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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동물 - 김지현 교수

2010.10.28.

“하얀 동물”
채점의 추억

- 글: 안지현 교수 (영어영문과)

흔히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심성이 착하지 않다고들 하지만, 난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양이가 등장 하는 에드거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The Black Cat)”도 미국문학이 전공인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읽긴 하지만 읽을 때마다 공포에 짓눌린다.) 간혹 밤길에 고양이가 불쑥 튀어 나오면 질색을 하며 도망가고, 잘 아는 분이 발톱을 뺀 고양이 5-6 마리를 키우시는데 죄송스럽게도 그 분의 초청에 한 번도 응한 적이 없다.

이런 내가 여러 마리의 (몇 마리인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고양이들과 오랜 시간동안 방바닥 위를 기어 다녀야 했던 끔찍한 기억이 있다. 대학원 시절 “문학개론” 수업조교를 맡았는데, 담당교수님이 조교 3명을 모두 집으로 부르셨다. 그 학기에 수강인원은 총 60명이었고, 각각의 조교는 20명의 학생들을 맡아 주당 한번 토론식 수업을 이끌고 페이퍼를 첨삭하고 채점하는 업무를 맡았다. (전형적인 미국식 수업구조다.) 학부생들은 학기 (3학기제라 10주 동안) 중에 5쪽 분량의 페이퍼 8개와 12쪽 분량의 기말 페이퍼를 제출해야 했고, 교수님은 첫 과제물을 모두 같이 읽고 (교수님은 60개, 우린 각각 20개씩) 의견을 교환하자 는 취지에 우리를 집으로 부르셨던 것이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희한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빨간색 카페트 위에 6개의 줄로 페이퍼가 10개씩 종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 페이퍼 주위에는 고양이처 럼 생긴 하얀 동물들이 빙빙 돌아다니고 있었다.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페이퍼 첨삭이라는 진지 한 이유로 모인 이상 싫은 내색을 당장에는 할 수 없었다. 곧이어 더욱 괴로운 일들이 이어졌다. 3명의 조교들은 차례로 첨삭을 해 온 페이퍼들을 6개의 줄 옆에 하나하나 놓고 교수님과 함께 바닥에 앉아 페이퍼들을 꼼꼼히 대조, 분석하는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 었으며, 그 후로 나는 거의 몽롱한 상태에서 첨삭지도를 대조하는 작업을 했기 때문에 사실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60세에 가까우신 교수님의 열정과 고양이들과 닿지 않으려는 나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교수님의 아파트에 도착한 시간이 약 1시경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 모두가 무사히(?) 그 집을 빠져나온 시각은 해가 이미 진 후였다. 물론, 더 이상의 첨삭지도는 빨간 카펫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조교의 완강한 반대에 의하여) 하지만 첨삭지도의 방법에는 변화가 없었다.

선생이 된 지 이제 불과 3년이 조금 넘었는데, 한 학기에 적게는 몇 백 장에서 많으면 천 장에 달하는 학생들의 영문, 국문 페이퍼를 첨삭하면서 몸이 지칠 때는 가끔씩 슬슬 꾀가 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태해지기 시작하는 순간 “하얀 동물”들이 나타나 날 괴롭히고 나태함을 탓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문대 소식지> 7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