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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길을 찾는 긴 여정 - 김인걸 교수

2010.11.04.

한국적인 길을 찾는 긴 여정

"오늘날의 시각에서 땅덩어리가 좁고 자원이 빈약한 ‘약소국’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역사를 살았던 선인들이 과연 현재 우리와 같이 자신을 초라하게 느꼈을까"

글: 김인걸 교수 (국사학과)

35년 전, 종합화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이전할 당시 황량하기 그지 없던 교정의 풍광을 떠올리면 과연 세월의 힘이란 대단한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 척박한 관악에서 제대로 버틸 수 있을까 걱정되었던 느티나무들이 이제 제법 태를 갖추고 교정의 곳곳에서 그늘을 드려주고 있고, 철따라 같은 자리에서 모 습을 달리하는 각양의 꽃과 나무들은 젊은이들의 잰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어디 나무나 풀뿐이겠는가. 요즈음 교정에서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자기 강의실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중한 얘기들을 얼마든 찾아낼 수 있다. 아니 도서 관이나 연구실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없도록 많은 ‘행사’들이 우리를 불러내고 있다. 각종 학술행사, 발표회, 강연회, 집담회들과 그곳에서 쏟아내는 새로운 정보들은 끊어졌던 대화를 이어주는 가교가 되고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빗줄기가 되기도 한다. 지난 시절, 일만 있으면 ‘전장(戰場)’으로 변하곤 했던 관악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현상 이니, 그 소음이 다소 거슬리는 경우가 있더라도 과분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 겠다.

그런데 천년을 간다는 은행나무나 느티나무들과 같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세운 다리는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많은 정보의 홍수 속 에서 과연 마르지 않을 관악의 우물로부터 길어 올릴 수 있는 양은 또 얼마나 되는 것일까. 조금 더 전, 역시 황량했던 공릉동 교양학부 캠퍼스를 벗어나 동숭동에 진입하여 선생님들이 강의와 글을 통해 던지셨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매료되어 아무 가진 것 없어도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치기어린 ‘국사학도’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 내가 파놓은 우물이 너무 좁고 얕은 것은 아닌가, 얼굴이 붉어진다. 그 때 선생님들은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 10년 정도만 한 우물을 판다면 자신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 하시고, ‘후진에 대한 장래의 기대와 무수한 자료’가 있다는 점을 들어 한국사 연구의 장래를 낙관하셨다. 당시 선생님들의 기대만큼은 못 되더라도 학생들에 대한 칭찬이 너무 인색한 것은 아닌가.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70년대에는 암울했던 정치상황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이래의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면서 한국사학계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과거 한국사를 타율적이고 정체적인 것으로 왜곡하였던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한국사를 발전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었다. 이를 언제부터인가 ‘내재적 발전론’이라 불렀다. 이에 기초하여 한 국사 시대구분 논의가 활성화되고, 또 그만큼 많은 문제점들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었다. 새로운 한국사관을 세운다는 문제의식이 제고되고, 아울러 그동안 방치 되었던 많은 자료들이 공간(公刊)되거나 다수의 자료들이 새롭게 발굴되기 시작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론이나 자료에 대한 갈증을 풀기에는 많이 부족하였고 공부하는 환경이나 연구 형편 역시 지금과는 판이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동료들과 대학원에 진학한 나는 물을 만났다. 전통문화의 보고, 무한한 가능성을 펼칠 수 있게 도와 줄 서울대 학교 ‘규장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시대를 무대 로 자리 잡고 ‘자료주의자’가 되었다. 다행이 눈이 좋았던 터에 이제 시간과의 싸움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자료를 보면 볼수록 그동안 그려왔던 한국 사상(韓國史像)과 어긋나는 점이 늘기 시작했다. 역으로 눈이 침침한 것은 아닌 데 모르는 것 역시 따라 늘어났다. 어느 것이 진정한 조선시대 모습인가? 문제가 자료로부터 오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갑자기 한국 자본주의의 성공은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소리가, 이제 식민지시기를 수탈과 저항이 아니라 수탈과 개발의 패러다임으로 다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사를 해체하라는 소리까지 나온다. 지금까지 서술해 온 한국사는 서구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역사인식의 틀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이었으니, 그 같은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체의 논리를 찾아야 한다고 충고도 따른다. 서구중심적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식민지 근대와 진정한 근대를 구분 못하는 식민지 체질에 대한 우려가 있은 지 반세기가 훌쩍 넘고 있는데 이런 주장들이 새삼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 주창자들은 과거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해 온 이들이 남긴 문화적 유산들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 만큼의 자기 문화에 대한 이해나 있는 것인가.

사실 일제 관학자들이 한국사, 조선사에 대해 너무나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특히 그들이 주장한 양반 망국론이 조선 문화의 개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에 몸담고 조선시대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학생들에게 의도적으로라도 양반문화의 특성,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양한 각도에서 긍정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해 오고 있다. 대학원생들에게는 진정 조선적인 길은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찾아보도록 격려하기도 한다. 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없이는 젊은이들이, 기성인도 마찬가지지만,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미래에 대한 전망도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같이 얘기해 주어야 하지만 ‘현실’에 찌들은 흐린 눈으로는 명암과 강목(綱目)을 구분할 수 없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땅덩어리가 좁고 자원이 빈약한 ‘약소국’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역사를 살았던 선인들이 과연 현재 우리와 같이 자신을 초라하게 느꼈을까. 한국에서는 공부하기 어려우니 석박사 학위는 외국에 나가서 해 와야 한다고 젊은이들을 내몰고 있는 현재 우리의 대학을 보면 무슨 생각들을 하시게 될까.

역사에는 명암이 있다. 극단적 자기비하나 정 반대의 미 화는 이제 설 자리가 없다. 18세기 말, 새 시대를 열고자 한 영주(英主)로 평가 받는 정조는 훈어(訓語)에서 조선이 사대부로 나라를 세운 뜻을 강조하면서, 조선에서 수백 년 이래 농민봉기가 한 번도 없었던 것은 바로 사대부의 힘이라고 추켜세운 적이 있다. 그런데 정조 사후 10년이 지나자 바로 황해도 곡산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곧이어 ‘홍경래의 난’이 터졌다. 그의 시대는 그로써 마감하였던 것이다.

스승의 날을 맞아, 식민지 근대화와 진정한 근대(현대)사회의 건설을 구분하지 못하는 식민지적 체질을 청산할 수 있기를 그토록 바랐던 돌아가신 김철준 선생님이 새삼 그립다. 자신의 역사를 폄하하지 않고 온전한 눈으로 볼 수 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또 겪어야 할까. 한국적 길을 찾는 여정에 동 반할 역군이 있는 한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김인걸 교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조선후기 향촌사회 변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한신대학에 근무했고, 1986년부터 모교의 국 사학과 교수로 재직 하고 있다. 저서로『조선시기 사회사 연구법』(공저, 1993),『20세기 역사학, 21세기 역사학』(공저, 2000) 등이 있다.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를 펼쳐 왔으며, 최근에는 전통문화와 한국인의 정체성에 관해서도 많은 글을 발표하고 있다.

<인문대 소식> 21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