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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호 (雅號)

2012.07.23.

아호 (雅號)
글: 노태돈 교수 (국사학과)

부모가 지어준 이름도 영어 이니셜로 표현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된 세상에서 새삼 한자 아호를 사용한다는 것이 유별난 짓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실 요즘 세상에 누가 아호를 사용하고, 누가 아호로 상대를 불러주기나 하며, 또 스스로 아호의 의미를 새기며 자신의 행실의 경계로 삼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아호로 서로를 부르며 아낌과 존중심을 나타내는 여유로움과 깊이를 즐겨보는 것이 필요한 듯도 하다. 적어도 교수사회에선 그것은 잘 어울릴 수 있는 풍류의 한 자락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

나는 그간 간혹 벗들과 서로의 아호를 물어보기도 하고, 아호로 벗들을 불러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간 나 자신의 아호가 없었다. 이런 저런 기회에 아호를 지어 받은 것이 몇 개 있지만, 그 중 특정한 것을 나의 아호로 사용한 적은 없었다. 주위의 벗들도 아호를 가졌어도 들어 내놓고 쓰지 않는게 일반적이다. 아호 사용이 어색하거나 겸연쩍은 일로 여겨지는 듯하다. 그간 내가 아호를 써서 타인을 지칭한 경우는 실제적으로는 나의 스승들에 대해 언급할 때 뿐이었다. 斗溪, 東濱, 一溪, 三佛, 碧史 등이 그러하였다. 다른 선생님들의 경우 아호가 있었지만 왠지 그 아호로 지칭해본 경험이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한우근 선생의 아호가 ‘西牛’였다. 노자가 서쪽에서 소를 타고 왔다는 전설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이가원 선생이 지어 주셨는데, 고향이 관서이고 당신의 성품이 소처럼 우직하여 그럴 듯하게 여겨진다는 한선생님의 말씀을 1970년대 초 대학원생 시절 우연한 자리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아호가 실제 별로 자주 사용된 것 같지는 않다. 선생님 당신도, 제자들도 그러하였다. 이기백 선생의 경우도 나는 뒤늦게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 뒤에 아호가 ‘餘石’임을 알았다. 바이블에서 나오는 ‘버림돌이 초석이 된다’는 구절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이 아호에는 모교의 부름을 받지 못한 서운함과 그것을 넘어서는 자부심이 스며있다는 말을 조인성 교수로부터 전해 들었다.

타인의 아호로서 기억에 남는 것은 ㅈ교수의 경우이다. 우람한 체구와 호방한 성품을 지닌 그에게 그의 장인이 剛한 기질을 좀 누그려뜨리는 것이 좋겠다는 경계의 뜻으로 ‘小石’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翁壻 간의 훈훈한 정을 느끼게 한다. ㅈ교수가 그 뒤 이 아호를 계속 사용하는지 한번 물어보아야겠다. 그리고 김정기교수의 경우도 기억에 남는다. 넓은 포용력과 여유로움을 지닌 김교수의 大人風의 기질은 대학원 시절에도 유명하였다. 항시급한 것이 없으며, 오지랖이 넓어 동료들의 크고 작은 어려운 일에 관심을 기우려 주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본인에게 주어진 일을 제때에 처리하지 못한경우가 많았지만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하였다. 어느 날 그와 같은 류의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당시 같은 동료 학생었던 배영순 교수가 김정기 형의 이런 느긋한 생활 자세를 두고 ‘萬古江山이다’고 하여 웃은 일이 있다.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내가 김정기 형에게 ‘萬江’을 아호로 정하라 하였다. 만강은 만고강산의줄임말이 되기도 하니, 우스개 소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를 결코 놀리는 뜻에서 한 말만은 아니었다. 김교수는 대학원 시절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月印千江’이란 말이 있는데, 그보다 더 넓은 ‘月印萬江’을 줄여 萬江이라 하자는 뜻이라고 즉석 풀이를 해주었다. 天衣無縫의 천진함과 따듯함을 지닌 그의 인품에 대한 깊은 믿음과 존중의 마음을 지녀왔기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가 만강이란 호를 그 뒤 사용하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만나면 한번 더 권해보려 한다.

올 해로 나의 나이가 환갑을 넘긴지 어느 듯 3년째 된다. 요즘 시절에 환갑에 의미를 크게 두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마는, 그래도 인생에서 노년의 문턱을 넘어섰음을 공식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환갑은 그것을 기념하든 안하든 간에 본인에게는 마음의 한 자락을 접게 한다. 환갑을 지난 뒤부터 나는 나에게 남겨진 시간을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직은 생의 시간에 대해서 라기 보다, 직업 정년에 대해서 이다. 인생에 대해 누군들 회한이 없는 이가 있겠냐마는, 새삼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나 자신에 대한 미안함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그와 함께 남겨진 세월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또하나 환갑을 맞아 내게 있은 작은 변화의 하나라면 아호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환갑이 되는 해에 졸업생들이 스승의 환갑을 축하하는 모임으로 여름에 일본 북해도의 아이누족 마을에 대한 답사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제자인 동시에 나의道伴이다. 마음은 감사한데, 모두에게 부담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던 중 ㄱ교수가 환갑을 기념하여 나의 篆刻印章을 새겨 보겠다며 나의 아호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그때까지 나는 아호를 가지지않았다. 별로 한 일도 없는 사람이 아호를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색하고 외람된 듯한 느낌도 있고, 아직은 아호를 사용할 나이도 아닌 것 같아 주저되었다. 그러나 아호를 사용하는 것이 이 부박한 세상에서 나쁜 것만은 아닌 듯하고, 나 자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경계의 뜻도 될 듯하여, 이참에 아호를 정해보았다. 아둔한 감각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柳景이라 정하였다. 버들이 늘어선 평화롭고 여유로운 가운데서 만물이 생동하는 풍경(을 꿈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버들(柳)은 주몽의 어머니가 버들 꽃(柳花)이었음에서 보듯이 북방 유라시아 고대인들에게 생명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柳京은 평양의 별칭이다. 고대사가로서 나의 꿈의 도시는 집안(국내성)과 평양이다. 두 곳은 고구려의 수도였고, 또 평양은 남녁의 나에겐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도시이다. 다만 柳景이란 음이 여성적이고 그 字意가 유약한 느낌을 주기도 하여 좀 불만족스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剛을 이기는 것이 柔인 만큼 달리 생각하면 괘념할 점은 아니다. 단 더 엄격한 내면적인 자기절제가 따른다면 말이다.

아호를 정한다는 것은 자그마한 일이지만 스스로 택한 자신의 새 이름을 가진다는 점에서 가볍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 새 이름을 통해 나는 노년에 들어 또한번 보이지 않는 거듭남을 꿈꾸어 본다.

노태돈 교수는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1971)하고 동대학원 사학과에서 문학석사(1975)를,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1999)를 취득하였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조교수를 거쳐 1981년 본교에 부임하였다. 한국인의 기원과 형성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삼국통일전쟁사』(2009), 『한국고대사의 이론과 쟁점』(2009) 등이 있으며, 「고대사 연구100년-민족, 발전, 실증-」, 「고려로 넘어온 발해 박씨에 대하여」,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말갈’의 실체」, 「한국민족형성시기론」외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인문대 소식지> 33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