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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를 통해 칭찬, 격려, 사랑을 주고 싶었다

2013.04.16.

“기부를 통해 칭찬, 격려, 사랑을 주고 싶었다”
‘오치균 장학기금’을 만든 서양화가 오치균, 이명순 작가 부부

남편과 함께 ‘오치균 장학기금’을 설립한 이명순 작가 미술대학 재학 시절,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있었다. 그의 말을 빌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으로 생활’을 할 정도로.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으로 도미한다. 작품성은 인정받았지만 궁핍한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치열한 노력의 대가는 배신을 않는 법. 세월이 흘러 그는 미술계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작품에 대한 높은 평가와 그 작품의 높은 가격으로 생긴 부(富), 두 가지를 모두 거머쥐게 된 것이다. 그는 과거 어려웠던 학창시절을 떠올렸고, 흔쾌히 모교에 장학금을 쾌척한다.
우리 주변에서 보기 힘든 ‘판타지 소설’같은 이야기 같은가? 실제 이야기다.

현재 우리 미술계의 블루칩으로 평가받는 서양화가 오치균 작가의 개인 스토리다. 모교인 서울대에 2007년 쾌척한 1억 원으로 시작된 ‘오치균 장학기금’은 작가가 기회가 될 때마다 기부한 장학금과 작품으로 이제는 6억 7,000여만원에 달한다. 이렇게 조성된 장학기금을 통해 미대 재학생 4명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원한다. 진솔한 스토리를 듣고 싶었지만, 대부분의 기부자가 그렇듯 작가 또한 자신의 기부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지는 것을 극구 사양했다. 미술계에서도 유명할 정도로 ‘은둔형’이자 작업에만 집중하는 작가인 그가 이러한 자리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까? 4월 예정인 개인전 준비로 너무 바빠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완곡한(?) 거절이 답변으로 돌아왔다. ‘오치균 장학기금’을 설립하는데 함께 소중한 뜻을 함께한 부인 서양화가 이명숙씨를 만나 장학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2006년까지는 생계가 곤란할 정도였다. 화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조달할 정도였으니까. 2006년 이후 미술시장이 호황기에 접어들면서 여유가 생겼다. 작업에 매진해온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학교나 사회에서 받은 도움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여유가 생기자 사회에서 받은 도움을 환원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서울대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남편의 경우에는 작업에만 매진하는 상황에서 내가 참여해온 봉사단체 기부를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이 자신의 어려웠던 학창시절을 떠올리고 가정환경이 어려워 힘들어하는 학생에게 지원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던가. 여유가 생기자마자 서울대에 온라인으로 발전기금 1억원을 송금했다. 학교측과 사전협의는 없었다. 단지 ‘서울대 미술대학의 서양화과 학생에게 지원을 했으면 좋겠다’라는 소박한 바람만을 언급했다. 놀란 것은 학교였다. 학교에서 이 기금을 바탕으로 ‘오치균 장학기금’을 조성하고 미대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기부를 한 뒤에도 관여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알아서 하라고 이야기했다. 남편은 장학생 선발에 다소 관심을 보였지만, 내가 기부는 기부로 끝내는 것이 낫다고 설득해 없었던 일로 했다. 남편은 자신의 학창시절 어려움을 잘 아니까 멘토로서 후배들을 끌어주고 싶었지만, 오히려 이것이 참견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양화가 오치균 작가의 작품은 현재 한국 미술시장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손가락으로 짓눌러 바르는 두꺼운 물감의 임파스토 작품, 자신의 심상을 폭풍처럼 표현한 초기의 작품부터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빛이 감도는 풍경화까지, 그의 작품은 최근 침체기의 한국 미술시장에 많지 않은 활력소를 보여주는 예로 꼽힌다. 미대 재학시절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입학전까지 시골에서 본격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핸디캡, 미술작가는 작업과 작품으로만 이야기하면 된다는 ‘반항기’로 교수님들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이러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학창시절, 더욱 작업에 대한 매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유학도 돈을 많이 벌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뉴욕의 브루클린 컬리지 대학원에서도 장학금을 받았다. 이곳에서는 작업적으로 큰 성과를 얻었다. 눈을 떴다고 할까. 약간 반항적인 외모(웃음)가 한국에서는 약점이 되었다면 뉴욕에서는 환경, 비주류, 외모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오히려 개성이 되었다(웃음). 오직 능력과 실력이 최우선이었다는 점, 작업에 대한 자유로움은 예술적 능력을 만개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2000년대 초반 국내 미술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이후 기부를 생각하면서 작가에게 이 점이 신경이 쓰였다. 비록 학창 시절에는 경제적으로 힘들지만, 자신의 작업세계를 자유로이 우직하게 밀고 나갈 수 있는(조금은 반항적이라도), 제2, 제3의 오치균이 계속 나갈 수 있는 자그마한 종자돈이 되길 바란 것이다. 2007년 첫 기부를 시작한 이후로도 작가의 기부는 계속되었다. 미술시장이 침체기에 들어선 요 몇 년 동안에도 작가는 기회가 될 때마다 기부를 했다. 지난 해인 2012년에는 작품도 기증했다. <뉴욕>(1995), <사북 양철지붕>(1998), <감>(2010) 세 점이 바로 그 작품들이다.

“서울대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한 것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향유하고 감상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장학금이 몇 명의 학생에게 혜택이 간다면, 미술작품은 수많은 사람에게 예술적 경험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나눔의 차원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팔지 않고 보관해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을 기증한 것이라 그 의미가 우리에겐 더 크다는 생각이다.”

좀더 넓은 나눔까지 생각하는 오치균, 이명순 부부. 특히 이명순씨의 경우 기부 외에도 소외지역 어린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등 다양한 곳에서 재능기부를 할 정도다. ‘오치균 장학기금’의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작품 외에도 5억원의 기금을 조성하는 것이 현재 가장 큰 목표다. 장학금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이를 통해 학생들이 좀더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 장학기금을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며, 사랑을 주는 자그마한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크고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작은 칭찬과 격려가 작가로 하여금 또 다른 창작의 원동력이 되니까 말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는가.”

미술 칼럼니스트
류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