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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역사학자가 된 이유 - 송기호 교수

2010.09.07.

2010년 실크로드 답사 때 투르판 화염산 앞에서

내 고향은 대전이다. 대전에서도 시골에 해당하는 동쪽에 살았다. 그곳에는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산 줄기가 지나간다. 어렸을 때에 심심하면 그곳을 오르곤 했다. 외할머니를 따라 나무하러 가기도 했다. 나무하다 따뜻한 양지에 앉아 주먹밥을 먹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외할머니는 큼지막한 나무 한 단을 머리에 이고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 집에 돌아왔다. 산 정상에는 큼지막하게 쌓인 돌무지가 여기저기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이면서 남겨놓은 보루, 산성 유적이었다.

명절 날 큰댁에 모여 이런 저런 얘기를 할 때에 내가 만주가 우리 땅이니 되찾아아야 한다는 말을 했던 모양이다. 그 때 교직에 계시던 어른이 어떻게 되찾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내가 아주 어렸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초등학생이었는지 중학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또 왜 그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고등학교 때에 대전 지역 연합서클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그 때의 회의록을 내가 가지고 있다. 국사학과 대학원에 들어온 뒤에 우연히 펼쳐보니 내가 처음으로 발표한 것이 역사소설에 관한 것이었다. 읽을 것이 별로 없던 시절에 어찌 해서인지 박종화의 소설 ‘삼국풍류’를 읽었고, 애꾸눈 궁예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아 있다.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세 장면의 기억들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이런 경험들이 나를 역사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이끌어갔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내가 역사학을 선택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서클활동을 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예비고사 전국 수석을 한 사람이 국사학자가 되겠다고 인터뷰해서 당시에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무척 어려웠던 것이 고민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 잘 선택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때부터 가지게 된 생활 신념이 있다. ‘남이 하지 않는 길을 간다’ 그리고 ‘계구(鷄口, 닭 머리)는 될지언정 우후(牛後, 소꼬리)는 되지 않겠다’이다. 이 생각에 따라 당시에 인기 있던 법조인이나 의사가 되기보다 역사학자가 되려고 하였고, 국사학과에 들어와서는 우리 역사이면서도 연구가 거의 되지 않았던 발해사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

발해사란 미지의 세계에 도전해보겠다고 결정한 것이 대학교 3학년 때였다. 그런데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우선 학교 도서관, 국회도서관, 국립도서관 등을 뒤져서 발해사에 관한 논저목록을 작성하고 자료를 복사했다. 또 당시에는 공산권 자료를 구하기가 무척 어려울 때였는데, 중국, 북한, 소련(러시아)의 고고학 자료를 얻기 위해서 ‘불온간행물’ 자료실을 쫓아다녔다.

지금 내 연구실에는 일본에서 간행된 ‘세계고고학사전’이 있다. 대학생 시절에 두 달간 가정교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산 것이다. 당시에 수입되는 외국 출판물은 북한이나 공산권 관련 내용은 매직으로 새까맣게 지워지거나 아예 칼로 도려내어 판매되었다. 그런데 이 책에 북한이나 소련의 고고학 정보가 상세히 실려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네 학생의 가정교사가 되어 한 달에 4만원씩 두 달 번 돈으로 그 학생의 친척인 재일동포를 통해서 8만원짜리 책을 건네받았다. 이 책을 통하여 소련에서도 발해사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았고, 그 자료를 읽으려고 대학원 때에 러시아어도 공부했다.

이렇게 어렵게 출발한 발해사 연구가 이제 30년이 넘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공산권의 문호가 열렸다. 처음 내디딜 때에는 중국을 가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전혀 못했다. 마침내 1990년 여름에 처음으로 중국의 발해 유적을 밟았고, 1992년에는 러시아의 발해 유적까지 가볼 수 있었다. 그 때의 감격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될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에는 22번, 러시아 연해주에는 18번 다녀왔다. 올 여름에도 연해주 발해 성터의 발굴 현장을 다녀왔다. 하지만 북한의 발해 유적을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게 안타깝다. 중국이 발해를 자기네 역사로 삼아 유네스코에 등록하려 준비하고 있는데 말이다.

대학원 시절에 동료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이 있다. 발해사를 연구한다고 해서 ‘송발해’라 했다. 그 이름대로 지금까지 연구해왔다. 세월이 지나보니 권력이나 돈을 좇는 직업도 좋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네가 하고 싶은 분야를 택하라고 일러준다. 나이 들어서 “나는 원래 이것 하고 싶었는데” 하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송기호 교수는 발해사 연구를 개척한 학자로, 근래의 발해, 고구려사 등 동북아 역사를 둘러싼 초국가적 논쟁의 핵심에 있는 인물이다. <동아시아 역사분쟁>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같은 제목의 수업을 서울대 전교생을 대상으로 열고 있다. 생생한 역사 논쟁에 참여할 수 있는 강의로 알려진 <동북아시아 역사분쟁>은 서울대 학생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교양강좌" 로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