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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억명 아시아인의 예측의료를 책임진 기초의학자

2013.03.11.

38억 명 아시아인의 예측의료를 책임진 기초의학자
2012 서울대 학술상 수상자 서정선 교수(의학과)

‘네이처’ 10주년 기념 논문으로 선정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

서정선 교수는 2009년에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쳐’에 논문을 게재하고, 2010년과 11년에는 ‘네이쳐 제네틱스’에 각각 한 편씩의 논문을 게재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유전체연구 권위자이다. 이러한 공로로 2012년 서울대학교 학술상을 수상한 서 교수는 “동료가 주는 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권위 있고 값지다”며 “상은 젊은 교수들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이렇게 나이 많은 교수가 받아 조금 미안한 마음도 있다”는 다소 겸연쩍어했다.

하지만 서정선 교수는 이미 세계적인 유명 학자이다. 2000년 전세계적인 충격을 불러일으킨 “인간게놈프로젝트”의 4대 인종 중 하나인 북방계 아시아인의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주도해왔기 때문이다. 서 교수의 유전체의학연구소에서 진행한 북방계 아시아인의 유전체연구는 그 완성도와 정확성을 인정받아 지난 2011년 2월 네이쳐가 10주년 기념으로 꼽은 30편의 기념비적 논문에 포함되기도 했다.

“인간의 하나의 기계라고 봤을 때 이 기계를 움직이는 모든 부품을 연구하는 것이 유전체 연구입니다. 인간을 이루고 있는 30억 개의 정보를 모두 조사해서 각 개인이 특별히 취약한 부분을 파악하고, 이를 미리 예방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입니다.”

네이쳐의 기념비적 연구로 꼽히는 대한민국의 연구, 우측 하단에 태극기.
네이쳐의 기념비적 연구로 꼽히는 대한민국의 연구, 우측 하단에 태극기.

“유전체 연구는 블록버스터 영화와 같아요.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자본, 자원의 힘이 무엇보다 따라줘야 하는 분야죠. 그랬기에 처음 시작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우리는 유전체연구에 대한 그 어떤 네트워크도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연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새롭게 마련을 해야 했죠.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맨 땅에서 시작하려고 하니 처음엔 시행착오도 많고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서울대학교의 의과대학의 우수한 학생들, 젊은 친구들의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과는 결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임상의 가족에서 싹튼 기초의학의 꿈

아시아의 유전체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서정선 교수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70학번으로, 생화학 석사로 진입했던 1976년부터 기초의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의사가 되는 것이 결코 싫었던 것은 아닙니다. 질병을 직접 치료할 수 있는 의사의 길도 굉장히 가고 싶었고, 실제로 내과 쪽에 관심이 많기도 했죠. 그러나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학문적인 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문의 깊이를 계속적으로 키워 시간이 지났을 때, 높은 곳에서 전체를 바라다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힘든 고민 끝에 기초의학의 길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서울대 기생충학 교수였던 아버지 서병설 교수님을 포함해 어머니, 형, 여동생 모두 의학계에 종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서 교수는 보건․의료서비스에 대해 항상 생각이 많았다.

“세계적으로 보건․의료서비스에 결코 적지 않은 비용이 듭니다. 이와 같은 현실이 계속된다면 세계의 의료보험, 의료재정이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걱정을 많이 했죠. 의료서비스의 비용을 어떻게 하면 낮출 수가 있을까? 가장 획기적인 방법은 기존의 치료의학에서 예측의학으로 의학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는 겁니다.”

기술의 진보를 통한 새로운 발견으로 질병이 효율적으로 치료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에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유전체연구에 도전할 수 있었다.

“예측의학이 가능해진다면 치료비를 10분의 1로 줄이는 것도 가능해지며 질병의 치료를 위해 더 효율적으로 자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유전체연구는 전적으로 백인들에 의해, 백인들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이러한 백인의 유전 연구 자료는 우리 아시아인에게 조금도 적용할 수 없죠. 이러한 현실이 안타까운 마음, 4대 인종 중 하나인 북방계 아시아인에게도 이러한 예측의학의 혜택이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유전체 연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연구 기반 기술 습득이 우선

상대적으로 네트워크와 자본이 부족했던 한국의 연구 환경 속에서도 세계적으로 두각을 보이는 연구들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서 교수만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1983년에 처음 서울대 의대 교수가 되었을 때는 하나의 질병, 하나의 현상을 정해서 연구를 진행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이 계속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유전체연구를 훨씬 먼저 진행했고, 네트워크와 기술력이 풍부한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연구의 방향을 수정해야 함을 느꼈죠. 5년 쯤 지난 후부터는 유전체연구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기술을 먼저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새로운 기반기술을 먼저 완벽하게 습득을 한 후 선진국이 가지 않은 길로 나아가야 국제사회에서 의미 있는 연구 실적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연구의 기반이 되는 신기술부터 완벽히 습득한 후 선진국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가고자 하는 연구팀의 전략은 훌륭하게 들어맞아, 지난 2011년 12월에는 현재까지 유전적 원인을 알 수 없었던 폐 선암의 원인 융합 유전자를 세계 최초로 규명해낼 수 있었다. 이 연구 결과를 통해 폐 선암의 원인 분자 타깃이 정확히 밝혀짐으로써 폐암 표적 치료제 개발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연구팀은 이렇게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하는 첫 번째 대규모 유전체연구도 무사히 끝마쳤다.

천생(天生) 선생(先生)

“처음 연구를 시작했을 때는 학생들을 굉장히 엄격하게 다그치며 지도했었어요. 후발주자인 우리가 선진국의 유전체연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선 치열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게 나온 연구들이 계속해서 인정을 받지 못하자 기운이 빠졌고, 자연스레 지도방식도 달라지게 됐습니다. 대학원생들도 적게 받고, 학생들의 연구지도도 조금 자유롭게 놓아두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네이처’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 이렇게 연구태도를 수정했을 때부터였다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또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었죠. 생각은 항상 연구에 머물도록 해야겠지만, 조바심을 내지는 말 것. 여유를 가지고 임할 때 더 높은 효율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2005년 서정선 교수는 의과대학 학생들 전원이 노트북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사비를 보태가며 발 벗고 나선 것으로 유명하다. 과도한 학습량에 시달리는 의과대학 학생들을 보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의학정보의 양은 날이 갈수록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방대한 양의 정보를 계속적으로 저장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 교육인데, 이는 학생들에게 너무 무리를 주는 교육방식이라고 생각했었어요. 휴대용 저장장치의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앞으로는 정보를 외우는 것보다 정보를 효율적으로 찾는 게 더 중요해 질 것이라 판단했었죠. 요즘도 저는 시험 볼 때 노트북을 들고 오라고 합니다. 이 노트북이 의과대학 학생들의 ‘second brain‘인 거죠.”

누군가가 자신들을 응원하고,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서정선 교수, 세계무대에서 주목을 받는 연구자지만 교내에서는 그도 다른 교수와 다를 것 없이 학생들만을 생각하는 한 명의 선생(先生)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