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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절을 보듬는 나눔의 빛

2010.08.04.

어두운 시절을 보듬는 나눔의 빛, 간호학과 동문(52학번) 김정희 여사 사진

‘끈기는 그 목적 달성에 실패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괴테의 말처럼 작은 노력도 오래 지속하면 큰 힘을 지닌다. 빠른 성장만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에 꾸준함이 어떤 가치를 이뤄 내는지 보여 준 나눔의 미담을 만난다.

지난 4월 1일, 서울대학교 간호대학 재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1억 원을 쾌척한 김정희 여사. 간호학과 52학번인 그의 장학금 희사가 여느 기부와 달리 눈길을 끄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내로라하는 사업가도 아니고 흔히 말하는 거부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름을 내세우기 위한 공명심 때문에 ‘기부’라는 절차를 거치겠다는 생각은 꿈조차 꿔보지 못한 그런 사람이다.

2남1녀를 둔 어머니로서 또 아내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온 그다. 물론 전업주부는 아니었다. 졸업 이후 줄곧 간호사로서 살았고, 보건소에서 차분한 정년을 맞았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그런 그가 14년 동안 모은 알토란 같은 돈을 기부한 것이다. 수십억, 수백억 원을 기부하는 일도 적지 않으니 그의 장학금이 적어 보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말이 쉽지, 우리가 이름 모를 누군가를 위해서 선뜻 주머니를 여는 일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더군다나 살림을 책임지는 주부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연유로 십수 년을 모은 적금을 타자마자 모교를 찾아 장학금을 낸 것일까?

김정희 여사 사진가장 먼저 생각난 모교
“고등학교 때 학비를 못 내 중간고사를 치를 수 없었어요. 그 설움을 어떻게 말로 다하겠어요. 아마 그런 기억 때문이지 싶어요.” 친지의 도움으로 간신히 학비를 냈건만 시험을 앞두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전쟁을 실감하기보다는 시험도 못 치르고 등록금도 돌려받지 못할 지경이 돼서 마냥 울었다는 김정희 여사. 그가 전쟁의 와중에도 학구열을 불태우며 간호학을 전공한 데에도 사정이 있었다. 교사의 꿈을 꾸던 소녀가 난데없이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건 너나없이 곤궁하던 ‘시절’ 때문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전쟁 통에는 교사보다 간호부가 더 필요한 직업이고,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러 번 강조하셨죠. 거기다가 사범학교에는 없던 기숙사가 간호학교에는 있었어요. 차비 한 푼도 아쉽던 시절이라 간호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던 겁니다.” 너나없이 곤궁하던 시절, 소녀의 꿈은 그렇게 바뀌었다. 하지만 간호사가 되는 길이 평탄했던 건 아니다.

“제 고향이 평양인데, 당시 이북에서는 간호부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어요. 당연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셨죠. 하지만 동생들 키우면서 가사나 돕고 살기는 싫었어요. 공부를 해서 저만의 삶을 살겠다는 생각이 강했죠.”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에도 다녔다는 그는 자그마한 체구지만 당찬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갖게 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다름 아닌 저축이었다. 당시만 해도 부녀자들 사이엔 ‘계’라는 것이 유행했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계라는 걸 해 본적이 없단다. “계라는 것이 잘 깨져서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저축에 매달렸던 것 같아요. 적금이란게 처음 생겼을 때부터 은행에 계시던 친척을 찾아가서 저축을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렇게 한푼 두푼 모으는 습관이 든 건,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를 싫어하는 그의 천성 때문이었다. 그런 그는군인인 부군을 만나 근검절약하며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았다. “환갑을 치르고 96년 12월에 정년퇴직을 하게 됐는데, 마침 그때 신탁적금을 들 기회가 생겼어요. 나중에 어디에 쓰겠다는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저 저축하는 습관 때문에 들었던 거죠. 돈이 부족할 땐 남편이 대신 넣어주기도 했어요.”

특별할 건 없지만 남부러울 것도 없이 살던 그에게 가슴 아픈 일이 생기고 말았다. 지난 99년 12월, 여행도 함께 다니며 은퇴생활을 즐기려 했던 부군이 2년여의 병치레 끝에 그만 병상에서 그의 곁을 떠난 것이다. 반려자를 잃은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지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남편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생겼다. 부군과 함께 붓던 적금의 만기일이 돌아온 것이다. 지난 2003년 그의 앞에는 5천만 원이라는 돈이 놓였다. 자녀들은 이미 장성해서 출가까지 한 상태라 딱히 목돈 들 일이 없었던 그는 그 돈을 다시 7년짜리 적금에 묻었다.

“따져보니 만기가 돼도 1억 원이 안 됩디다. 해서 얼마를 더 보태서 1억 원을 만들기로 작정했어요. 물론 그때까지도 그 돈을 어디에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어디에 쓰게 되던 쓸 일이 있겠지 싶어 그냥 은행에 넣어두었어요.”

2010년 3월 28일, 그가 “만기일만 기억하고 있었지, 돈이 있다는 생각조차 한 적 없이 잊어버리고 살았던” 1억원이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이 모교였다. “어릴 적에 돈이 없어 학교에서 설움 받았던 기억이 났던 모양이에요. 공부는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안 되잖아요.”

후배를 돕는 선배의 장학금
적금 만기가 되기 직전 2010년 간호대학 신년하례식에 참석한 그는 기부 의사를 밝혔고, 그렇게 ‘김정희 장학금’이 만들어진 것이다. “오랜만에 학교에 갔는데, 유난히 친절한 분이 반겨주시더라고요. 학장이라고 밝히지도 않아서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송미순 학장이셨지 뭡니까. 이장무 총장님도 얼마나 진심으로 대해주시던지 지금도 그 분들 생각하면 그냥 기분이 좋아져요.”

사람은 나쁜 일을 하면 티가 나고, 좋은 일을 하면 생색을 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생색은커녕 오랜만에 학교에서 만났던 분들이 친절해서 기분이 좋았다는 얘기만 했다. 장학금을 전달하러 갈 때도 전철을 탈 생각이었다는 그는 55년 전 흑백사진 몇 장을 들고 회상에 잠겼다.

“여기가 어딘 줄 알아요? 서울대병원 본관 앞이에요. 우리 동기생이 한 50명쯤 되었는데…. 이이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떴어요. 그리고 이이랑은 병원에 있던 탁구대에서 같이 탁구도 치고 그랬는데…. 아 참, 제 동기생 중에 김영삼 대통령 초등학교 동창생이 있어서, 스물여섯에 국회의원 후보로 나왔다고 같이 얘기하던 기억도 나네요.”

자신의 장학금을 받을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부탁이랄 게 뭐 있겠어요. 그냥 공부 열심히 하면되지 뭐.” 자신의 삶을 부끄럽지 않게 잘 이끌어온 선배가 후배들에게 따로 남길 말이 굳이 필요하겠는가. 그의 삶 자체가 큰 울림을 가진 교훈일 터이니 말이다.

글 최태원 사진 박재홍

<출처: SNU Noblesse Oblige volume.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