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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난적(人文亂賊)을 기다리며

2010.12.24.

인문난적을 기다리며, 철학과 허남진 교수(기초교육원장)

시대의 흐름과 함께 판을 새로 짜는 인문난적들이 많이 나오기를

지금에 와서는 맹자에게도 별 호감을 못 느끼고 맹자의 철학에도 공감하지 않지만 한 때 문리(文理)를 통해 볼 거라고 열심히 외운 탓인지 문득 맹자의 한 구절이 떠오르곤 한다. 그 중의 하나가 “人必自侮然後 人侮之 家必自毁而後 人毁之”라는 구절이다. 인문학의 위기, 기초학문의 위기라는 말도 그렇다. 누가 인문학을 경시하며 누가 기초학문을 폄훼하는가. 내가 만난 어느 누구도 인문학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고 더 나아가서 인문학이야말로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궁극이라고 하며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물론 그 말이 백퍼센트 진심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자꾸 듣다보니 인문학을 모독하고 해치는 진짜 적은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고 있는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조선시대는 문학과 철학의 시대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오늘날에도 성리학을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나 그 시대에는 가장 정치(精緻)한 이론적 체계를 갖춘 철학이자 사회적 이념이었다. 성리학과 조선사회가 동일시되다 보니 마침내는 당파싸움도 성리학을 가지고 하게 되었다. 그 싸움의 챔피언격인 송시열은 순수한 주자학의 수호라는 명분아래 정적인 윤휴를 사문 난적(斯文亂賊)으로 매도하고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그 시대의 요구가 순정(純正) 주자학의 정립이고 송시열은 그 시대정신을 이룬 조선성리학의 완성자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주자학이라는 틀을 벗어나려한 윤휴는 그 시대 유학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한 인문학자였고 주자학만이 진정한 유학이라고 고집한 송시열이야말로 유학의 본령을 해친 진짜 사문난적이었다. 만약 윤휴 같은 사문난적이 더 많았다면 조선의 성리학이 그 모양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때 화석화 되어가던 사문(斯文)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사문난적이 필요했듯이 지금 당면한 소위 인문학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데에도 순수 인문학의 수호자가 아니라 지금의 인문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문 난적(人文亂賊)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지금 인문학은 위기에 처해 있는가. 아니다. 사실은 인문학은 어느 시대보다 풍성하고 인문학자는 넘쳐나고 있다. 위기에 처한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공급 과잉으로 말미암아 학문을 계속할 수 없는 학문후속세대들이고 옛날만큼 대우 받지 못하는 인문학자들이다. 다른 분야 사정은 잘 모르니 내가 몸담고 있는 철학과의 예를 보자. 33년 전 인문계열에서 철학과로 진입한 학생은 18명이었고, 대학원에 진학할 때 석사과정 입학생은 6명이었다. 그 때 엄청난 호황이었음에도 그럭저럭 수요를 맞춰나갔다. 지금은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으로 전공이 분리 되었고 석사과정 입학생도 거의 3배가 되었다. 서울대만이 아니라 전국의 철학과가 모두 대학원을 두고 매년 수십명의 철학박사를 배출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미국과 독일, 일본, 중국에서 철학으로 학위과정을 밟고 있는 예비학자가 어림잡아 현재 전체 대학 철학 교수의 반절은 된다. 5년 내 그 중 반만 돌아온다 해도 지금 교수의 25퍼센트가 퇴직해야 할 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HK사업을 하고, 대학의 교수정원을 아무리 늘려도 연구를 계속하기 힘든 박사가 양산될 수박에 없다. 이런 사정을 아는 우수한 학생들은 공부를 업으로 삼기를 꺼리게 되니 우수한 대학원생이 줄어들고 말하자면 악순환 고리에 들어선 것이다. 무슨 수를 쓰든지 이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겠는데 방법이 마땅치 않다. 무조건 줄이 자고 하자니 인문난적으로 지탄받을까 두렵기도 하고.

이런 인문학자의 위기는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제도개선을 통해, 정 안 되면 시장기능을 통해 차츰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더 심각한 인문학의 위기는 우리 인문학자들의 의식 속에, 또 우리가 연구하고 교육하는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문대는 대학 중의 대학이며 인문학은 기초 중의 기초학문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순순한 학문이라고 한다. 내놓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에 그러려니 하지만 사실 그런지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수학과 자연과학이 공학, 의학, 농학, 약학 등의 기초인 것은 틀림없다. 과학의 시대니 사회과학과 인문학도 자연과학의 기초 없이는 잘 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인문학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문학과 철학 역사를 공부하지 않아도 공학, 의학은 물론이고 법학이나 경영학을 하는 데 그렇게 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기초라고 주장하면 뭐하겠는가.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인문학을 기초라고 인정해 주어야 기초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시 철학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학생 때 “철학을 하라”고 유난히 강조하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그리고는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철학을 잘하기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재너머 일미집이라는 선술집에서 유치찬란한 철학을 하곤 했다. 대학원에 가자 사정이 좀 바뀌었다. 논문을 준비해야 하니 철학은 제쳐두고 약간 세부적인 문제에 몰두하게 되고 마침 내는 요즘의 철학적 문제가 무언지도 모르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누가 물으면 내 전공이 한국철학이 아니라 한국철학사, 조선후기 사상사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얄팍한 수작이기도 하지만 내가 연구하고 가르치는 건 철학이 아니라는 자괴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철학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철학과에서 자신들이 마주친 철학적 문제를 풀어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런 주제를 찾아 풀어주지 않고 퇴계와 율곡, 칸트, 영미철학, 독일철학, 프랑스 철학, 인도철학, 중국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철학의 근본적인 속성 중의 하나가 보편성인데 동서로 나누고 고금으로 나누어 연구하고 가르치니 각 분야에서의 수준은 세계적이라고 할 만하나 끝내는 철학과 내에서도 서로 대화가 안 된다는 반성이 나올 지경이 되었다.

이런 사정이 철학과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이 발전하면서 점점 전문화되어가고 전문화되어 갈수록 대화의 폭은 좁아지기 마련이다. 작은 분야의 전문학자들이 모여 속닥거리며 순수한 학문의 깊이를 더해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 순순함과 인문학적 정통만 고수하려다가는 잘못 하면 이 시대의 송시열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인문학이 진정 학문의 기초가 되고 학문 후속세대가 계속 이어지기 위해서는, 버리고 시대의 흐름과 함께 판을 새로 짜는 인문난적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허남진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조선 후기 기(氣)철학 연구로 박 사학위를 받은 한국철학 전문가이다. 한림대 조교수를 거쳐 1992년 부터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문대 부학장, 중앙도서 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철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다. 『조선후기의 성리학』, 『최한기』, 『21세기 문명과 동아시아』 등의 저서가 있다.

* 허남진 교수가 <인문대 소식> 15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