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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기구의 '샤人'

2013.02.20.

세계식량기구 소말리아 사무소 책임자
이현지(동양사학과 99학번)

Kismayo 수요 조사 일정 중 저자와 동료 “저기 좀 봐!” 외마디를 지르는 동료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포장 도로를 덜그럭거리며 내달리는 장갑차 뒷좌석에서 무려 8kg에 달하는 방탄용 조끼와 철근 헬맷을 착용한 채 균형을 유지하기란 만만치 않았다. 삐질삐질 나는 땀을 애써 무시하며 창 밖을 내다보니 뜻밖의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목탄 (charcoal) 산더미가 마치 길가를 장식하는 가로수 행렬 마냥 끝없이 줄지어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노상에 방치된 채 항구 입구 주변에 묶여 있는 이 목탄의 풍경만큼 Kismayo에 거주하는 소말리아 주민들의 고난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도 없었다.

작년 11월 나는 세계식량계획 (World Food Programme) 소말리아 사무소를 대표하는 책무자로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카에다를 후원하는 소말리아의 반군 집단 알샤밥 (Al Shabaab)이 군림하고 있던 Kismayo에 긴급 구호 수요 조사 (Emergency Needs Assessment)에 나섰다.

유엔기구 중 가장 큰 구호 단체인 WFP는 구호 사업을 펼치기 전에 대략적인 사업 규모 및 지원 방식을 결정하기 위해 사전 수요 조사를 감행하는데 나의 주된 직무는 이와 같은 수요 조사를 기획/집행하는 것이다. 수요 조사는 대개 선별적 가구 설문 조사 (Household Questionnaire) 혹은 포커스 그룹 인터뷰(Focus Group Discussion)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는 WFP가 실질적인 구호 작업을 런칭 (Launching)하는데 필히 밟아야 할 선행 단계이다.

2006년에 JPO 선발을 계기로 WFP 근무를 시작한 이래 이미 수 차례 도맡아 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Kismayo 수요 조사 건은 조금 특별했다. 우선 신변 안전 차원에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움직임의 제약이 심했다. 수요 조사단에게 주어진 시간은 반나절 그리고 단 이틀 동안 뿐이었고 Kismayo 시내의 동선을 미리 케냐 부대장에게 의뢰하고 승인을 받지 않는 이상 꼼짝도 할 수 없었다 (Kismayo는 알샤밥 퇴치 후 케냐군이 아프리카 연합 – African Union - 평화 유지군의 일환으로 통제하고 있다).

또한 Kismayo Town 자체를 둘러싼 이해관계 역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소말리아의 수도인 Mogadishu 다음으로 큰 Kismayo는 항구 도시로서 본디 소말리아 남부의 무역 중심지로 번성했다. 특히 Kismayo를 비롯 소말리아 남부 지역 전반을 점령하고 있는 알샤밥의 후원 아래 목탄 수출 사업이 Kismayo와 인근 지역 경제의 주된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수출 사업과 관련된 이윤이 고스란히 알샤밥 그리고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집단에게 돌아간다는 연유로 유엔 안보리는 2012년 2월 소말리아의 목탄 수출을 금했다. 덕분에 알샤밥의 수입은 (적어도 공식적인 수치 상으로는) 줄었으나 그와 함께 Kismayo 주민들의 생계줄도 하루 아침에 끊기면서 빈곤과 궁핍에 시달리는 이들의 숫자는 도리어 는 것으로 보인다. 수요 조사에 응한 Kismayo 주민들 태반이 외부로부터의 식량 지원보다는 일자리 마련이 급선무라고 지적하는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중동 선박이 수입 식품 컨테이너를 들여오는 항구의 모습이나 현지산 과일 야채 등을 쉬이 찾아볼 수 있는 시장의 모습을 보아서도 식량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라 충분한 식량을 조달할 수 없는 빈곤 가정의 경제적 여건 (Economic Access)이 문제의 본질인 듯 했다.

한편 케냐군과 동모하여 알샤밥을 쫓아낸 또 다른 반군집단인 Raskamboni Brigades는 대외적으로 Kismayo 주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나서면서 WFP와 기타 유엔 기구에 긴급 구호를 요청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목탄 수출 금지 해지에 따른 엄청난 경제적 이익 (약 6천만 불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에 눈독을 들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이익 중 얼마 만큼이 Kismayo 주민들 특히 만성적인 기근에 시달리는 빈곤층에게 돌아갈 지는 미지수이다. 또한 장기적으로 목탄 생산이 갈수록 사막화 현상이 심화되는 소말리아의 환경 부담을 가중시키는 문제 역시 방관할 수 없는 숙제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이해관계를 충족시킬 수 대책으로서 인도적 구호는 분명 한계가 있으며 WFP 역량 (mandate)을 벗어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결국 WFP는 당장의 식량 안보 문제 (food insecurity)에 착안하여 Kismayo에서 가장 궁핍하고 만성적인 기근에 취약한 소수 집단 (이를테면 5세 미만 유아, 최빈층, 특정 소수 부족 출신 등)을 겨냥한 현장 무상 급식 (wet feeding) 프로그램을 12월에 시작했다. 이는 수요 조사 종결 이후 최단 기간에 구호 사업을 시작한 경우라 작은 성과라면 성과였다고 자평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Kismayo 안팎의 불안정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수요 조사단 일원 모두가 일정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부분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Kismayo 항에 묶여 있는 목탄 더미 유엔 입문 과정은 어떻게 되며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부분에 대해서는 이전 기고문에서 여러 차례 다룬 바 생략한다. 다만 유엔 근무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유엔에서 근무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다양하므로 여러 경로를 탐색해보라는 것이다. 특히 자원 활동이나 여행 또는 기타 직장 경험을 쌓는 데 아낌없이 투자하라고 권하고 싶다. 인턴십이나 단기 계약직을 거쳐 정식 직원으로 성장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실제로 많이 보았다. 꼭 JPO 선발 시험이나 국가별경쟁시험 (NCE)과 같은 공식적인 등용문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유엔 근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에 대해서도 차분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일반적으로 유동성이 많은 유엔 일을 하면서 직장 생활과 가정 생활의 조화를 꾀기란 쉽지 않을 뿐더러 더러는 열악한 환경에서 지낼 각오를 해야 한다. 내가 위에서 적은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경우에 따라서는 가슴 졸이고 위험 부담이 많은 순간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점 역시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새로운 인연과 배움의 기회가 많은 이 일을 나는 사랑한다. 그러니 관심있는 후배들의 도전을 무조건 응원해주고 싶다. 후배님들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