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안내

서울대 소식

뉴스

뉴스

교수칼럼

꿈 그리고 나의 삶-김현덕 교수

2008.06.10.

꿈 그리고 나의 삶
글 : 김현덕 (치의학대학원 교수)

김현덕 치의학대학원 교수벌써 50이 넘어선지 몇 년이 된 나이지만, 나는 아직도 우리 대학에서 교육경험이 많지 않은 신참 부교수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음 세계의 주역인 우리 젊은 학생들에 대한 기대가 높다. 역사적으로 젊은이는 보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면서 옳음을 실천해왔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보다 인간적이고 실용적이며 창의적인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을 생각할 때 마다 잔잔한 미소가 든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5년 전인 40대 말에 우리 대학에 전임 교수가 되었다. 주변의 거의 모든 지인들이 40대 후반에 무슨 일이냐면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말렸을 때, 내가 아내를 설득하고 아내가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 국민의 구강보건을 세계 수준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는 나의 당찬 꿈과 용기였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아내에게 이번에 내가 학교에 가지 않는다면 난 아마도 개인적 평안을 위하여 사회에 빚을 졌다는 마음을 평생 지니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당시 얼마 전 개원했던 치과를 정리하고 보다 큰 꿈을 위하여 학교로 갔다.

70년대 대학을 다녔던 우리 세대에게 사회적 민주화는 화두를 넘어선 현실이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 있던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사회적 참여를 하게 되었다. 전 국민대상 건강보험이 시행되지 않았고, 가난하여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먹고 산다는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던 시절, 거의 모든 치대생들은 가난한 동네와 교회 또는 절 등에서 주말진료에 참여하곤 했었다. 썩은 이를 봉해주고 흔들리는 이를 빼주면서 우리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수 없이 듣고, 우리는 대학생이라는 선택받은 존재이며,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치과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서로 다짐하곤 했다. 어느날 갑자기 맞은 80년 서울의 봄이 다시 암흑으로 변해가자, 우리는 탄압의 고통에서 자신의 꿈을 미루고 민주화의 꿈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다행히 민주화를 이룬 후 조용히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왔다.

당시 30대 중반인 나도 치과의사로 돌아와 학생 때 돌아다녔던 산동네 언저리에 치과를 열고 진료를 하면서 당시로는 빠르지 않은 결혼을 했다. 얼마 후, 대학생 때 그렇게 매력적이었던 공중구강보건학 공부의 꿈을 위하여 30대 후반의 나이에 나는 우리 대학원에서 산업구강보건학을 전공하기 시작하여, 유학과 방황이라는 터널을 지나, 사회치의학을 말하기 적당한 나이에 모교의 전임교수가 되었고 기뻤다.

교수가 되어서 우리나라 구강보건정책을 개선하려 했지만, 나는 실제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다.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돌아온 메아리는 이제 교수가 되어서 열정이 지나치다는 평가였다. 선배 교수와의 의견차는 너무도 컸고 결국은 따돌림을 받았다. 그래서 학교를 떠나고자 했다. 그러면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아내가 설득했다. 지킨 꿈은 결국 공동연구라는 따뜻함과 좋은 학생들의 만남이라는 행운을 주었다.

내가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리 먼 예전도 아닌 5년 전과 달라진 것은 사실이나, 난 아직 국민의 새로운 구강보건문화를 창달하려는 현실적 소망이 있다. 그래서 변화하는 나의 꿈은 아직 진행형이다. 우리 학생들의 보다 옹골찬 꿈과 용기를 기대해 본다.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기고, 2008. 6. 2
http://www.sn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