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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서울대학교 60년사 보기
기원 起源 최초의 국립 고등교육기관:대한제국 건립기에 최초의 국립 고등교육기관들이 세워지면서 서울대학교 설립의 토대를 제공했던 시기이다.닫기
법관양성소 1회 졸업생 이준 열사 (왼쪽)와 지석영 의학교 초대 교장

법관양성소 1회 졸업생 이준 열사 (왼쪽)와
지석영 의학교 초대 교장

19세기 말 고종은 자력 근대화를 위한 교육 사업을 적극 추진하면서 여러 개의 근대식 고등교육기관을 최초로 설치하여 서울대학교 설립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1895년 4월 19일 칙령을 통해 최초의 근대 법학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가 설립되었고, 그 해 5월 6일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고 다음해 이준 열사를 포함한 47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최초의 국립 고등교육기관인 서울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법관양성소는 이후 법학교(1909)-경성전수학교(1911)-경성법학전문학교(1922)-국립서울대학교 법과대학(1946)을 거쳐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2007)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5월 10일 소학교 설립 준비의 일환으로 소학교 교사 양성기관인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되었다. 7회에 걸쳐 19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던 한성사범학교는 이후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 (1911) - 국립서울대학교 사범대학 (1946)을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더욱 적극적으로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하였다. 1899년 고종은 "우리나라에 각종 학교를 대략 설치하였으나 의학교는 아직 만들지 않았다"며 의학교관제를 반포하고 전문 의료인을 양성하였다. 의학교는 이후 대한의원 교육부 - 경성의학전문학교-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과 의과대학 및 의학전문대학원으로 계승되었다. 대한의원은 1901년 최초로 교육부 산하에 산파 및 간호부양성과를 신설하는데 이는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의 시작이었다.

1904년에는 농업과 상업을 가르치는 농상공학교를 개교하였고, 농상공학교는 분화와 재편을 거듭하면서 국립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서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이어졌다.

1단계개교기 開校期 1946년 10월 개교부터 6.25 한국전쟁의 피난기를 거쳐 1953년 9월 환도후 복교할 때 까지가 이시기에 해당한다닫기
대학본부 동숭동. 1946

대학본부 동숭동. 1946

서울대학교는 시련을 겪으며 탄생하였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1945년 11월에 100명의 유지인사들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가 구 경성제국대학 건물을 활용하여 국립 종합대학교를 세우도록 제안하였다.
미군정청 학무국에서 일하던 한국인 관리들이 이 제의에 호응하여 1946년 7월 13일 "국립서울대학교 안"을 발표하였고, 8월 22일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 이 공포되었다.
이 법령에 따라 9개 단과대학(문리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예술대학, 치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구성된 "국립서울대학교"가 1946년 10월 개교하였다.

그러나 상당수의 학생과 교수들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반대하여 "국대안(國大案)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947년 2월 전국으로 확산되어 당시 동맹휴학한 대학이 57개, 동맹휴학한 학생은 약 4만 명에 달하였다. 한편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을 지지하는 "국대안 지지운동" 또한 벌어졌다. 지지운동은 동맹휴학 반대를 선언하고 대학수업을 계속하도록 요구하였다. 결국 1947년 5월, 동맹휴학을 주동한 4,956명의 학생이 제적되었다가, 그 해 8월 광복절에 제적학생 중 3,518명이 복적 되었다. 이에 개교 직후 만 1년을 "국대안 반대운동"으로 파행을 거듭하다가 1947년 9월 학기부터 수업이 정상화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1949년 12월 31일 교육법 제정을 통해 학교의 공식 명칭을 "국립서울대학교"로부터"서울대학교"로 바꾸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설립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서울대학교는 부산으로 피란하게 되었다. 부산에서 서울대학교는 각 지방에서 피란 온 다른 모든 사립대학들과 함께 1951년 2월부터 1952년 5월까지 "전시연합대학" 편성에 들어갔다. 그 후 1952년 6월 전시연합대학이 해체되자 서울대학교는 부산에 본교를 설치하였다. 피란기간에도 단과대학의 분화 증설이 추진되었는데, 1950년 9월 약학대학을 설립하였고, 1953년 4월에는 예술대학을 미술대학과 음악대학으로 분화시켰으며, 농과대학 수의학부를 수의과대학으로 승격시켰다.
그 결과 서울대학교는 12개 단과대학에 1개 대학원을 가진 종합대학이 되었다.

2단계민족의 대학 건설기 전후민족의 대학 건설기로, 서울대학이 환도한 1953년 9월부터 1975년 2월까지가 이시기에 해당한다닫기
환도후 서울대학교 접수식, 1953.10.15

환도후 서울대학교 접수식, 1953.10.15

1953년 7월 한국전쟁이 휴전되자마자 서울대학교는 1953년 9월 서울로 환도하였다. 6.25 전쟁으로 인한 서울대학교의 피해도 참담하였다. 우선 학과에 따라서는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행방불명 되었고, 교수들마저도 좌우 대립 갈등 속에서 다수가 월북, 피랍, 또는 제명되었다.

학교 건물은 군대 병영으로 사용되어 엉망이 되었고, 부산으로 피란시킨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을 제외한 규장각 도서들은 북으로 실어가려고 포장되어 동두천 농가들에 방치되어 있었다.

신학기 등록창구,1957.3.22

신학기 등록창구,1957.3.22

이러한 전쟁의 참화 속에서 서울대학교는 재건을 시작하였으며, 이 때의 목표는 "민족의 대학 건설"이었다. 이는 한국 민족을 대표하는 최고 수준의 대학이 됨과 동시에 민족의 미래 명운을 개척하는 대학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대학다운 자치를 획득하기 위하여 1954년부터는 총장/부총장 임명에 대한 교수들의 동의제도를 수립하였다. 1955년에는 그 동안 연합대학처럼 따로따로 각 단과대학들이 배지를 제정 사용하던 것을 통일하여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종합대학교의 단일 배지를 제정하였으며, 보건대학원과 행정대학원도 신설하였다.

1955년부터는 엄격한 입학 시험제도를 실시하여 정상적인 신입생들이 입학하게 되었고 이들이 4학년이 된 1958년부터는 서울대학교가 정체성이 정립된 학생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젊고 우수한 교수들도 충원되어 국내 최고의 대학으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하게 되었다. 당시 자유당 정부가 무능 부패할 뿐만 아니라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마저 붕괴시키자, 1960년 서울대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은 4.19 민주혁명을 주도하여 자유당 정부를 몰아내었다. 이를 통하여 대한민국과 서울대학교가 민주적으로 비약할 계기를 마련하였으나, 1년 만에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군부정권은 서울대학교의 민주화와 자치를 탄압하고, 우수한 두뇌를 경제개발 계획 실행에 기능적으로 동원하는 정책을 집행하였다. 총장 임명동의권 등은 부정되었고 교육자치는 전면 금지되었다. 그나마 특수전문대학원 설립은 허용어, 사법대학원(1962), 교육대학원(1963), 신문대학원(1967), 환경대학원(1973)이 설립되었다. 군부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965년의 한-일 기본조약을 반대하는 6.3 데모는 서울대학교를 선두로 전국을 뒤흔들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1968년 "서울대학교 종합화 10개년 계획"이 확정되면서 학교 이전이 본격적으로 준비되었다.

3단계대학종합화 단계 관악 캠퍼스를 중심으로 한 "종합화"의 단계로, 1975년 2월부터 1987년 12월까지가 이시기에 해당된다닫기
관악산 종합캠퍼스 기공식,1971.4.2

관악산 종합캠퍼스 기공식,1971.4.2

1975년 2월 서울대학교 단과대학들 중에서 의과대학, 약학대학 등 의약계는 종전대로 연건캠퍼스에, 농과대학과 수의과대학 등 농학계는 수원에 그대로 남도록 하고, 그 밖의 모든 단과대학들과 대학원들을 관악산 캠퍼스로 이전하여 "종합화"를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단과대학의 구성도 개편되어, 문리과대학과 상과대학은 해체되어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경영대학으로 분화되었다.
이에 서울대학교는 15개 단과대학, 1개 일반대학원, 3개 특수전문대학원으로 정비되었다. 교수들도 전공계열별로 통합되어 대변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관악캠퍼스 이전 후의 서울대학교는 군부정권의 독재적 간섭 강화와 이에 맞선 학생과 교수들의 민주화 운동으로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군부정권은 서울대학교 폐쇄라는 "긴급조치 9호"까지 들고 나왔고, 기관들이 대학 본부에 상주하고, 교수들을 학생 시위를 막는 인력으로 동원하는 시스템까지 만들었다. 군부정권은 1980년에 실시한 "7.30 교육개혁조치"를 통하여 본고사 폐지, 입학정원 대폭 확대, 졸업정원제 실시, 과외 금지를 강제하였다.

이에 따라 관악캠퍼스에는 거의 2배로 증원된 학생들로 넘쳐나게 되어, 시설 부족으로 허덕이게 되었다. 뒤늦게 조달된 자금으로 각종 시설들이 건설되면서 캠퍼스는 건설 현장처럼 되어 버렸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교내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관악캠퍼스 시대는 시위와 경찰 군부의 대결 시대가 되어 버렸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 시대를 열면서 꿈꾸었던 적절한 규모의 "대학원중심, 연구중심 대학"의 실현은 군부정권의 정책에 의해 요원하게만 보였다.

4단계대학민주화 실현기 전 국민의 민주화 운동에 군부측이 굴복하여 "6.29선언"을 발표한 1987년 6월부터 1999년 12월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닫기
학생시위,1980.5

학생시위,1980.5

더 이상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였다가는 군부 전체가 붕괴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군부의 민정당 대표는 민주화를 약속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대통령에 선출되어 6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이에 서울대학교도 총장 임명제를 교수에 의한 선출제로 바꾸고 교수회와 평의원회도 부활시켰다.

1993년 2월 문민정부가 수립되자 그 동안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인하여 제명되었던 학생들을 각종 특례법을 제정하여 모두 복교시켰다. 이로써 서울대학교는 정상화 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각종 연구소들이 우후죽순처럼 신설되었고, 국민의 정부 시대에는 BK21 프로젝트가 실시되어, 각종 특수 연구소의 설치가 더욱 활발하였다.

5단계겨레의 대학에서 세계의 대학으로 서울대학교가 겨레의 대학에서 세계의 대학으로 비약하기 시작한 시기로 21세기가 시작된 200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일컫는다.닫기
강의 모습 이미지

서울대학교는 1977년 '서울대학교 발전 10개년 계획'에서 "학문의 대학". "민족의 대학", "세계의 대학"이라는 3대 이념을 지정하였는데, 1995년에 '서울대학교 2000년대 미래상'을 만들어 그 모토를 이어가면서 "국제수준의 대학원중심대학"을 표방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울대학교는 학부 교육과 기초 교육을 더욱 강화하면서, 세계적인 대학원 중심, 연구중심 대학으로의 비약을 목표로 하였다.

또한 2007년에는 '장기발전계획'을 수립하였고, 2010년까지 교육을 세계 최상급 수준으로 격상하고, 2015년까지 학제간 연구의 집중 지원으로 세계 정상급 연구수준을 확보하며, 2025년에는 세계 정상급 연구중심 대학으로 도약한다는 비전을 확립하였다.

[ 담당부서: 기획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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