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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을 그리다

2010.12.28.

서울의 삶을 그리다. Painting the Seoul Experience, 글: 요르그미하엘 도스탈 교수(행정대학원)

서울의 삶을 그리다

"서울에서 사는 게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유럽이나 북미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많이 받는다. 이럴 때 나는 서울을 그들이 잘 알 법한 다른 장소들과 비교하는 식으로 성의 없게 답변할 수도 있다. 예컨대, 서울은 홍콩보다 덜 붐비고, 싱가폴보다 덜 영미화되어 있고, 도쿄보다 덜 비싸다고. 하지만 이건 제대로 된 답이 아닐 것이다.
실로 서울을 제대로 정의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서울은 장소와 경험과 분위기를 철마다, 그리고 단 하루 안에서도 다양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서울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 결정적인 유일한 요소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서울의 시간"은 어떠한가? 우선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초조함을 달고 사는 사람 같다. 서울 사람들은 항상 스트레스 받고 지쳐있는 것을 공적인 의무로 여기는 듯 보인다. 먼 거리를 통근하고, 오랜 시간 근무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주는 스트레스를 생각한다면 그들이 그렇게 느낄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서울의 거주자들은 스트레스의 피해자이기만 하지는 않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스트레스를 삶 속으로 초청하려는 듯하다. 사람들이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은 일상적이다. 나는 서울대에서 나를 스쳐 지나가는 여학생이 책을 읽으며, 한 손에는 음료를 들고, 동시에 전화를 받으며 가는 것을 보았다. 손은 둘인데, 하고 있는 일은 셋이라니. 아마도 그녀는 핸드폰 너머로 자기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처럼, 서울 사람들은 멀티태스킹을 통해 시간을 절약하고자 고군분투하지만 서울에서의 하루하루는 할 일을 다 해내기에는 야속하게도 너무 짧다. 오늘하지 못한 것들을 마저 끝내기 위해서는 내일이 필요하다. 이렇게 계절은 지나간다. 매 해는 다분히 짧게 느껴지며, 매년 작년보다 올해가 더 짧다.
대도시와 ‘시간부족’ 간의 연관성은 대도시에서의 삶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다. 하지만 서울은 내가 아는 모든 대도시보다 한 박자 더 빠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서울에서의 삶을 외부인에게 소개 할 것인가? 언어는 이러한 경험을 전달하기에 충분하기 않다. 나는 한 예술 작품에서 그 답을 찾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을지로 순환선"이라는 최호철의 명작에서 나는 한국의 수도, 서울의 삶을 가장 잘 집약시켜 놓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왜 이 작품이 서울의 영혼을 가장 잘 포착하는지를 논하려고 한다.

움직이는 서울

최호철 作, <을지로 순환선>,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을지로 순환선"의 소재는 서울의 지하철과 그 승객들이다. 이 그림은 지하철 객실 내부와 객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을 담아낸다. 그림의 중앙에는 7명의 인물이 있다. 좌측부터 살펴보면, 먼저 우리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를 한, 술에 취한 중년 남자를 만난다. 그는 대도시에서 힘든 삶의 사는 사람들을 표상하듯, 피곤하고 지쳐 보인다. 이 중년 남자의 옆에 두 숙녀가 앉아 있다. 첫 번째 숙녀는 날씬하고 잘 차려 입었으며 작은 핸드백을 하나 들고 있는 반면에, 그 옆의 두 번째 숙녀는 퉁퉁하고, 추레한 행색에 좀 더 큰 가방을 들고 있다. 마른 여성은 취객 옆에 앉는 것이 신경 쓰이는 듯 보이지만, 그 옆의 여성은 그 날의 고된 노동으로 인한 피로 때문인지 지쳐 보인다. 오른 편에는 나이든 신사가 신문을 읽고 있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은 회색이다. 정장도, 신발도, 신문도, 피부도, 머리카락도 회색이다. 그는 신문 뒤에 자신을 숨긴 채 자신의 주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옆에는 한 소년이 헤드폰을 통해 음악을 들으며 교과서일 것 같은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 엄마와 그녀의 딸을 만난다. 그들은 옷맵시가 단정하고, 엄마는 장바구니를 들고 있다.
전면에 보이는 이들 뒤에 배경 속의 승객들이 있다. 정장을 입은 회사원, 웃고 있는 십대, 유니폼을 입은 마른 보안 요원, 두 명의 졸고 있는 사무원, 아줌마 한 사람과 아이를 동반한 커플, 그리고 아마도 화가 자신일 것 같은 다른 승객들을 관찰하는 표정의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나이든 학생까지. 표면적으로 보면, 최호철의 그림은 현실적이지 않다. 인물들은 만화나 캐리커쳐 같은 느낌을 풍긴다. 여기서 우리가 만나는 인물들은 우리가 서울 지하철을 타면 언제든지 만날 법한 인물들의 원형이다.
그런데 그림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이 그림이 쾌활한 그림이라고 말하기가 점 점 더 어려워진다. 이 그림은 우리가 지하철 속에서 서로 어울리게 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 비판의 한 예일까? 후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그림 속의 사람들이 모두 매우 지쳐있다는 점이다. 마치 우리가 통근시간 지하철을 탈 때처럼 말이다.

작품의 오른쪽 (부분)

나는 이 그림이 정말 만화와 같이 재밌고 유쾌한 의도를 가진 그림인지 아니면 사회적 비판을 의도한 그림인지 궁금했다. 정답은 그림 속에 있다. 그림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지하철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전경이 바로 그것이다. 왼편에는 회색건물들만 자리를 채우고 있다. 큰 회사건물에 있는 세 개의 창을 통해서 세 개의 다른 사무실의 장면이 비춰진다. 첫 번째 사무실에서는 화이트 칼라 직원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있고, 두 번째 사무실에서는 블루 칼라 직원들이 감독관에 의해서 지시를 받고 있고, 세 번째 사무실에서는 기획 및 감독업무를 맡고 있는 듯한 사람들이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든 직원들이 하나같이 아무런 개인적인 특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무실의 환경은 그들의 개성을 박탈하고 그들을 서로 다른 유형의 '산업 역군'으로 전환시켰다.
그림의 오른쪽을 보면 화가가 비판적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전원마을과 같은 환경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배경의 가장 작게 묘사된 사람까지도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사람들의 표정과 감정이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어있고, 집에서든 가게에서든 길거리에서든 서로 자유롭게 어울린다. 각 세대의 자녀들은 거리에서 행복하게 뛰어놀고 그 부모들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화가는 전통적인 옛 마을의 과거에 대한 인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현실보다는 민담의 동화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은 이러한 모습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아니 지금 이 순간에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림의 전반적인 배경에서 불도저와 노동자들이 전원마을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현대식 주상복합 건물을 건설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사무실과 아파트로 가득 찬 현대적 서울이 우리의 개성과 자유를 앗아간다는 비관적인 관점을 나타낸 것일까?

도시적 경험의 본질

그림 속에서 우리는 지하철 내부의 모습과 승객들, 그리고 지하철이 누비는 도시의 전경을 볼 수 있다. 화가는 낮 시간에 순환선의 북서쪽을 누비는 2호선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주의 미술과는 거리가 있다. 그림에서 나타나는 도시의 전경은 국회의사당이나 방송기지와 같이 실재하는 건물들을 그리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의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미술양식으로 여러 풍경을 섞어 놓은 것이다. 그 결과 도시의 면면을 담아놓은 콜라주가 만들어진다. 이 그림의 공간적 관점 또한 현실적이지 않다. 역차 객실은 단단한 구조라기보다는 비눗방울 같다. 이건 지하철일까 아니면 도시의 과거를 창밖으로 보여주는 타임머신일까?
그림의 오른편 -버려진 공장과 마을- 을 서울의 과거의 모습, 즉 일을 하기위해 시골에서 갓 상경한 사람들이 그들의 마을 문화를 가져왔던 시절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속에서 과거를 볼 수 있는지는 그림이 던지고자하는 질문의 핵심이 아니다. 그림의 초점은 현재의 동적 에너지다. 이 그림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작가의 의도는 우리를 헷갈리게 만들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그림의 무엇도, 첫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다. 대신 시간과 공간이 그 전통적 의미를 잃어버린 마법적 현실로 제시된다. ‘을지로 순환선’은 현실의 풍자도 ‘단순한 그림’도 아니다. 이 그림은 오래 바라볼수록 그 의미를 해석하기가 어렵다.

쾌활한 사회 비판

이 그림은 최소한 두 가지 의미에서 예술적 명작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이 그림은 보는 사람이 무엇이 진짜인가를 판단하기 어려운 서울의 마법적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림은 우리의 시공간적 인식에 의문을 품게 하고, 하나의 일 이후에 다른 일이 일어나는 연대기적 역사에 대해서도 물음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혼동에 빠진다. 이 그림은 모던한 서울과 그 역동성을 찬양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개발의 부정적 측면들이 우리의 일반적 인간성을 파괴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를 그려내고 있는 것일까?
둘째, 작가는 우리 스스로가 '발전'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그림은 과거의 삶의 방식이 파괴되는 것을 그리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림 오른편의 전통적 마을은 그림이 암시하듯 불도저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그림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는 초고층 아파트의 새로운 서울은 또 하나의 '바벨탑'이 건설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림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우리는 작가가 오늘의 서울에 대해 그리 열광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중앙에 있는 지하철 열차안의 광고들은 풍자적이며 소비 자본주의를 희화화-여성 화장품 광고 속에 등장하는 웃음짓고 있는 여우처럼-하고 있다. 그림의 사소한 디테일들도 풍자적 유머로 가득 차 있다.
최호철의 그림이 의도하고자 하는 것은 쾌활한 사회 비판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겠다. 그는 우리의 시간을 모두 빼앗고 동시에 우리가 통제는 할 수 없는 법칙들에 이끌려 삶을 살게 만드는 끝없는 노동과 끝없는 소비의 사회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서울에 대한 그의 비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 그림 가운데에 있는 어린아이의 미소와 이 그림을 가득 채우고 있는 풍자적인 유머는 작가가 쾌활하며 즐겁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과 이 도시의 리듬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영원한 시간 부족 현상 - 삶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버리는 것 - 은 도시적 경험의 한 단면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서울은 기계적 지배에 대항하는 인간적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계속하여 희망을 줄 것이다. 최호철은 도시적 경험의 부정적 단면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우리가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주고 있다. 이 쾌활함과 그의 사회적 비판의 경쾌한 터치가 그의 그림을 명작으로서 두드러지게 한다.

번역: 최나은 (SNU English Editor)
* 위 글의 일부가 매일경제 2010년 9월 3일자에 게재되었습니다.
* 삽입된 작품은 작가의 동의에 의해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