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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기구의 '샤人'

2012.09.25.

박경렬 동문(화학생물공학부98학번 , 외교학 복수전공)
세계은행 Innovation Labs

2011년 7월 독립한 남수단에서 처음으로 파견된 인턴학생들과 World Bank에서 근무하게 된 계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 보다는 과거의 경험들이 저를 이곳으로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전 학부 졸업 후에 탄자니아에서 2년 3개월 동안 KOICA 해외봉사단으로 활동했었습니다. 저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킬리만자로 산 중턱의 므위카라는 작은 중등학교(secondary school)에서, 다음에는 아루샤란 곳에 있는 한 기술대학에서 근무했습니다. 수개월간 일주일에 한 두 번 밖에 전기가 안 들어오기도 했고, 동아프리카 최악의 가뭄이 닥쳤던 2006년에는 6개월 동안 물이 안 나와 매주 길어와야 했던 적도 있었어요. 열악한 물 사정 때문에 이질에도 자주 걸리고 말라리아도 세번이나 앓으면서 몸무게가 15kg나 줄어 나중에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은 저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배움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단한 상황 속에서도 미소 지으며 서로를 배려하는 현지 분들을 보면서 행복에 대한 기준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고, 오랜만에 아날로그적인 삶을 살면서 느림의 미학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20년 넘게 한 문화권에만 살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깨지고, 처음에 ‘불편함’으로 느껴졌던 환경, 다른 문화와 생각들을 이해하고 그것에 침잠하면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던 시간들은 너무나도 감사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모기장 하나, 백신 하나만 있으면 살 수 있음에도 스러져가는 친한 이웃 사람들을 보는 것은 제게 너무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많은 원조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왜 빈곤 문제는 이렇게 해결되지 않는 것인지 머리 속이 복잡했습니다. 그 전에는 유학에 대한 생각을 해 본적이 거의 없었는데 직관적으로 드는 몇 가지 질문에도 제가 아는 것이 별로 없더라는 걸 깨달았어요. (웃음) 너무나 거대한 문제라는 생각에 막막함이 없진 않았지만 이 분야 (국제개발: International Development)에 대해 공부하고,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후 한국에 돌아와서는 국제보건업무를 담당하는 국제기구에서 인도에 있는 프로젝트 현장과 서울 본부에서 일을 했었고, 미국 보스턴에서 유학을 마치고 국제개발 관련 작은 비영리기구 (Non-profit organization)에서 근무를 하다 지금 일하고 있는 세계은행에 오게 되었습니다.

자원봉사나 현장 경험이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었는지?
처음 탄자니아에 갔을 때 쓴 글을 보면 ‘해외봉사단’이라는 이름 때문에 막연하게 가진 우월감이라고나 할까요? 내가 뭔가를 도와주고 싶다는 ‘좋은 책임감’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이렇게 하면 됩니다’라고 마치 가르치는 듯한 나쁜 소통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도움을 받고 성장한 사람은 오히려 저였던 것 같아요. 원조나 국제개발 사업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 임을 깨달은 것은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개발사업이 진행되는 절차가 보통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결과에 있어서 변수도 많기 때문에 현장에서의 세세한 경험이 본부에서 일을 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간략하게 나마 세계은행이 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세계은행은 개발도상국의 발전과 최빈국의 빈곤퇴치를 위한 종합적인 활동을 하는 가장 큰 국제기구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IBRD(국제부흥개발은행)를 통상 세계은행이라고 부르는데, 이밖에 IDA(국제개발협회), IFC(국제금융공사), MIGA(다자간투자보장기구), ICSID(국제투자분쟁해결기구)를 포괄한 것이 ‘세계은행 그룹’입니다.

그 동안 세계은행은 외부적으로는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신자유주의 및 소위 지구적 전체주의를 심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내부적으로도 공룡과 같은 조직에 기인한 관료주의와 비효율, 폐쇄성이 문제가 되었고, 가장 귀 기울여야 할 빈국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강대국의 입김에 휩쓸려 지구촌 빈곤문제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쓴 소리를 들어왔습니다. 아직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여러 변화의 조치들이 최근 취해지고 있는데요. 특히 과거 ‘개발(development)’에 대한 관점을 지나치게 경제 성장에만 맞추어 인프라 구축, 금융분야에만 집중했었던 것을, 보건, 환경, 교육, 여성의 문제까지 좀 더 사회적, 포괄적인 확대된 시각으로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그간 진행되었던 개발의 방식은 수원국(원조를 받는 국가)의 사람들과 ‘함께’하기 보다는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접근 방식이 많았는데요. 기존의 계층적, 선형적인 모습에서 보다 수평적, 공개적인 방식으로 개발협력이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세계은행은 2010년 Open Data Initiative 라는 아젠다를 발표했는데요, 쉽게 얘기하면 전에는 돈을 내야 접근할 수 있었던 세계은행의 개발지수들, 프로젝트 상황에 대한 정보들을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웹(http://data.worldbank.org)에 모두 ‘오픈’한 것입니다.

어떤 업무를 담당하고 계시는지?
저는 Innovation Lab이란 재미있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위의 예처럼 ICT (정보통신기술)를 이용해 세계은행이 그 동안 ‘하고 있지 않았던 것’들, 혹은 ‘하고 있는 것을 다르게’ 시도하고 인큐베이팅하는 부서입니다. 제가 맡고 있는 일들 중Mapping for Result(M4R)이라는 프로젝트는 앞서 언급한 ‘오픈’ 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각기 흩어져 있던 개발협력사업에 대한 정보를 하나의 ‘플랫폼’에 담는 것인데요. 그 동안 세계은행이 그 많은 프로젝트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저희들도 잘 몰랐던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올해 초까지 145개국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프로젝트들을 GIS(Geographic Information System)을 이용해 매핑해서 공개하고 있습니다 (http://maps.worldbank.org).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작업 통해 프로젝트 지도와 개발지수를 비교할 수 있게 됨으로써 보건 프로젝트가 유아 사망률이 높은 곳에 제대로 집중되고 있는지, 교육 프로그램이 시행되는 곳의 초등학교 현황은 어떠한지 등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하고 개별 프로젝트에 대해 평가하면서 원조정책을 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처음에 ‘세계은행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지도에 그려보자!’며 패기 있게 출발한 작은 프로젝트가 2년여만에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어 본부 표준이 되고, 다른 공여국(원조를 하는 나라)들로 확산되는 과정을 직접 보는 것은 큰 보람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세계은행이 어떻게 일을 추진해 나가는지, 다른 국가들과 어떻게 협력사업을 펼쳐가는지의 큰 그림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현재는 세계은행 원조자료와 주요 공여기관의 자료를 모두 모아 Open Aid Map 을 만드는 Open Aid Partnership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보통 한 국가에서 20~30여 개의 공여기관과 수 많은 개발NGO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그들간의 중복사업으로 인해 ‘개발효과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요 저희들의 작업은 원조의 투명성을 높이고 효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재는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인 말라위에서 27개 공여기관이 벌이는 원조 활동을 처음 매핑한 것을 시작으로 몰도바, 네팔, 탄자니아 등에서 파일럿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각고의 노력끝에 완성된 말라위 Open Aid Map을 처음 공여국 관계자들과 말라위 정부 분들께 보여줬을때 놀라워했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한국 정부도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소중한 세금으로 운영되는 원조정책을 보다 효율적이고도 투명하게 집행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앞서 언급한 국제사회의 이러한 ‘정보에 대한 개방’과 ‘오픈’의 움직임도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기에 지금 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동아프리카 출장 중 케냐 지역 사무소에서 공대생인데 어떻게 이러한 경로를 걷게 되었는지?
사실 우연한 계기들의 연속이었던 것 같은데요. 저는 공대생이었지만 그래도 공학의 틀을 벗어난 일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후배님들께 보다 다양한 교육과정과 기회가 생기고 있는 것 같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지만, ‘응답하라 1997’ 세대였던 90년 후반의 현실에서 문과, 이과란 경직된 틀은 이런 관심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대학에 진학하면 철학이나 역사 같은 과목들을 자유롭게 수강하며 폭넓게 사고하는 법을 배우고, 토론할 기회가 있을 줄 알았는데, 공대생들은 아시겠지만 처음 두 해 동안에는 물리, 화학, 미적, 전공필수 등을 듣느라 주어진 학점의 자유는 고작 5~6학점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경계’에 서 있는 듯한 제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민이 큰 시기였고 갈증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학관 앞에서 외대에서 주최하는 모의유엔총회 포스터를 본 게 지금 보니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아요. 주제 중에 하나가 식량안보였는데 GMO(유전자조작농산물)을 가지고 그 안전성 문제에 대해서 국가간의 협상을 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GMO 수출국은 많이 팔기 위해서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수입국들은 안전하지 않다는 리스크에 대한 과학적 결과를 주장하더라구요. 그 동안 ‘이과생’으로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며 그에 대한 결과도 객관적인 것이라고 배워왔는데,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각 국가들이 정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협상하는 과정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그 뒤로 국제정치관련 수업들에 흥미가 생겨 많이 듣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학교에 복수전공이라는 제도가 생긴 거에요. 몇 과목만 더 들으면 외교학과 전공 이수학점을 채우겠더라구요. 사실 학점으로 따지면 훨씬 좋은 분들이 많았을 텐데 이미 과목들을 많이 들어놓기도 했고 공대생이라 특이해서 운 좋게 받아주신 것 같습니다. (웃음).

저는 공학이란 큰 틀에서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배우는 학문이라 생각합니다. 예전에 배웠던 계량적 분석이나 프로그래밍 같은 것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 자체가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해요. 문제에 대한 답을 논리적으로 펼쳐가고 수리적으로 분석하는 훈련은 어떠한 분야에서 일을 하든 큰 자산이 되거든요. 현재 제가 하고 있는 Technology for Development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이해하고, 이 분야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있어도 도움이 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반면, 공학이 정답이 하나인 학문이라면, 사회과학은 정답이 여러 개 일 수도 있고, 때로는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 다르죠. 처음에 외교학과 수업을 들으면서 상당히 생소했습니다. 여기서는 혼자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함께 토론하며 결론을 내리는 과정이 중요한데 이를 배우는 것 역시 중요했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학창시절 어떠한 경험과 준비를 했는지 또 현재 일하는 업무에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
사실 ‘국제기구를 위한 준비’라고 할만한 것은 특별히 없었습니다. 어떤 곳에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학창시절의 여러 가지 경험이, 의도치 않게, 계획하지 않은 상황에서 불쑥 튀어나와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 주어지는 여러 경험과 기회들을 다 소중하게 생각하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가령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ICT tool(소위, 인터넷, SNS, database 등)을 사용해서 정보들을 오픈하고 어떻게 하면 원조를 더 투명하고 효과적으로 할지, 피드백을 받고 정부가 그것을 반영하는 시스템은 어떻게 디자인 할 것인지, crowdsourcing을 한다면 문제점은 없는지에 대한 논의가 저의 팀의 단골 주제인데요. 학창시절 2년간 활동했던 스누라이프 (SNULife.com)에서의 경험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어떻게 시스템을 디자인 할 것인지, on-off의 연계는 어떻게 할 것인지, 실패한 메뉴들은 어떻게 다시 살려야 하는지, 초창기라 사이트의 존폐가 달려있는 문제와 위기들에 대해 진지하게 친구들과 밤새 이야기 나누고 고민했던 경험이 적잖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무엇인가 구성원이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정보가 오픈 된 네트워크, 또 어떻게 하면 구성원의 참여를 최대화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것 같네요.

총학생회에서 활동했던 경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당시는 총학생회에 많은 변화의 요구가 있었던 시기였는데요, 보다 많은 학우 분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학생회가 그 동안의 계층적인 구조가 아니라 학우들의 다양한 활동을 위한 ‘플랫폼’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총학생회 조직이 1년 단위로 바뀌면서 소중한 노하우와 데이터들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 큰 문제라 처음으로 ‘백서’를 발간해서 공개하고 누가 총학생회를 운영하든 학우들에게 필요한 사업들이 계속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부족하지만 가장 큰 힘을 썼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잘 된 것도 잘 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의견이 다른 그룹들간의 접점을 함께 찾아내는 과정을 배운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업무 외적으로는 제가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데요. 제게 축구는 또 다른 소통의 언어인 것 같습니다. 국제기구의 특성상 Client (주로 개발도상국) 혹은 공여국 사람들을 만나서 미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서먹하다가도 자국 출신의 축구선수나 클럽 얘기를 하면 반색을 하면서 금방 친해집니다. 얼마 전에도 미팅에 온 한 핀란드 분께 예전에 좋아했던 리트마넨이란 선수를 얘기하니, 갑자기 좋아하며 끝나고 맥주한잔까지 하면서 그 선수의 최근 근황도 얘기하고 그랬죠.

지금 하는 업무를 하기 위해 뭔가를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경험해 보았던 것이, 그리고 사소하게 관심을 가졌던 것들이 우연한 시기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했었던 경험들이 그냥 ‘점들’의 의미였다면 ‘connecting the dots’라고 하죠. 서로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것들이 신기하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면서 모든 것을 계획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하지만 현재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궁극적으로는 후에 자신을 구성하는 ‘점’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근무하면서 보람을 느끼거나 어려움을 느꼈던 점이 있다면?
이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한국인이라는 것에 느끼는 자부심이 무척 큽니다. 이미 많은 분들께서 알고 계시지만, 우리나라는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외국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놀라워하고,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선배세대의 헌신과 희생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처럼 빠른 시간 안에 훌륭하게 달성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우리가 누리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개발과정을 통해 외형적으로는 많은 성장을 이뤘지만, 사회적으로 그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된 그룹들도 있었고, 빈부격차나 환경문제 같은 심각한 문제도 낳았죠. 때문에 균형적이고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우리의 모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의 노하우뿐만 아니라 실패사례와 파생된 문제점을 그대로 같이 보여주고 평가 받는 성숙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희 팀이 진행하고 있는 ‘Open Aid’에 대해 큰 애정이 있습니다. ‘클레이셔키’가 ‘Here comes everybody’에서 얘기했듯 정부와 힘이 센 기업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일반 시민들의 손에서도 집단적 의사행동이 가능해졌습니다. 원조도 공여국-수원국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그 해당 프로젝트의 수혜자인 ‘시민’들의 요구와 평가가 직접적으로 반영되어야 할 ‘원조의 민주화’가 필요한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팀의 Open Aid는 원조 관련 데이터를 투명하게 오픈해서 정책 결정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넓힐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개발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하나의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개발’에 대한 지식은 더 이상 연구자, 학자, 세계은행 정책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거든요. 필리핀 민나나오 섬에 있는 한 보건 근로자가 자신의 활동상황을 기록한 것, 우간다 작은 마을의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의 학습을 위해서는 아직은 컴퓨터 보다 책이 더 필요하다고 느낀 것 모두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보통 아프리카를 단수로 사용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54개의 나라, 3000여의 부족이 각기 다른 언어를 쓰고 있음에도 말이죠. 국제개발에 있어서 ‘대 아프리카 정책’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동아프리카, 케냐의 몸바사의 어느 지역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원조 프로그램의 직접적인 수혜자인 시민들과 다양한 행위자들이 참여하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해요. 새로 부임하신 총재께서도 취임일성으로 세계은행 개혁과 전반적인 방향 수정에 대해 말씀하셔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세계은행 김용 총재와 함께 국제기구에서 근무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될 것 같아요. WTO, IAEA와 같은 특화된 기구를 빼고 ‘국제개발, 빈곤문제’와 관련된 기구만 좁혀 놓아도 너무도 다양한 기구들이 있습니다. 환경, 인권, 교육, 보건, 과학기술, 시민사회 등 그 중에 어떠한 ‘업(業)’에 관심과 재미를 가지고 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분야에 대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분들은 언어 공부를 조언하시는데, 저도 한국나이로 서른이 되는 나이에 처음 유학을 와서 언어가 참 힘들었습니다. 하루는 밤 늦게 하버드 기숙사 앞을 걷는데, 거리에서 주무시는 분께서 유창한 영어로 일장연설을 하더라구요. 반 정도나마 이해를 할 수 있었는지 암튼 너무 부러워서 한참을 서서 들었습니다 (웃음). 하지만 소통에 있어서 언어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생각과 문화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배려하는 진심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래서 전 국제기구에서 근무하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20대 때는 큰 국제기구에서 인턴을 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다른 문화권에서 중,장기 자원봉사나 작은 NGO에서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해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교 후배들에게 대학생활에 대한 조언을 준다면?
제가 벌써 졸업한지 8년여가 되어 후배님들께 조언을 할 입장이 되었다니 시간은 참 빠른 것 같아요. 이렇게 지면을 통해서나마 말씀 나눌 기회가 주어져서 영광입니다. 요새 후배님들 보면 학업에도 굉장히 열심이시고 학창시절부터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서 추진하는 모습이 너무 훌륭합니다. 특히 예전에 비해 국제 문제에도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아졌고, 자원봉사활동과 같이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서 관심 있는 서울대 후배님들도 많아 자랑스럽습니다.

요새 ‘자기가 정말 즐길 수 있는 일을 하라’라는 말들을 많이 하시잖아요. 물론 제일 중요한 말입니다. 하지만 학창시절에는 그 말처럼 어렵게 느껴질만한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정작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마다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틀리겠지만, 조금 흥미가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많이 경험해보고 열정을 가지고 도전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가끔씩 느리게 걸으며 나 자신과 대화를 갖는 시간도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몰랐던 내 안의 ‘꿈틀거림’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과정에서 도전이 실패처럼 느껴지고,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너무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뜻대로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안 되도 그 경험을 통해서 무엇을 느끼고 배웠는지만 ‘복기’한다면 또 다른 소중한 기회로 만들 수 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학창시절은 가끔 비도 오고 바람도 부는 것이 후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태양이 너무 빛나면 오히려 사막이 된다고 하죠. 조금 돌아가게 되어도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붓는 과정이었다면 나중에 언제든지 어떠한 형태로든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서울대인은 사회에서 비교적 많은 혜택을 받았잖아요 나의 문제를 넘어서 내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 더 넓게는 ‘이 세계’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를 더 많이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관악의 사계절이 모두 운치가 있지만, 알록달록 물든 자하연과 셔틀버스 타기 전 따스하게 펼쳐지는 멋진 노을은 아직도 가끔 생각납니다. 관악의 아름다운 가을과 함께 후배님들의 멋진 대학생활 기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