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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과 현대예술 - 오종환 교수

2010.11.01.

미학과 현대예술

"이제 예술작품은 더 이상 눈으로 보아 즐겁거나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미학은 예술의 가치를 탐구하는 메타 학문"

글: 오종환 교수 (종교학과)

학생 때나 지금이나 나를 처음 만난 사람들이 가장 잘 물어보는 말은 “미학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미학이 무엇인지를 학부생 때는 시원하게 대답을 못한 것 같 은데, 미학은 간단히 말해 미적인 현상에 대한 철학적 탐구이다. 더 쉽게 말한다 면, 전통적으로는 아름다움(美)에 대한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애매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물을 보았을 때의 심리적 반응도 있고, 인기 있는 연예인들의 노래가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한류 스타들이 출연한 드라마나 영화가 일본 아줌마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파장도 있을 수 있어, 이러한 것들을 연구하는 것도 미학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미학은 그 방법론으로, 아름다운 것들 또는 그것에 준하여 소위 우리가 감상을 한다는 대상들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묻는 학문이다. 예술이 끼칠 수 있는 심리적 영향이나 사회적 파장은 사회과학 분야에서 다루어야 할 현상이고, 아름다운 대상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을 아름다움 그 자체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실체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이 미학의 근간을 이루는 작업인 것이다. 미학은 이러한 의미에서 아름다운 대상들 너머에 있는 미 그 자체를 탐구하기에 메타(meta)적 성격을 가진 철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학문이다.

또 하나 우리 주변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 예를 들어 대가의 스케치를 본 후 에 “나도 저 정도는 그릴 수 있다”라는 말이며, 이에 관련된 질문이다. 즉 저것이 어떻게 잘 그린 그림이냐는 말이다. 사실 오늘날의 예술작품들은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일찍이 1917년에 발표된 뒤샹의 <샘(Fountain)> 이라는 작품은 욕실용품 가게에서 집어온 남성용 변기에 사인을 한 것이며, 1964년에 발표된 워홀의 <브릴로 박스(Brillo Box)>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세제인 하이타이의 통을 플라스틱으로 비슷하게 만들어서 작품이라고 전시회에 내어놓은 경우이다. 오늘날의 작품들은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저것이 어떻게 예술작품인가 하는 의아심이 들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20세기 초반 이후에 전통적인 예술론에 반발하여 나온 소위 아방가르드(전위예 술)라고 불리는 입체파, 초현실주의, 상징주의 등등의 역사적 흐름의 귀결이기에, 오늘날의 예술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예술사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현대예술에 대한 이러한 의문은 결국 예술이 무엇이냐는, 즉 예술의 정의 문제로 귀결된다. 일반인들의 상식처럼, 18세기 이전까지의 예술작품들은 그림이라면 보아서 아름다운 것이라는 상식이 통할 수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생각에 반발하여 나온 20세기 이후의 예술작품들은, 예술은 작가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19세기 이후의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더 이상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화면을 만들낸 것이고 더 나아가 대상의 모습이 사라진 추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아름다운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답변에 대하여, 그림은 아름다운 대상을 재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반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림은 대상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까지 이른 결과였다. 소위 예술은 무엇을 해도 또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고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art for art's sake) 존재한다는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이 19세기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립된 이후에, 그림의 경우에 물감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이 대두된 것이다. 이제 물감은 대상을 재현하는, 즉 3차원의 공간을 재현하는 수단일 필요가 없어졌기에, 물감은 물감 자체를 위해 있어야 하며, 따라서 그림은 물감 자체의 특성을 나타내는 2차 원의 평면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추상작품 앞에서 그 화면을 채운 물감들 자체와 그것들 사이의 관계밖에는 감상할 것이 없게 된 것이다. 예술의 자율성은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예술의 사회 비판적 기능을 보장하는 중요한 역할도 하였으나, 그 동전의 뒷면은 우리가 어떻게 좋은지 알 수 없는 작품 앞에서 과연 예술은 무엇이며 이러한 예술이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아심이 들게 만드는 역효과도 낳은 것이다.

이러한 현대 예술의 상황에 관련된 예술 정의의 문제에 대하여 미국의 미학자인 댄토(Arthur Danto)는 재미있는 사고 실험을 하였다. 그의 가상의 전시회에는 화면 전체가 붉은 색으로만 채워진 모두가 같아 보이는 6개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각각의 제목은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사람들>, <키에르케고르의 기분>, <붉은 광장>, <열반>, <붉은 식탁보>, <빨간 색의 직사각형> 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같은 붉은 색의 화면이라 앞의 작품들과는 차이가 없지만 한 화가가 캔버스에 밑 칠로서 붉은 색을 칠한, 즉 작품이 아닌 것을 걸었다. 앞의 작품들은 <홍해를 건너 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우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를 건넜고 수몰된 이집트 병사들이 있는 홍(紅)해를 나타낸 것이며, <키에르케고르의 기분>은 그의 심리적 상태를 나타내었다는 식으로 각각의 제목에서 나름대로 해석을 할 수 있는 예 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캔버스는 작품이 아니더라도 눈으로 보기에는 작품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걸어둔 것이었다. 그는 예술작품들 사이에, 그리고 예술작품과 예술작품이 아닌 것 (뒤샹의 변기와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생각 해 보라) 사이에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해석의 여부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물론 우리가 해석을 하는 모든 것이 예술작품은 아니기에 예술의 정의는 여기에 어떤 조건이 더해져야 하지만, 그의 논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제 예술작품은 더 이상 눈으로 보아 즐겁거나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대략적으로 답변이 되었다면, 과연 예술은 어떤 해석을 요구하는 경우에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할 차례이다. 예술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며 우리의 삶 속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학이 인문학으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술에 대한 탐구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일조를 한다는 점일 것이다. 필자가 예술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학부 미학과에 지원했고 또 그 이후에도 공부를 계속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예술의 가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울이는 필자의 작은 노력이 우리의 문화와 예술 발전에 한 초석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오종환 교수는 미국 남일리노이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 았다. 전공은 현대 미 미학이며, 1993년부터 본교 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한국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주된 관심사는 예술철학, 지각이론, 허구와 감정의 문제, 영상미학, 음악 미학이다.『매체의 철학』(1998, 공저),『미학으로 읽는 미술』 (2007, 공저) 등 다수의 논저를 썼다.

<인문대 뉴스레터> 22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