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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동 캠퍼스 회상

2010.11.22.

1963년의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 정문, '미라보 다리'로 '세느강'을 건너 캠퍼스에 들어 오면 마로니에 나무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동숭동 캠퍼스 회상

내가 대학캠퍼스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은 1965년 봄이었다. 서울대학교에 문리과(文理科) 대학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 서울대학교 본부(本部)는 문리과대학과 함께 동숭동(東崇洞)에 자리잡고 있었고 각 단과대학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합격자 발표는 벽에 기다란 방이 걸려서 발돋움하고 목을 늘려 보고 또 보고 하였다.혜화동과 이화동을 잇는 동숭로는 예전에 문리과대학 쪽으로 ‘세느강’이라 불리우던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정문을 통과하려면 정문 앞 다리를 건너야 했다. 아마도 그 때 그 다리를 '미라보 다리' 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혹독한 대학별 본고사로 학생을 선발하였고 우리는 어쩐 일인지 서울대가 아닌 성균관대학에서 서울대 본고사를 치루었다. 얼마 후 합격자 발표는 서울대 정문앞 벽에 명필 붓글씨로 기다란 방(榜)이 걸려서 수 많은 인파가 '세느강 미라보 다리' 위에 몰려 발돋움하고 목을 늘려 그 방을 보고 또 보고 하였다.

문리대 캠퍼스에 심어 놓은 많은 나무들 중에서 유난히 생각나는 나무는 모두 세 가지이다. 봄이면 ‘세느강변'을 장식하던 노란 개나리꽃, 가을이면 본부건물 맞은쪽에 있던 중앙도서관 옆의 오래된 은행나무의 노란 잎, 나무에 남아 있으면 바라보기 좋았고 땅에 소복이 떨어지면 그 위에서 딩굴며 놀기도 좋았었다. 캠퍼스 중앙부에는 정문을 바라보고 있던 대학원 건물이 있었고 (지금관악캠퍼스에는 ‘대학원’이라는 건물이 없다.) 그 앞으로 마로니에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미라보 다리로 세느강을 건너 캠퍼스에 들어 오면 마로니에 나무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대학원 좌측에 본부 건물이, 우측에 도서관이, 그리고 도서관 앞에 4.19 기념탑이 있었다. 기념탑은 공대 쪽 호젓한 곳으로 옮겨졌으나 그 후 학생들의 강력한 요구로 현 위치로 재배치되었다.

대학원 좌측에 본부 건물이, 우측에 도서관이, 그리고 도서관 앞에 4.19 기념탑이 있었다. 이 기념탑은 관악캠퍼스의 공대 쪽 호젓한 곳으로 옮겨졌으나 그 후 학생들의 강력한 요구로 현 위치로 다시 재배치되었다.

문리과대학의 오월 축제인 '학림제(學林祭)'가 열리면 캠퍼스는 쌍쌍파티, 음악회, 막걸리마시기 대회 등으로 문리대 학생들은 물론이고 초청된 타 대학생까지 어우러져 온통 북적거렸다. 지금 보면 좀 퇴폐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는 아직 광주의 오월항쟁이 있기 전이었다.

중앙도서관에는 위세 당당한 명물 수위아저씨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도서관 안에서 혹시 떠들기라도 하면 가차없이 축출당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당시에는 복사기가 아직 없던 시절이라 책이나 학술지의 필요한 부분은 맹렬한 속도로 필사해야 했었다. 도서관 건물 뒤쪽에 간이식당이 있어 가끔 들려 국수를 사먹거나 추운 날에는 따뜻한 국물을 얻어 도시락과 함께 먹고는 하였다.

학림제 시화전을 감상하는 학생들. 오월 축제인 '학림제'가 열리면 캠퍼스는 쌍쌍파티, 음악회, 막걸리마시기 대회 등으로 온통 북적거렸다.

도서관 넘어 뒤편으로 운동장이 있어 졸업식과 입학식이 그 곳에서 열렸다. 운동장의 세느강쪽 한 편에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 당시에는 말랑말랑한 공을 라케트의 한쪽면으로만 치는 '정구’와 막 도입된 테니스를 함께하였다. 초창기 국산 테니스 라케트의 질이 낮아 얼마 지나면 프레임이 휘어버리곤 하였다. 넓은 운동장에서는 비공식적인 3과(수학, 물리, 화학) 체육대회가 곧 잘 열리곤 하였다. 방과 후(?)에 각 과의 선수(?)들이 모여 야구, 배구, 축구, 농구 등을 열심히 하였고 각 과의 여학생들의 수줍은 응원전도 볼만하였다.

강의의 대부분은 문리대와 그 옆의 옛 중앙공업연구소 부지 사이의 명물 구름다리를 넘어 법대로 가기 전인 공업연구소 부지 내의 허름한 목조 건물의 강의실에서 진행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요란한 ‘요비링’ 소리와 함께 강의실에서 쏟아져 나온 학생들이 복도의 마루바닥을 지나가는 소리가 천둥치는 소리 같아 늦게 끝나는 강의를 치명적으로 방해하곤 하였다. 필수교양과목 중 내가들었던 ‘대학영어’는 영문과의 송욱 교수님이 가르쳐 주셨다. 일간지에 서슬이 시퍼런 칼날과도 같은 비판의 시론을 거침없이 발표하시던 교수님께서 영어수업시간에 영어로 된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을 우리말로 엄숙하게 번역해 주시곤 하였다. 당시에 우리가 들었던 교양강의의 진행은 매우 인간적(?)이었다. ‘개강은 천천히, 종강은 신속히, 그리고 휴강은 넉넉히…’의 삼박자가 어우러져 젊은 우리는 캠퍼스 밖의 당구장, 다방, 영화관을 애용하곤 하였다.

운동장에서는 비공식 체육대회가 곧잘 열렸고 여학생들의 수줍은 응원도 볼 만하였다.

화학과는 옛 중앙공업연구소 부지의 허름한 옛 목조건물 몇 동에 나뉘어 있었다. 특히 화학실험실의 형편은 극악한 상태였다. 비가 새고, 각종 독가스를 분리 배출하는 장치도 없었고 난방은 실험실 한 가운데 난로뿐이었다. 그래도 참 열심히들 하였다. 일주일에 며칠씩 밤을 새워가며 악조건 하에서도 부지런히 실험을 하였고 뿌듯한 성취감을 맛보기도 하였다. 1967년에 드디어 운동장한 쪽에 과학관을 신축하여 이사를 하였고 우리는 천국에 입성한 듯 환호작약하였다.

문리대 캠퍼스 주변의 명물 다방 두 곳. 정문 건너편 우측으로 1층의 '학림다방' 좌측으로 한참 가서 옛 공업연구소 건너편 건물의 2층에 있던 '낙산다방'. 학림다방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님들이 자주 찾으셨고 비교적 문과쪽 사람들이 더 많이 애용했던 것 같다. 낙산다방은 화학과 학생들의 단골이었고 계란 노른자위를 넣은 커피(일명, 모닝 커피)와 정체불명의 위스키를 약간 넣은 홍차(일명, 위티)를 즐겨 마시곤 하였다.

싸온 도시락을 들고 들어가

또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캠퍼스 주변의 명물 ‘春’자 돌림의 중국집 두 곳, 우측 건너편의 “진아춘(進雅春)”, 좌측 옛 공업연구소 건너편의 “공락춘(共樂春)”. 겨울에 공락춘에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들고 들어가 떡 버티고 앉아 “짬뽕 국물이요…” 하고 외쳐도 마음씨 좋은 주인은 전혀 인상을 쓰지 않고 따끈한 짬뽕국물만 가져다 주었고 우리는 매우 저렴한 국물값만 내고 행복한 점심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어쩌다 입주 가정교사를 하는 친구의 주머니가 좀 여유가 있으면 기세 좋게 “짬뽕국물과…야끼만두 한 접시요…”를 부르짖었다. 그 날은 마치 우리의 생일이나 된 듯 하였다.

관악캠퍼스로 통합 이전한지 어언 34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형체도 없어지고 비석만 남아 있는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를 그리워하며 회상하는 자들은 분명 구제불능의 보수골통이리라.

그래도 그들은 그곳에서 낭만을 즐기고 열정을 불태웠으며, 오늘을 위한 초석(礎石)을 쌓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했다는 긍지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어쩌다 동숭동에 들려 문리대 캠퍼스 자리를 돌아보면 고려 말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의 시조가 생각난다. “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煙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 화학부 신국조 교수가 <자연대 이야기>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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