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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여성 과학자들에게

2010.07.16.

후배 여성 과학자들에게 김영중 교수(약학과)와 학생들 사진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야트막한 산자락에 자리한 서울대학 부속 약초원은 1996년 조성 당시부터 지금까지 내가 끝없는 애정과 관심을 담아 가꾸고 조성한 곳이다. 약초원은 커녕 변변한 식물원조차 찾기 힘들었던 시절, 아무도 돌보지 않아 잡초만 무성한 국유지를 찾아 서울대학교로 가져와 어렵게 구한 우리나라의 약용식물들을 심고 길러 오늘날의 약초원을 만들었다. 나는 지금도 힘들고 지칠 때면 구석구석 나의 땀이 맺혀 있어 더욱 정겹고 애착이 가는 이 곳에서 잡초를 뽑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달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힘이 다시 솟아나기 때문이다. 현재 약초원에는 신약으로 개발되기를 기다리는 약용식물 약 1300 여 종이 자라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어려움으로 주저 앉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어릴 적에 잔병 치레를 많이 하여 나처럼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체력적으로 의대 공부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집안의 우려로 그 대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약대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도 몸이 약해 졸업여행에서 혼자 빠졌는데, 마침 졸업여행 기간 동안 문교부에서 시행하는 유학생 선발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고 이 것이 단초가 되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말이 좋아 유학생활이지 기숙사와 연구실을 쳇바퀴처럼 맴돌며 젊음을 바쳤다. 늘 병약했던 나는 외로움에 지치면서도 유학 2년 동안 감기 한번 앓지 않고 그 시간을 버텼다. 정신력으로 버티면 못 할 것이 없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다.

서울대 교수가 된 이후에는 더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연구시설이나 연구비 지원이 너무 열악해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기 어려웠다. 나는 방학 때마다 사비를 털어 미국으로 가서, 1년 중 8개월은 교수생활을 하고 4개월은 미국 대학의 무급 연구원이 되는 이중 생활을 10년 동안 계속했다. 당시에는 연구에 필요한 시약을 국내에서 구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미국 교수들에게 부탁하여 연구에 필요한 시약과 물품을 얻어 이민 가방에 꾹꾹 눌러 담아 가지고 돌아왔다. 김포 세관에서는 무균 처리된 시약과 물품들을 일일이 뜯어 확인하려고 했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시약을 모두 뜯어 그대로 버려야만 했다. 여성 교수에 대한 신뢰가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여성을 교수로 뽑았더니 연구도 제대로 못하더라”는 말이 나오면 여성 후배들의 앞길이 막힌다는 생각에 나 자신에게 더 엄격해야만 했다. 늦게 본 아들이 내가 집을 비울 때면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면서 내 옷을 껴안고 잠들었다는 말에 가슴이 미어지는 날들이었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약학대학은 대학원생의 상당 수가 여성이다. 나 역시 그랬지만 그 중에는 기혼 여성이 많아 육아가 늘 어려운 문제로 대두된다. 하지만 나는 “일에 대한 끈기와 자식에 대한 사랑을 조율해 나가다 보면 어느덧 꼬인 실타래가 풀려 나가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힘들어도 환경을 탓하지 말고 내디딘 길을 헤쳐나가야 한다” 라고 원론적인 말만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많이 나아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성 연구원들의 연구 환경이 조금씩은 더 나아질 것이다 라고 말한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긍정적인 자세로 자신의 꿈을 펼치길 바랄 뿐이다.

김영중 교수는 1978년 서울대 약학대 교수로 부임했고, 30여 년간 서울대 약초원장으로서 약초원을 운영하면서 국내 자생식물의 활용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1999년부터 5년간은 미국 국립보건원의 지원금으로 연구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 서울대 여교수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자상', '로레알 여성생명과학상' 등 여러 상을 수상했으며, 국내외 150여 편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2010. 7. 16
* 위 글은 '한국문화재단'이 2006년 발행한 <과학기술인! 우리들의 자랑: 한국의 대표 과학기술자 47인이 전하는 과학자의 길>에 기고한 글을 저자가 편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