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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세계로 가는 길을 만들다

2012.02.15.

손장순 작가 ‘손장순 문학연구기금’ 기부

손장순 작가“장학금 지원이 적은 인문학 분야에 대규모 학술기금이 설립됐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시대를 대표하는 여류 소설가로서 누구보다도 우리 문학에 애정을 갖고 있는 손장순 작가는 우리 문학의 발전, 특히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초점을 맞춰 기금의 쓰임을 조율했다.”

인생 70을 넘기면 사사로움에 연연하지 않는 덕이 쌓이는 것일까? 서울대학교에 20억 원의 장학기금을 조성한 소설가 손장순 작가(76)는 그 공을 되묻는 이들에게 그저 담백한 언어로 화답한다. 좋은 일이니 당연히 긍정적 마음으로 했을 뿐, 이것이 전부다. 요란스러울 법한 일도 조용히 갈무리하는 그녀의 눈높이는 단지 우리 문학의 발전과 사회에 대한 나눔에 맞춰져 있었다.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꿈꾸다
원로 소설가 손장순 작가(불문학과 ‘54)는 지난 8월 서울대학교와 ‘손장순 문학연구기금’ 협약을 맺고 20억 원을 기탁했다. 오랜 시간 염두에 둔 장학금 기부지만 20억 원을 모두 입금할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알리길 꺼려했다. 혹 문단이나 주변에서 섭섭해 할까 염려한 탓이다.

손장순 작가의 문학연구기금은 거액의 규모도 규모이지만, 장학금 지원이 적은 인문학 분야에 대규모 학술기금이 설립됐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시대를 대표하는 여류 소설가로서 누구보다도 우리 문학에 애정을 갖고 있는 손장순 작가는 우리 문학의 발전, 특히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초점을 맞춰 기금의 쓰임을 조율했다.

“일단 1년에 3명, 영어, 불어, 독어권 국가의 박사나 교수급으로 한국 문학을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들을 1년 동안 지원할 계획입니다. 이후 우리 문학을 번역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1년의 펠로우십 기한을 더 주고요. 당장 내년 2학기부터 펠로우십 연구비 지급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더불어 우리나라 작가들과 세계 각국의 문인들이 교류할 수 있는 국제포럼도 열기로 했습니다.”

프랑스 정부에서 매년 1명에게 주는 교수장학금으로 불문학을 더욱 깊게 연구한 바 있는 그녀에게 외국인을 위한 한국 문학 연구 장학기금 조성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손장순 작가는 1980년대부터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대한 관심을 높여왔다.

“1981년 스톡홀름대학과 나폴리대학에서 우리 현대 소설을 알리는 주제 발표를 한 적이 있어요. 1984년에는 세계 각국의 시인과 소설가들을 초청, 창작과 교류의 기회를 제공하는 미국 아이오와대 국제창작프로그램(International Writing Program·IWP)에 참가해 ‘동과 서의 만남’이란 주제로 한국 전통과 서구 문명과의 혼재에 대해 영어로 발표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 문학은 세계화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장순 문학연구기금’은 우리 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계 문학의 변방에 있는 한국 문학. 그 안타까움을 누구보다도 크게 느끼기에 언제가 우리 문학도 해외 서가의 한쪽을 당당히 차지하기를 꿈꿔본다. 문학 기금을 통한 펠로우십 연구가 국문학 번역의 활성화로 이어지길 바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0억 기금은 13년 고독의 대가
문학인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고단하다. 서울대학교 인문학계에 대한 기부자가 처음이라는 사실은 자부심이 아니라 안타까움이 먼저다. 여유가 없는 작가들의 삶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현금 20억 원 출연은 더욱 의미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유가 있어 기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참 알뜰하게 살아왔어요. 서른에 첫 남편과 이혼 후 위자료도 받지 못하고 셋방살이를 시작했거든요. 그 기간 동안 《한국인》과 《세화의 성》을 써, 《한국인》 인세로 땅을 사고 《세화의 성》 인세로 건물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으니 솔직히 이 20억은 13년 동안의 제 고독의 대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도 가난했던 시절의 의욕이 늘 그리워요.”

힘들었던 시절의 치열함과 업적을 ‘고독의 대가’로 치환하는 손장순 작가의 문학적 수사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하다. 이혼이라는 사회적 편견에도 굴하지 않고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룬 그녀는 당시 주체적인 여성상의 표본이기도 했다.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로 2000년대 중반까지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친 손장순 작가. 하지만 지난 2년 여간 세 차례의 큰 수술을 이겨내느라 현재는 잠시 펜을 놓은 상태다.

“기부를 결정하게 된 결정적 계기도 암 수술 후 병상에 있으면서였어요. 이렇게 그냥 떠나는 것은 의미가 없잖아요. 살아서 가져봤으면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4월 심장 판막 수술까지 한 터라 몸이 많이 약한 상태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꼿꼿하다. 인생의 마무리를 나눔으로 실천하는 사람, 그 건강한 마음이 그녀의 병까지 단단히 이겨내고 있는 듯 보였다.

문학은 나의 힘, 아니 세상의 힘
손장순 작가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아니지만 틈틈이 글을 쓰는 손장순 작가는 한권의 소설 역시 세상에 대한 자신의 발자취라고 말한다. 남편 故 임승준 씨와 함께 문예 계간지 <라 쁠륨>을 창간해 문화사업을 펼친 것도 문학 저변을 넓히기 위한 노력이었다.

“남편이 정년퇴직을 하게 되자 할 일을 만들어주자는 생각에서 문예 계간지를 만들게 됐어요. 6년 동안 <라 쁠륨>을 펴내면서 10명의 작가를 배출하기도 했는데, 그 중 권지예 작가와는 여전히 가깝게 지내고 있답니다.”

남편의 암 투병으로 <라 쁠륨> 발행이 중단됐지만, ‘손장순 문학연구기금’을 통해 그녀는 여전히 문화운동의 전진에 있게 됐다.

“요즘엔 재미있는 소설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새로운 소재나 테마를 찾기가 힘들죠. 그러니 ‘이상 문학에서 발전한 것이 뭐가 있느냐?’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죠.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데 이쪽으로 더 많은 발전이 있어야 해요. 문화와 균형의 발전을 이뤄야죠.”

손장순 작가는 요즘 문학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가할 충분한 자격이 된다. 여류작가로는 최초로 칼럼집을 펴낸 장본인이고, 최초의 산악소설집인 《불타는 빙벽》을 발표했으며, 《한국인》과 《세화의 성》은 5차례나 리바이벌 출판을 하기도 했다. 《한국인》은 불역, 《물위에 떠있는 도시》는 영역 출판되어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일찌감치 앞장서기도 했다.

까뮈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그녀는 ‘인생은 공연히 왔다 공연히 가는 도로(徒勞)’라는 말에 공감한다. 그 공연한 인생의 글로써 족적을 남기고 싶었다는 그녀는 기부 역시 그 일환이라고 강조한다. ‘쓰고 싶어 글을 썼고, 나누고 싶어 기부를 했다’고 정리하는 손장순 작가. 76년 인생을 군더더기 없는 ‘비움’으로 정리한 그녀의 언어는 이렇듯 짧지만 강한 울림으로 남았다.

서울대학교 발전기금
글_강현숙 사진_정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