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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 - 정병설 교수

2010.11.25.

아메리칸 드림
"한국인이 자기 나라를 더 살기 좋은 나라, 행복한 나라로 생각하게 만들 길은 없는가"

글: 정병설 교수 (국어국문과)

차는 언덕을 올라 한참을 달렸다. 몇 번 지나친 길이지만 그 안으로 들 어가 보기는 처음이었다. 입구에는 대학 정문만큼이나 큰 아치형 문이 있었다. 지나다니며 저 안엔 뭐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장례식장이었다. 사철 무더위도 추위도 없다는 이곳 샌프란시스코,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건기가 반년 이상 지속된다는 이곳에, 영영 세상을 떠난 사람의 서운함을 보여주듯 비가 추적거렸고, 기온도 낮지 않은데 한국에서 느끼지 못했던 쌀쌀함이 감돌았다.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심장마비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망자는 소원을 이루었다.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가 왔다고 했다. 1960년대 초에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와서 대학원을 마치고 그대로 미국에 정착해서 살았다니 그의 타향살이는 40년이 넘는다. 미국에서 사업도 성공해 많은 돈을 벌었고, 최근에는 집을 수리하면서 한 장에 만 불이 넘는 타일을 사서 끼웠다고 했다. 다만 십여 년 전에 아내를 여의었고 하나뿐인 딸이 일찍 집을 떠나 살았기에, 그 동안 그는 그 큰 집에 혼자 살았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의 말로는 그는 집으로 손님을 청하길 좋아했고, 음식을 넉넉히 준비해 나눠 먹고, 남은 것은 다 싸주었다고 했다.

나는 그의 큰형을 알았기에 장례식에 참석했다. 집안에 전하는 유물을 감정해주다 알게 된 분이다. 유물은 그 분 할아버지의 시권 곧 과거 시험 답안지였다. 그것에 대해 듣게 되면서 집안 내력을 알았고, 덤으로 팔십을 바라보는 그 분의 흥미진진한 인생사도 들었다. 경기고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해서 한국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분이 오십의 늦은 나이에 아래 칠형제가 먼저 정착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고 했다. 이 분 역시 성공한 분 이다. 사업은 몰라도 시쳇말로 자식농사에는 성공한 분이다. 딸 하나 아들 둘을 모두 잘 키워서, 사위가 큰 부자 라고 했고, 아들 둘은 모두 박사와 의사라고 했다. 다만 딸은 로스앤젤레스, 장남은 보스턴, 막내는 알래스카에 살고 있어서, 일 년에 자식들 한 번을 보기 어렵다 한다. 두 형제는 모두 남 부러울 것 없는 유복한 분들이다.

어릴 때는 그 나이 분으로 드물게 유치원을 다녔을 정도 로 부유했고, 재능이 있어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니, 고국에서도 누구보다 잘 살 수 있었지만 더 나은 길을 택해 풍요로운 신세계로 건너오신 분들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사업이든 자녀 교육이든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성공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가슴에 한 줄기 바람이 스쳐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타향에서의 성공을 고향에서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격이라고 했던가. 성공해도 허전한 타향살이를 위해, 한국인들은 한국이 아주 가난했던 삼사십 년 전은 물론, 그보다 훨씬 부유해진 지금도, 옛날 못지않게 많이들 미국으로 몰려오고 있다. 남북 이산을 뼈아프게 경험한 한국인들이 이제는 동서 이산을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오고 있다. 이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신세계라서일까, 기회의 땅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오는 것일까.

이곳 교민들의 말에 따르면 미국도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왜 여기로 계속 오는 것일까. 오는 사람들은 온 게 아니라 내몰렸다고도 한다. 그러면서 공교육 붕괴를 들먹이고, 부정부패, 안전사고 등을 거론하기도 한다. 어떤 이유이든 간에 그것을 단순화하면,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또는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미국에서 사는 것이 더 잘 살 가능성이 높고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런가 따져볼 문제지만, 그것보다 수많은 한국인의 현실인식이 그렇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자기 나라를 더 살기 좋은 나라, 행복한 나라로 생각하게 만들 길은 없는가. 또 한국인이 진정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처음하는 해외 장기 체류 동안, 그런 고민을 누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가 부쩍 궁금해졌다.

동생의 죽음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 친지, 친구들은 장례 문제를 의논하다가 저녁이 되어 식당을 찾았다. 그런데 결국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가서 먹을 곳을 찾지 못해 할 수 없이 망자의 집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본 그 집 부엌에는 그 누구에게 나눠줄 부대찌개 한 솥 과 곰국 한 솥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물론 전해들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