』(박복순 동문 기증), 『교육』, 『형성』이다.

환도 이후 각 학보사가 단과대학 학생회의 한 조직으로 소속되어 있었고, 편집위원이 일체의 편집권을 가지고 독립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사회문제에 관심이 높은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인해 대학 학보사는 학생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공논문, 교양논문, 그리고 문예물이 수록된 각 단과대학 학보는 그 당시 소속 학생들의 의식과 생활을 잘 반영하고 있어 각 단과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대학문화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단과대학에서 학생들이 펴낸 신문과 학보는 다음과 같다.
공과대학은 1959년 학내신문인 『무수탑(撫愁塔)』을 발간하여 1960년 6호 발간 이후 『서울工大』로 이름을 바꾸어 간행하였다. 학보 『불암산(佛巖山)』은 4‧6배판 160면으로 구성되었으며 공대 교수들의 논문, 참고자료, 학생들의 방학 중 견습기 등을 실었다. 그리고 1965년 『불암산』과 신문을 통합하여 학보 『서울工大』를 발간하였는데, 4‧6배판 잡지로 월 1회 발행하였고, 50면 정도의 지면을 통해 학내 뉴스‧학술논문‧학생 작품 등을 수록했다.
농과대학은 월간지인 학내신문 『농대신문(農大新聞)』과 연간지인 교지 『상록(常祿)』을 발간하다가 1965년에 『상록』이 학내신문을 통합하면서 잡지체제로 바뀌었다. 『상록』은 월 1회 발간하였으며, 『서울工大』와 같은 4‧6배판 잡지로 변화를 추구하는 편집과 농업 이외의 분야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간행했다는 점에서 ‘성공한 잡지의 예’로 대학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문리과대학에서는 1959년에 학내신문 『새世代』를 창간하였다. 『새世代』는 인문사회과학 계통에 중점을 두어 사회현실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1962년 5월 필화사건, 그해 9월의 휴간처분 등 수난을 겪다가 1964년 11월에 62호를 끝으로 정간되었다. 『The Academy Tribune』도 비슷한 성격의 신문으로 제4권 제4호까지 발간되고 1964년에 휴간되었다. 1967년 11월에는 종합교양지 『형성(形成)』이 창간되었는데 논문‧수필‧소설‧시‧시사번역 원고를 모집하여 엮었으며 학생논단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계간으로 발전하였지만, 7권 2호까지 발간하고 문리과대학이 인문대학‧사회과학대학‧자연과학대학으로 분립하면서 끝을 맺었다. 1946년 개교 이후 최초의 학술지는 1952년 문리과대학에서 발행된 『문리대학보(文理大學報)』였다. 3‧6 국판의 300쪽에 달하는 이 논문집은 문리대 교수들과 학생들의 글을 묶어 부정기적으로 간행하였으며, 1974년까지 통권 29호를 냈다.

불암산 4호 1953 서립규 동문 기증
불암산 4호
1953
서립규 동문 기증
상록 창간호 1960 이중훈 동문 기증
상록 창간호
1960
이중훈 동문 기증
Fides 제28권 제1호 1988 자치도서관 이관
Fides 제28권 제1호
1988
자치도서관 이관

미술대학은 서울대학교 개교 20주년이 되는 1966년에 『미대학보(美大學報)』를 창간하였다. 4‧6배판으로 발간된 『미대학보』는 연1회 발행되었으며, 미술 전반에 걸친 논문과 학생들의 문예 작품을 게재했다. 창간호에는 ‘한국 현대미술의 당면과제’라는 범주에서 동양화, 서양화, 조각, 공예, 건축 분야의 논문들과 ‘국제전 참가의의와 그 전망’이라는 표제의 좌담집, 그리고 소고 등을 수록했다.
법과대학은 1954년에 창간한 『법대학보(法大學報)』와 『법대신문(法大新聞)』을 통합하여 ‘전통 수립과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한다’는 기치 아래 1963년 5월 『Fides』를 창간하였다. ‘신의’를 뜻하는 라틴어 제호의 『Fides』는 초기에는 교수 논문 중심의 법대 학술지로 시작했다가 점차 학생들의 논문과 수필도 싣는 학술잡지의 성격을 갖추었다. 1980년대에는 학생 언론 서클로서의 역할도 하였으며 100면 정도로 연 2회 발간하였다.
사범대학은 학내신문인 『사범대학(師範大學)』을 1947년에 창간하여 제15호를 내면서 『교우(敎友)』로 개칭하였고, 1960년 『사대월보(師大月報)』로 개제하여 발간하였으며, 다시 1961년 『사대신문(師大新聞)』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사대신문』은 1963년에 53호로 종간하고 『청량원(淸凉苑)』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청량원』은 4‧6배판 60면 정도로 구성하여 계간으로 발간하였다. 1963년에 창간된 영자신문 『The Collegian』은 1965년에 『청량원』으로 통합되었다. 한편, 1961년 창간하여 주간으로 발간한 『師大뉴스』는 1973년에 『사대문화(師大文化)』로 개명하여 격주로 발행하였다.
상과대학에서는 『상대신문(商大新聞)』이 1958년 창간된 이래 충실히 발행되었으며 영자신문 『The Economic Frontier』도 발간되었다. 상대학생 연구회에서 1952년에 창간하였던 학보 『상대평론(商大評論)』은 해마다 학생들의 연구결과를 집약하여 발간하는 연간지였으며, 관악캠퍼스로의 이전을 앞둔 시점인 1975년 1월 35호(종간호)를 내기까지 높은 수준의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청량원 제2권 제1호 1964 이정선 동문 기증
청량원 제2권 제1호
1964
이정선 동문 기증
함춘원 제15호 1980 이홍주 동문 기증
함춘원 제15호
1980
이홍주 동문 기증
음대학보 창간호 1963 김우진 교수 기증
음대학보 창간호
1963
김우진 교수 기증

약학대학은 약대의 종합지로써 1954년에 학보 『약원(藥苑)』을 창간하였다. 논문, 수필, 시 등을 실었으며 국판 1백 40면으로 2학기 말경에 발행되었다. 당시 학장이었던 한구동 교수는 『약원』 창간호 권두언에서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학생발행물을 발간하지 못하다가 환도 이후에야 창간한 소회를 밝혔다.
의과대학의 대표적인 간행물인 『의대(醫大)』는 1950년부터 발간되어 6호까지 나오고 1967년에 『함춘원(含春苑)』으로 제호를 바꾸어 속간되었다. 『함춘원』은 격년으로 발행되었는데 교수들의 의학논문과 학생들의 수필 등이 함께 실렸다. 1974년 11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치과대학은 1950년에 『저경학보(儲慶學報)』 와 『저경지(儲慶趾)』를 발간하였으며 1959년에 『저경지』가 잡지형식으로 발간된 이후 『치대신문(齒大新聞)』이 1963년 창간되어 발간되다가 1966년 3월 20호를 낸 후 폐간되었다. 『치대신문(齒大新聞)』 폐간 이후 1967년 2월 학보 『치원(齒苑)』을 창간하였다. 『치원』은 치의학계의 현황 및 전망, 문예 기사 등을 엮었으며, 1960년대까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이 한국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치과대학이었으므로 치과 분야의 종합지로서의 『치원』의 역할이 중요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유일한 여자대학이었던 가정대학은 학보 『아람』을 1973년 4월에 발행하였다. 창간호에는 기획논문으로 “외국의 Home Economics”, “가정대학,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하여 논단, 제언, 보고서, 번역 등 다양한 형식의 코너를 게재했다.
음악대학은 음악대학 학생회에서 『음대학보(音大學報)』를 1963년에 발간하였다. 국판 240면으로 교원논문, 학생논문, 좌담회, 기고, 문예란, 기행문 등을 게재했다. 창간호에는 “고악보에 쓰인 부호역해”, “삼수대법 소용의 비교연구” 등의 논문과 함께 “초기의 음악회”라는 번역문을 실었다.
기초교양교육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기 위하여 설치된 교양과정부는 1968년 신설된 이후 첫 학보인 『향연(嚮宴)』을 1969년 2월에 발간하였다. 논단, 학생논단, 독서 리포트, 시, 수필, 창작, 비평문 등을 수록했다. 『향연』은 1975년 2월에 7호를 마지막으로 교양과정부의 해체와 동시에 폐간되었다.
총여학생회에서는 서울대학교 여학생들의 대변지이자 교양지인 『여울』을 1968년에 발간하여 1974년까지 6호를 냈다. 특히 창간호에서는 ‘한국 여대생’을 특집 주제로 다룬 글을 수록했다.

개교 이후 정부 주도로 학내에 학도호국단이 설치(1949)되고, 모든 학생활동은 학도호국단의 조직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발간활동에 제약이 있었다. 이는 대학의 자치 및 학문적‧사상적 자유와 학생 자치활동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이후 1960년 4.19 혁명을 계기로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단과대학 학생회와 총학생회가 결성되면서 학생 자치활동에 불을 지펴 대부분의 단과대학에서 각 대학 및 학과의 특성을 지닌 간행물을 비교적 활발하게 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정권이 1975년 국내 반체제 운동을 억제하기 위하여 긴급 조치 9호를 발동함에 따라 1976년 학생자치활동기구였던 서울대학교 학생회가 학도호국단으로 개편되었고 같은 해 4월, 학장회의에서 ‘학생간행물 발간지침’을 확정하여 간행물 발간에 대한 제한을 두었다. 이 지침에 의하면 학생간행물의 종류는 ‘총호국단지, 제대지 및 과회지’에 국한되었고 수록 내용도 대부분 학술 활동 위주로 제한되었다. 또한 간행물의 편집, 인쇄, 배포의 전 과정에서 총장 또는 학장이 임명한 2인 이상의 지도위원의 지도 및 감독을 받아야 하며, 승인 목적 및 내용 외의 사항은 실을 수 없고, 편집학생은 이수성적 평점이 2.3(C+) 이상이면서 징계처분을 받은 사실이 없는 학생이어야 했다. 이러한 학보에 대한 경직된 인식으로 인해 가정대학에서는 교지 『아람』의 편집위원 인준 문제로 갈등을 빚어 후속호를 내지 못하고 기능이 마비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1975년 관악캠퍼스 종합화 이후 단과대학별로 지니고 있던 분위기와 특성 자체가 희미해진 탓에 학생들의 간행물 발간활동이 주춤하는 모양새를 보이자 종합화 이후 그 활동이 저조한 점을 지적하는 사설이 대학신문에 실리기도 하였다.
“우선 단과대학의 개편에 따라 종전까지의 간행물의 소속이 없어진 점을 들 수가 있겠고 또한 간행물 발간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기가 대단히 어렵게 된 점도 지적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로는 간행물의 성격 자체에 대한 규제를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학생간행물의 문제”, 「대학신문」, 1976.6.21.)

「서울공대」 다시 발간, 간행물 지침에 의거 문예물 삭제, 대학신문, 1977.6.20.

「서울공대」 다시 발간, 간행물 지침에 의거 문예물 삭제
대학신문, 1977.6.20.


“당초 4월중 배부될 예정이었던 공대학보 「서울공대」(81호)가 지난 주에야 재발간, 배부되었다. 「서울공대」는 처음 1백 56면으로 발간되었으나 문예작품의 게재가 발행물 발간지침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문예물을 삭제하고 재배본되었는데 「서울공대」사는 공고를 통해 문예작품이나 전공논문외의 글을 실을 수 없다는 발행물 지침에 의해 재배본되었음을 밝혔으며 한 편집위원은 『이번 호의 발간과정을 게재 내용의 허용과 한계를 설정하기 위한 시험 케이스로 받아들이고,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유사계통의 자연대학 학보에서 보인 전공에 구애받지 않는 편집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부심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서울공대」의 재발간에 대해 공대의 거의 모든 학생들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의견을 표명하고 있으며 「서울공대」가 지극히 전문적인 분야만 다룬 전문지화 됐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유신체제의 억압 속에서 자치활동의 권리를 박탈당했던 학생들이 1979년 10‧26 사태 이후 서울의 봄(1980)을 맞아 학생회 재건에 힘쓴 결과, 단과대학 학생회와 함께 총학생회도 부활했다. 학내 민주주의 구현을 위한 학생들의 움직임은 침체되었던 학내 언론의 활성화로 이어졌다. 각 단과대학별로 학보발간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는데, 인문대학에서는 1980년 3월 학보 『지양(止揚)』을 펴냈다. 제호 『지양』은 헤겔의 변증법 개념에서 따온 용어로, 절대 이성으로 향하기 위해 어떤 것을 그 자체로 부정하고 그 ‘부정된 것’을 더 진전시키는 과정을 의미하였다. 편집실은 1976년 발족했으나 내외 사정으로 1980년에야 창간호를 간행하였다. 학술잡지의 성격이 큰 『지양』과 별도로 학생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지양시평(止揚詩評)』을 회보로 함께 발간했다. 법과대학 『Fides』 편집실에서는 1979년에 학보를 발간하지 못하고 1981년에 『현장(現場)』을 창간했다. 『현장』은 학생회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으며, 창간호 권두언에서 “대학언론은 학생운동 흐름의 핵심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대학언론의 지향점을 짚었다.

지양 창간호 1980 정원재 교수 기증
지양 창간호
1980
정원재 교수 기증
지양 시평 1980 송기호 교수 기증
지양 시평
1980
송기호 교수 기증

하지만 1980년 5.17 쿠데타로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학생회는 다시 해체되고 학도호국단이 계속 실질적인 학생 대표 기구로 남았고, 1980년대 정부의 학원 탄압 속에서 학생 언론 역시 억압을 피하기 어려웠다. 앞서 언급한 ‘학생간행물 발간지침’의 갱신 버전인 ‘학생간행물 운영지침’ 개정안이 1981년 시행되었는데, 단대 편집실을 비상설화하고 편집위원을 임명제로 변경하는 등 자치언론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저해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지침의 내용은 첫째, 학생간행물에 대한 정의를 ‘본교 재학생이 편집 및 발간하는 것’에서 ‘호국단 문예부에서 발간하는 것’으로 하였고, 둘째, 편집위원 구성은 간행물을 발간하고자 할 때만 구성하도록 제한을 두었다. 그리고 편집위원은 호국단 학생장의 추천으로 지도위원장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에 편집위원들은 “단대학보는 학내 언론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편집실의 비상설화는 납득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다”라고 항의하면서 지침 개정의 재고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학도호국단을 이용한 정부의 학원 통제로 인해 학내에서는 『대학신문』 이외에 자치언론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학보 편집 지도위원회의 소집,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1983.11.17. 김철위 교수 기증

학보 편집 지도위원회의 소집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1983.11.17. 김철위 교수 기증


학보 편집 지도위원에게 송부한 학보 편집 지도위원회 소집 안내문이다. 1983년 11월 18일, 3층 소회의실에서 치과대학 학도호국단 학보(치원) 편집 지도위원회를 개최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학의 자치언론은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다양한 관점의 정보를 전달하고 학내 의사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매개체가 된다.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주요 사회문제를 비롯한 소재들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이에 대하여 여러 층위에서 깊이 있게 의견을 개진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학내 여론이 조성되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개교 이후 수많은 학생간행물이 발간되었고, 자치언론이 설 자리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도 서울대인들은 대학신문, 단과대학 학보, 과지, 회보 등을 펴내며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왔다. 유신체제와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억압 아래 그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지만, 1980년대 사회 전반의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1990년대를 전후로 학내에도 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다양한 자치언론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게 된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4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40년사』, 198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지성과 역동의 시대를 열다 1953-1975』,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도약의 나래를 펴라 1975-2017』, 2017.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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