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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을 연구하는 영국인 고고학도

2012.09.20.

고인돌을 연구하는 영국인 고고학도
- 유럽에서 고고 발굴 전문가로 활동하다가 역사에 관심 갖고 서울대 진학
- 선진국에서 배운 방식으로 한국의 고인돌 연구

리차드 퍼브스 (Richard Purves, 30, 영국) 서울대 고고학과 대학원 강의실. 분명 한국말인데 일반인들은 알아듣기 힘든 고고 유적의 해석에 관한 강의가 진행 중이고, 학생들은 한자 자료들을 보면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강의를 경청하는 백인 남학생 한 명이 눈에 띈다. 3학기 째를 맞은 리차드 퍼브스 (Richard Purves, 30, 영국) 학생이다.

“재능과 열정을 다 갖춘 학생입니다. 한국 고고학을 진지하게 배우면서도, 서구 학계의 최근 연구 방식을 적용해 새로운 연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도교수인 김종일 교수는 리차드가 서구 학계의 트렌드가 된 경관고고학의 방법론을 적용해 한국의 고인돌을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세계 고고학계에서 한국 고고학의 위상을 바꾸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

고고학은 내 운명, 13살 때부터 전문 발굴 작업에 참여

리차드 퍼브스의 고고학과의 인연은 13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터버러에 있는 ‘플래그 펜 (Flag Fen)’이라는 청동기 시대 거주지를 우연히 본 소년은 신기하다는 생각에 담당 교수를 찾아가 물었다.

“이 나무집은 무엇이에요”
순진하게 묻는 아이에게 발굴 책임자는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무집’에서 석기시대인들이 어떻게 먹고 자고 가족을 이루었는지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었다 ‘반지의 제왕’을 열독하고 역사 소설을 좋아하던 소년의 머릿 속에는 판타지 소설 같은 그림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그 사람이 바로 플래그 펜 발굴자로 고고학사에 이름을 남긴 프란시스 프라이어 (Francis Pryor) 박사였다. 최근에는 고고학자의 삶을 다룬 영국 드라마인 Time Team에 고정 출연해 유명세를 타고 있는 노 학자다. 프라이어 박사는 꼬마에게 “너 다음 주부터 나와서 땅 파는 거 도와라”하고 선뜻 제안했다.

Professional Archaeologist로 활동

그렇게 해서 소년 고고학자의 고달픈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교를 마치면 버스를 한참 타고 유적지에 찾아가서, 땅을 파고, 유적 파편들을 꺼내고, 확인하고, 분류하고, 재조립하고, 보관하는 작업을 매일 반복했다. 소년은 금새 숙련된 발굴전문가 (professional archaeologist)가 되었고, 그의 유용함을 깨달은 프라이어 박사는 이듬해부터 다른 직원들처럼 주급을 주고 고용했다.

프라이어 박사 팀에서 경력을 쌓은 뒤에는 캠브리지 대학 부설 연구소 직원으로 일했다. 요크 대학 고고학과에 진학했을 때 리차드는 이미 6년 경력의 유적 발굴가였다. 대학 졸업 후에는 거대 발굴 회사에 입사해, 건설회사의 유적 탐지 용역을 수행하며 유럽 전역으로 출장을 다녔다.

갑작스런 한국행, 한글 배우기, 한자 배우기, 한국 사람 배우기에 적극 도전해 성공

“어느 수준 이상이 되니까 발굴이 단순 작업으로 여겨지더군요. 유물들이 들려 주는 선사시대 삶의 이야기에 가슴을 설레던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는 고고학의 보고인 동아시아로, 그 중에서도 한국으로 무작정 왔다.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까지 다 돌았었는데 한국이 끌리더라구요.”

서울대에서 한국고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예상보다 더 큰 도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모든 강의는 한국어로 들어야 하고 보고서도 한국어로 써야 한다. 연구를 하려면 고급 한자 실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도 기본이다.

“저는 원래 어려운 일, 안 해본 일에 더 끌려요.”
중학교 때 독일에 놀러가서 금방 유창하게 독일어를 할 수 있었던 자신감으로 한국어에 도전해 독으로 서울대 입학이 가능한 수준이 되었고, 두 학기 동안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새로운 방식의 고인돌 연구로 한국 고고학에 도전장
한국 고고학과 서구 학계를 잇는 역할 하고 싶어

그의 연구 분야는 한국의 고인돌이다. 한반도는 대략 7~10만 개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세계 최고의 고인돌 밀집 지역이다. 김 교수와 퍼브스는 고인돌의 형식분류와 기원을 추정하는 방식의 전통적인 연구에서 벗어나 고인돌 주변의 경관을 파악하고 당시의 상징적 공간 형성과정을 추적하는 기호학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고고학의 선구지인 영국에서는 이미 일반화된 후기 과정 고고학 (post-processual archaeology)의 연구 방식으로 우리 고인돌을 둘러싼 새로운 비밀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은 독자적인 고고학 유산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해서 이 넘치는 연구 대상들을 영국 학계에 소개할 생각을 하면 설렙니다.”

학문적 야심이 크다고 한국에서의 삶을 상아탑 안으로만 한정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다를 뿐, 고고학자도 인간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라고 믿기에 진짜 한국인 만나기에 나섰다.

도심의 세련된 사람들을 피해 오래된 지역으로 가서 ‘아저씨’들을 만나 어설픈 한국말로 소주잔을 기울인다. 택시기사, 배달부, 농사꾼들을 많이도 만났다. 백인 학생에게 호감도 적의도 품지 않은 순 한국인들이었다. 그렇게 마신 소주가 몇 병인지 셀 수 없다고.

“여러 지역과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보니까 한국인의,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한국인만의 아이덴터티가 무엇인지 감이 왔어요. 영국인들처럼 오랜 기간 걸쳐서 형성된 한국인만의 그것이 있었어요.”

한국의 고인돌에서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2012. 9. 20
서울대 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