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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교육원에서 최고레벨 인증서받기까지

2008.04.23.

K군의 언어교육원 10년 서식기(棲息記)
최하 레벨에서 인증서 받기까지

학부, 석사, 박사과정을 포함한 내 대학생활 10년은 딱 둘로 나뉜다, 언어교육원을 간 날과 그렇지 않은 날. 10년 가운데 절반 이상의 아침은 언어교육원(이전 어학연구소 포함)에서 시작해왔기 때문에 언어교육원 신관(137-1동)의 출입문 하나는 내 수강료로 지어졌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는 CJ에서 출연했다지만…)

첫 인연은 1997년 여름방학에 시작되었다. 다들 유럽 배낭여행을 떠난다는 1학년 여름방학에 난 놀랍게도 계절수업을 6학점이나 신청했다. 방학 내내 서울을 떠날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어차피 망가진(?) 방학이라는 생각에 어학연구소의 아침 7시20분(주5회) 영어회화 수업을 신청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수강료도 학교 밖보다 저렴하며(당시 5주에 10만원), 교내라는 장소적 이점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때 학생들 대부분의 수강 이유도 비슷했다.

삼위일체: 가까운 위치ㆍ저렴한 가격ㆍ다양한 구성원

스스로를 ‘아일랜드에서 온 좌파 페미니스트 이혼녀’라고 밝힌 40대 중반의 Sheelagh Conway의 수업은 꽤 괜찮았다. 1학기 교양영어 수업의 Lab을 듣기평가 한 문제 차이로 면제받지 못 했고, 영어회화 배치 평가에서도 최하 레벨 5(당시에는 레벨 1이 최고, 레벨 5가 최저로 현재와는 정반대)에서 출발했던 나로서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또 학교에 그토록 다양한 연령대와 전공의 학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신선했다. 공대 박사 과정을 수료한 두 아이의 아버지부터 실험쥐 밥 주는 시간 때문에 항상 5분 먼저 자리를 뜨던 약대 석사과정 누나까지… 영어회화는 영어 뿐 아니라 ‘학교’를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학생들 일러스트Conway 선생님 추천으로 바로 레벨 3에 올라간 나는 무척 재밌게 아침 수업을 계속 들었다. 수업 내용도 좋고, 다른 학과 사람들을 만나는 게 즐겁기도 했지만, 한 학기라도 쉬면 다음 학기 등록이 어려운 탓도 있었다. 당시 등록은 기간 첫날 새벽부터 113호(안내실) 앞에 줄을 서는 선착순인데, 최소한 7시 반 전에 와야 원하는 강좌를 신청할 수 있을까, 말까했다. 당시 기다리는 줄은,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건물 1층을 돌아서 순환도로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평소보다 1시간 이른 8시쯤 출근하는 센스있는 조교는 몬주익의 황영조에 버금가는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건물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기존 수강생은 신청기간 전날 하루 동안 편하게 골라서 신청할 수 있었기에 웬만하면 연속해서 수강하는 게 좋았다.

2, 3학년 때는 월수금, 화목 강좌 두 개를 끊어서 주5일 내내 영어회화로 아침을 시작하는 도전을 했는데, 정말 영어가 부쩍 늘었다는 느낌과 함께 자신감이 생겼다. 비록 주말 동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지라도… 더불어서 영어회화 뿐 아니라 토플, 작문, 청취 등까지 수강해 보았는데, 잠깐 강의하시다가 떠나신 Judy Baek 선생님의 토플 강의는 가히 압권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인 강사들이 연구원이라 교수풍의 강의를 하는 반면 이 선생님은 사설 학원 스타일의 수업으로 학생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

2000년, 순탄하게 보내던 언어교육원 생활에 위기가 찾아왔다. 4학년이라는 개인적인 상황도 문제였지만, 학교의 교양영어 수업이 실용회화 위주의 대학/고급영어 체제로 전환되면서 언어교육원의 괜찮은(?) 원어민 선생님들이 대거 학교 정규수업으로 이동을 했다. 언어교육원에 새로 부임하는 선생님들도 들을 만하다 싶으면 6개월 안에 대학/고급영어 강사로 옮겨갔다. 전문가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선생님들의 강의 능력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당시 나와 함께 고정 수강생이었던 몇 명의 반응은 비슷했고, 개강 첫 날에도 15명이 안 되는 수업들이 늘어갔다.

3분 지각이 가른 희비: 원칙주의자 Kerry 선생님

5분 지각한 학생 일러스트이런 상황이 2년 넘게 계속되었고, 그러던 중 최고의 위기와 반전이 찾아왔다. Kerry 선생님과의 만남이었다. 남편이 미8군의 군무원이라는 그녀는 전형적인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로 수업 시작 후 5분이 지나면 강의실 문을 잠그는, 보수적인 원리원칙주의자였다. 이런 Kerry 선생님이 관성으로 수업에 들어오던 나를 좋게 봤을 리 없었다. 사건은 그 학기가 끝나가던 무렵, 승급 인터뷰 대상자를 정할 때 벌어졌다. 그녀가 난 인터뷰를 볼 수 없다고 했다, 출석률이 66%여서… 그것도 결석이 아니라 지각 2회를 1회 결석으로 계산한 결과였다. 당시에는 70% 이상 출석해야 인터뷰를 볼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사실상 유명무실해서 대충 낯익은 수강생들은 선생님들 권한으로 인터뷰를 볼 수 있던 때였다. 결석도 아닌 지각까지 포함해서, 게다가 아침 7시20분 수업에 2-3분 늦은 걸 문제를 삼은 것이었다. 다소 화가 났지만, Kerry의 지적은 정확했고 어차피 레벨 1에서 인터뷰를 통과해 인증서를 받을 만큼의 실력도 아니었기에 잠자코 넘어갔다.

하지만 상처난 자존심은 시간이 갈수록 아파왔다. 결국 바로 다음 학기에 난 다시 Kerry의 강좌를 신청했다. 7시20분 수업이지만, 7시에 도착해서 커피를 마시면서 잠깐이라도 예습을 하고 들어갔다. 선거로 임시공휴일에 있었던 강의에도, 언어교육원 사정으로 보강이 잡힌 날에도 어김없이 정시에 출석해서 최대한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8주, 24번의 내 출석은 단 1분의 지각도 없이 완벽했다. 마지막 날 그녀가 내게 한 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여기서 너 같은 출석률은 처음이다, 이제 시작 5분 후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되겠다.” (물론 그 후에도 그녀는 계속 문을 잠갔다고 하지만…)

이후 난 두세번 더 레벨1 수업을 듣고, 인터뷰에 도전해서 인증서를 받았다. 나만큼이나 오래 언어교육원에서 TA 일을 하던 서어서문학과 대학원생이 “드디어 받았군요. 축하해요.”라는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 최하 레벨5에서 출발한 지 7년 만이었다. 그동안 학부 신입생이었던 내 신분은 대학원 박사과정으로, 어학연구소는 건물과 프로그램이 모두 늘어난 언어교육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은 단 한 번에 가능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로서는 꽤 뿌듯하고 보람 있는 작은 ‘성취’였다.

4년이 지난 지금도 일주일의 사흘은 언어교육원에서 시작한다. 여전히 언어교육원 주변을 맴도는 이유는 은근과 끈기가 받는 보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어학’ 뿐 아니라 ‘학교’를 배웠기에 나도 후배들에게 그 역할을 조금이나마 하고 싶다. 언어교육원에서 난 나름대로는 Step By Step의 Legend이니까…

2008. 4. 23
서울대학교 홍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