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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학문, 그리고 서울대

2012.04.27.

학점 유한책임론

강상진 교수..
철학과

강상진 교수
강상진 교수
모 대학 학생처의 일을 맡은 선배가 직원들에게 했다는 말이 기억난다. “학생들이 학교에 머무는 시간 중 수업을 듣는 시간은 교무처 소관이지만 그 나머지 시간은 모두 학생처 소관이다.” 그 선배가 이 말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사태도 재미있지만, 일단 이 얘기에 따라 우리가 학생들에게 얼마나 책임을 지고 있는지 따져보면 어떻게 될까? 가장 단순한 계산은 내가 강의한 3학점짜리 교양과목을 수강한 졸업생 한 명의 품질에 대해 나는 3학점만 책임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학점 유한책임론’이라고 부르는 계산법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곧장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이런 계산법이 내가 이해하는 철학의 이념, 넓게는 인문학의 이념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통상 한 학기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대학의 강의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만나 공부를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얻은 것, 수업을 통해 함양 한 문학적 상상력이나 역사적 통찰의 능력이, 대학 강의실을 벗어나거나 대학을 졸업하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제한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인문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가 배운 운전의 능력은 내가 직접 운전을 하는 맥락에서만 나의 삶에 기여를 하고, 투표를 통해 표현되는 나의 정치적 의사는 정확히 다음 번 투표 때까지 그 효력을 가지겠지만, 대학 교육을 통해 길러지는 인문적 능력은 본성상 그런 방식으로 제한될 수 없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인문적 능력을 이렇게 이해해도 좋다면, 사실 대학에서의 인문교육은 만만치 않은 역설 속에 놓인 것 같다. 실제 교육은 졸업 이수 학점이라는 제도가 부과하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시행되고 있지만, 교육의 영향과 지속의 관점에서 보자면,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학점 유한책임론’을 훨씬 넘어서는 것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설은 인문 교육을 넘어 새롭게 출범한 국립서울대학법인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운영해야 하면서도 한정된 예산만큼만 책임을 지기보다는 대학 캠퍼스를 훨씬 넘는 국가, 현재 구성원을 넘어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겨레 앞에 책임을 져야 하니 말이다.


기초과학의 매력

김수민..
자연과학대학
생명과학부 09

김수민 학생
김수민 학생
일곱 번째 수강신청을 준비하며 수강편람을 바쁘게 헤치다 보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흥미 있는 강의가 이렇게도 많은데 허락된 시간과 체력은 21학점뿐임에 안타까워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3년간 학문의 기초에서부터 일반교양, 핵심교양과 전공까지 다양한 강의를 수강하였는데, 이 중에는 ‘수학 및 연습’, ‘생물학’처럼 기초과학의 토대를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강의들이나 ‘유전학’, ‘동물생리학’처럼 기초과학의 각 분야를 세분화하여 공부해보는 강의들도 있었지만 ‘인간생명과학개론’, ‘약과 건강’처럼 응용과학을 다루는 강의들이나 ‘오페라사’, ‘스페인어권 문화의 이해’, ‘북한학개론’처럼 기초과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강의들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초과학 분야의 강의들보다 응용과학과 관련된 강의들이나 기초과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강의들을 수강할 때 나는 오히려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더 크게 느끼곤 했다. 응용과학의 토대로서의 기초과학의 중요성에 대해선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의학, 약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생물학, 화학의 발전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고, 공학의 발전은 수학과 물리학, 화학 등 다양한 기초과학의 발전을 필요로 한다. 해양생물학 분야에서의 발견을 토대로 신약 개발에 성공한 사례나 물리학을 이용하여 굴절률을 계산, 피부의 구성을 알아내는 방법을 강의에서 배울 때 응용과학은 기초과학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곤 하였다.

놀랍게도 기초과학의 중요성은 과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강의를 들을 때 더 크게 다가왔다. 음악 관련 강의를 들을 때 음렬과 수학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역사 관련 과목을 들을 때면 기초과학에서의 사소해 보이는 발견이 사회 전반에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지에 놀라곤 했다. 경제학 관련 강의와 수학과의 연관성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생명과학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거의 모든 강의의 내용에서 생물학적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처럼 모든 분야에서 크든 적든 토대의 역할을 하는 기초과학의 미래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초과학을 전공하고자 하였던 주변의 많은 학우들이 사회적으로 보다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응용과학을 선택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사명감 부족의 문제로 보기도 하지만, 개인의 인생을 사회에 대한 사명감으로 결정하는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다는 점에서 이는 타당하지 않은 관점이다. 모든 분야의 토대가 되는 매력적인 학문인 기초과학이 적자생존의 생물학적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뛰어난 학생들에 의해 선택받지 못하는 것은, 기초과학의 길이 제시하는 삶이 그만큼 매력적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의 발전에 필수적인 기초과학에 대한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지원이 아닌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어 기초과학의 학문적 매력이 순수하게 돋보일 수 있다면 일시적인 제도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학문의 기초, 국가의 토대인 기초과학의 미래가 되려는 열정적인 학우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초학문이 사회의 더 깊은 발전 이끌어 낼 것

송첫눈송이..
영어영문학과
석사과정

송첫눈송이 학생
송첫눈송이 학생
현재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점차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 여겨지고 있는 가운데, 이 사회가 바라는 대학 공부는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 소위 말하는 스펙을 위한 공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높이 쌓인 지식은 과연 사회를 구성하는 데에 이로운가? 별다른 고민 없이 얻은 지식은 오히려 그른 일을 그럴 듯하게 비호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지식을 소유의 대상, 축적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이 위험한 까닭이다.

그렇기에, 대학에서의 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더불어 그 지식들을 하나의 “지성”으로 구성해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고민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다. 기계적 지식이 아닌, 지성을 얻기 위한 과정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오롯이 스스로와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깨닫고, 더 나아가 그것을 “나”라는 주체와 결부시켜 받아들였을 때의 희열은 고독의 고통을 끝없이 견디어낸 이후의, 아주 중요한 열매이다. 이처럼 지성을 얻는 과정 속의 수많은 지식들은 개인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 도구로써 활용하기 위해 축적한 지식이 인식의 폭을 오히려 제한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지식이 인문학을 안았을 때에야, 더욱 풍부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서울대의 법인화 과정을 불안하게 지켜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사회에서 도태되는 가치들을 들여다보고, 끌어안고,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참신한 가능성을 다듬어 다시 사회에 내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그 주된 목표 중 하나를 “세계대학순위 TOP 10”에 드는 등의 ‘경쟁과 승리’로 꼽은 법인화의 흐름이 달갑지 않았다. 아이비리그의 대학들이 서울대에 비해 7배가 넘는 예산을 책정하는 가운데, 그 거대한 자본력과 경쟁하기 위해서 결국 학교가 기초학문을 희생하는 전략을 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현재의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에 바라는 점이 많다. 법인화법 시행령에 따르면 기초학문진흥위원회에 대한 이야기가 두루뭉술하게 적혀있다. 이를 안정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실행해나가길 바란다. 사회적 수요가 적은 학문과 대학 전체 발전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대조하여 바라보는 관점을 버리고, 기초학문의 발전이 결국 사회의 더 깊은 발전을 이끌어낸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또한, 대학 행정의 자율성이 학문의 자율성을 우선 보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면 한다. 현재 이사회는 학외 인사가 절반이고 달리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 그런 이사회에서 과연 교수, 학생이 중심이 되는 학문의 자율성을 우선적으로 존중해줄 것인지가 우려되기 때문에 미리부터 인문학도의 바람을 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