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종합캠퍼스를 건설하는 것은 서울대학교의 오랜 바람이었다. 연합대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의 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한 서울대학교의 종합화를 염원하는 목소리는 1950년대 후반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 1975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1975년 1월 문리과대학이 위치한 동숭동 캠퍼스의 이전을 시작으로 흩어져 있던 대학들이 관악캠퍼스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합치면서 서울대학교는 도약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새로운 캠퍼스에 대한 학생들의 감상은 다양했다.
“새 캠퍼스에 들어서면 누구나 우선 캠퍼스의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산기슭에 자리잡은 캠퍼스 전역에 가득한 맑은 공기와 조용한 분위기를 맛보게 된다. ‘참 좋은 곳에 학교를 잘 지어 놓았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한편 새 캠퍼스에 적응하기 전이라 다소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한 학생은 ‘새로운 종합캠퍼스 이전이 서울대 전체로 봐서는 발전적 계기가 되겠지만 캠퍼스가 너무 광활하고 생소해 종래 단과대학별로 지니고 있던 아담한 분위기와 다양한 특성을 모두 잃어버리게 됐다’고 섭섭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학생은 ‘전체 학생 수가 너무 많아져 차분한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고 안정감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직은 어수선한 서울대 새캠퍼스”, 「동아일보」, 1975.3.20.)
관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종합캠퍼스의 장점은 시설과 환경정리 등 공간의 변화와 함께 교수진과 교과·강의를 통합함으로써 다양하고 효율적인 수업을 전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서울대학교는 종합화 과정에서 교육기구를 재편하고, 전공계열별 교수진을 통합하며 대학관리조직을 강화하는 등 구조적으로 변화하였다. 종합대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노력은 기획위원회 산하 ‘교육연구 및 기구조직 분과위원회’가 입안한 ‘아카데믹 플랜(Academic Plan, 교육연구 및 기구조직계획)’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앞서 제12호에서 다루었던 「서울대학교종합화10개년계획」 내 마스터 플랜(Master Plan, 캠퍼스 종합 건설 계획)의 기초가 되기도 한 아카데믹 플랜은, 서울대학교가 지향해야 할 교육이념을 규명하고 그 이념의 구현을 구현하는 이상적 대학 모형을 창조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1975년 1월 13일자 『대학신문』에 실린 「종합화계획 본교 측 최종안 요지」에 따르면 다음의 기본 원칙과 방침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가. 원칙
1. 연합대학적 성격을 탈피하고 명실상부한 종합대학교로서의 기구를 마련하며 종합적인 교육운영을 하도록 한다.
2. 한국의 학문연구와 고등교육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중추대학으로 발전시킨다.
3. 국립대학의 성격을 견지하면서 점차적으로 정부의 간접관리체제로 전화하며 자율적인 운영을 하도록 한다.
나. 방침
1. 종합캠퍼스를 건설한다.
2. 기본학문 및 그 연구 분야를 강조한다.
3. 학부과정과 대학원 과정을 종합 운영한다.
4. 교수는 학문영역별로 통합하고 그 임용제도를 쇄신한다.
5. 학문계열별로 학생을 선발한다.
6. 학사행정과 교육시설을 종합 관리한다.
서울대학교 기획위원회 교육연구 및 기구조직분과위원회 연구보고서
서울대학교 기획위원회 교육연구 및 기구조직분과위원회, 1971.2.
교육연구 및 기구조직계획은 1970년 5월 1일 교육연구 및 기구조직 분과위원회가 발족된 이후 수차례의 회의와 전문가들의 의견 수렴을 거쳐 마련되었다. 교육연구 및 기구조직분과위원회에는 나웅배 위원장을 포함하여 권숙일, 박원희, 이광호, 이홍구, 정원식, 조석준 등 총 7명의 위원이 참여하였다. 본 보고서는 1970년 7월 발표한 제1차 보고서를 수정·보완한 2차 보고서로 서울대학교종합화의 원칙과 방침을 서두로 하여 교육, 대학행정, 교수 및 연구, 학생에 대한 운영 사항을 수록하였으며 권말에는 캠퍼스 배치도가 첨부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종합화 교육기구 및 운영계획(안)
서울대학교, 1973.9.
위의 보고서 이후 기획위원회는 대안 보고서를 마련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1971년 12월 최종안을 확정하였으나 여러 문제점을 지적받아 수정안을 작성하게 된다. 이 내용은 이듬해인 1974년 12월 기획위원회가 작성한 ‘서울대학교종합화계획’ 최종안에 포함되었다. 본 수정안 머리말에는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건설 달성을 위한 중점 사항과 그 의미를 밝히는 한심석 총장의 글이 실려있다.
“연합이 아닌 종합된 대학으로서 획기적 발전을 기약하는 십년지대계를 마련하는 이 시점에서 서울대학교는 일찍이 가져보지 못한 역사적 기회와 시험에 직면하고 있다. 관악산 기슭에서 새 종합캠퍼스를 건립하는 것을 계기로 동방의 예지를 모은 위대한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꿈같은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서울대학교 종합화의 교육 연구 체제 개편이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서울대학교종합화계획’ 최종안은 1975년 2월 25일 국무회의 인준을 통과하여 정부의 공식 인가를 받았으며, 이를 반영하여 「서울대학교 설치령」(1975.2.28.)이 전부 개정되었다. 설치령 시행에 따라 서울대학교는 1975년 2월부터 교육 기구를 대폭 개편하였다. 13개 단과대학, 대학원, 6개 전문대학원 체제였던 서울대학교는 종합화 이후 3개 기본학문대학, 12개 전문학문대학, 3개 전문대학원으로 재편되었다. 교육 기구 편성의 원칙은 ① 기본학문과 전문학문의 영역으로 구분하여 이원적 체제로 편성하며 ② 대학부 교육과 대학원 교육의 연계를 강화하고 ③ 학과 조직의 세분화를 지양하고 유사학과를 통폐합하는 것이었다.
위와 같은 편성 원칙에 입각하여 기존의 문리과대학은 학문의 성격 기준에 따라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의 3개 기본학문대학으로 개편되었다. 기본학문대학은 서울대학교 학생들에게 기초 강좌와 전공 강좌를 제공하고, 전문학문대학 학생을 위한 선택 과정을 제공하는 기능을 했다. 기본학문대학이 기초교양교육을 맡음에 따라 교양과정부는 폐지되었다. 또한 대학 내 학과들이 분리되거나 신설되기도 하였다. 문리과대학의 고고인류학과는 고고학과와 인류학과로 분리되어 고고학과는 문리과대학에 소속되었고 인류학과는 사회과학대학에 소속되었다. 문리과대학의 천문기상학과는 자연과학대학의 천문학과와 기상학과로 분리되었다. 자연과학대학에는 계산통계학과를, 사회과학대학에는 신문학과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학문 영역의 이원화에 따른 전문인 양성을 위한 학사과정 교육과 전문학문 분야의 연구 개발 기능은 전문학문대학이 담당하게 되었다. 전문학문대학은 경영대학을 비롯하여 공과대학, 사범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수의과대학, 약학대학, 의과대학, 치과대학, 가정대학, 미술대학, 음악대학 등 총 12개의 대학으로 재편성되었다. 기존의 상과대학을 해체하여 경영학과는 경영대학으로 독립시키고 경제학과와 무역학과는 사회과학대학으로 분속시켰다. 법과대학에 속했던 법학과와 행정학과는 교육기구 개편에 따라 법학과가 행정학과를 흡수 통합했다. 사범대학의 체육과는 체육교육과로 개칭되었다. 공과대학의 경우 다른 단과대학보다 훨씬 많은 변화가 있었다. 건축공학과는 건축학과로, 재료공학과는 요업공학과로, 원자력공학과는 원자핵공학과로 개칭되었으며 공업화학과가 신설되었다. 응용수학과, 응용물리학과, 응용화학과는 폐지되어 자연과학대학의 각 학과로 흡수 편입되었다. ‘응용 3과’의 폐지는 유사 학과의 통합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상대해체안에 반발 – 교수, 학생회성명서 발표
대학신문, 1974.12.4.
1974년 교육개편 시안을 발표하자, 교수와 학생들의 반발이 뒤따르기도 했다. 상과대학 해체에 따라 학생들의 거센 반발이 일었었는데,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고 항의농성을 벌이고 동창들과 교수들이 총장에게 항의문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경제학과를 경영대학에 소속시킬 것을 주장하여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재료공학과도 과 폐지에 반발한 학생들이 총장실로 몰려가 현관문을 부수며 반발하기도 했다. 이유는 재료공학과를 없애고 요업공학과가 설치됨으로써 학문 선택의 폭이 좁아졌고 폐지가 확정될 때까지 소속과의 교수나 학교로부터 학생들에게 전혀 상의나 사전 통보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다음으로, 각 대학원(대학원, 경영대학원, 교육대학원, 보건대학원, 신문대학원, 행정대학원, 환경대학원)들도 관악으로 이전하였다. 1975년 2월 서울대학교 설치령(대통령령 7565호)에 의해 대학원과정 교육을 교육 기구 조직상 학부과정 교육의 연장선에서 단일화하였다. 이에 따라 대학원 과정은 대학원장이 각 대학원에 위탁하여 학사과정, 석사과정, 박사과정을 종적으로 연계 운영하였고 대학원의 행정실을 폐지하고 대학원생의 학사 관리도 학부의 학과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원의 실제적인 강의와 모든 연구는 각 대학 학사위원회의 관장 하에 각 학과 단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만, 전문대학원은 해당 학부가 없는 관계로 연계 운영에서 제외하여 학부과정이 없는 보건대학원, 환경대학원, 행정대학원만 존속시키고 경영대학원, 교육대학원, 신문대학원은 폐지하였다. 폐지된 전문대학원의 제반업무는 관련 단과대학원으로 이관하였으며, 그 안에 편제되었던 학과나 전공은 (일반)대학원에 소속시켰다. 경영대학원, 신문대학원, 교육대학원 수업은 과거 형태로 지속하되 명칭만 대학원 경영학과, 신문학과, 교육학과로 개칭하였다. 특기할 점은 교육대학원을 없애는 대신 교육학과에 서울대학교 최초로 협동과정을 신설하여 교육대학원에 있던 가정 교육, 상업 교육, 미술 교육, 음악 교육의 기능을 대신하도록 한 것이다. 협동과정은 총장이 문교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2개 이상의 기존 학과 대학(원) 간의 과정으로 설치하였다.
개정학칙에 따른 폐합, 분리된 학과 학생의 소속에 대한 지침
서울대학교 교무처, 1973.3.
서울대학교 교무처에서 마련한 지침으로 폐합 및 분리된 학과 학생의 소속에 대한 다음의 조치 사항을 제시하였다.
“1. 본 조치는 1975.3.1.부터 시행되는 개정학칙 부칙에 의하여 폐합, 분리되는 학과의 학생을 개정학칙 조항에 부합되도록 소속시키므로 학사 행정의 원활을 기하고자 함
2. 개정학칙 부칙에 따라 당연히 대학 또는 학과가 지정된 학생의 학적은 1975.3.1.자로 해당 대학 또는 학과에 소속된 것으로 간주한다.
3. 개정학칙 부칙의 경과조치에 따라 폐합, 분리되는 학과의 재학생으로 본인의 희망에 따라 학과를 선택할 수 있는 학생에 대하여는 학과 배치원을 교무처장에게 제출한 후 승인을 얻어 해당 대학 학과에 통지한다. 단 천문기상학과와 고고인류학과는 학과장의 지도를 거쳐야 함.
4. 75학년 1학기 등록하지 않은 자로서 앞으로 복학, 복적, 재입학할 때에는 위의 각 항 중 해당 조항에 따라 학적을 처리한다.
5. 위의 각 항에 열거하지 않은 사항에 대하여는 개정학칙의 취지에 따라 교무처장이 이를 처리한다.”
학문영역별로 통합하고 임용제도를 쇄신한다는 원칙에 의거하여 전공계열별 교수진 통합도 추진되었다. 이를 통해 각 단과대학에 소속된 교수진과 강좌의 중복현상을 해소하였다. 전임교수는 원칙적으로 1개의 전공학과에 소속시키되 교수 겸임제도를 신설하여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조정하였고 교양과정부와 연구소의 교수들은 관련 전공학과에 소속되었다. 단과대학에서 교양이나 타계열 전공과목을 가르치던 교수들에게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었다. 교수진 통합 과정에서 가장 많은 교수를 수용하게 된 단과대학은 인문대학이었다. 대다수 교양과목이 어문학·사학·철학 계열이었기 때문이다. 영문과와 국문과는 갑자기 20~30명 가량의 교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결과, 897명의 전임교수가 15개 단과대학과 3개 대학원의 95개 학과 및 2개 연구소에 발령되었고, 겸임가능규정에 따라 모두 27개 학과에서 72명의 교수가 겸임을 맡았다.
한편, 종합화 이전 서울대학교는 교과과정을 각 단과대학별로 편성하여 운영한 결과 교과목이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고 각 학과 사이의 연계도 약하였다. 따라서 서울대학교는 정부의 실험대학1) 사업 참여를 계기로 교육기구의 종합화 및 교수진 통합과 함께 교과과정을 비롯한 교육 운영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편을 시작하였다. 1974년 실험대학으로 선정된 서울대학교가 개편한 교과과정에서는 졸업학점의 감축(160학점→140학점)에 따라 전공과목 등 학과별 교과목 수와 학기당 이수 학점(24학점→18학점)도 줄었다. 그리고 종래의 학과별 학생모집을 지양하고 계열별 학생모집으로 전환하였다. 서울대학교는 신입생을 인문·사회·자연의 3개 계열로 나누어 모집했으며, 이밖에 가정계, 교육계, 농학계도 별도로 계열별 모집을 실시하였고, 의과대학, 음악대학 등 전공 특성상 계열별로 모집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단과대학 및 학과는 학과별로 모집하였다.
계열별 모집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일정 기간 기초과정 교육을 받은 후 학과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기초과정 교과과정 이수학점은 인문사회계 76학점, 자연계 39학점으로 정해졌다. 기초과정 교육 이수 후 전공과정으로의 학과를 배정받는 것을 일컬어 ‘진입’이라고 하였다. 전공과정 교과과정은 폭넓은 교과목 이수가 가능하도록 하고, 교과목을 최저 4년 이상 활용 가능하도록 하며, 교육 내용의 세분화를 방지하고 학사과정과 대학원의 교과과정을 연계 · 편성한다는 방침에 따라 편제되어 1974년 11월 말에는 인문계열 12개 학과와 사회과학 계열 7개 학과 등 3개 기본학문대학의 교과과정이 완성되었다. 1974년 계열별 모집으로 선발된 신입생들은 입학 뒤 1년 반이 지난 1975년 8월에 학과를 배정받았다. 대학신문에서는 계열별 모집을 두고 시행 후 드러난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계열별 기초과정의 학생들은 1년 혹은 1년반 이라는 긴 고행의 시간을 마치고 비로소 떳떳한 대학생이 된 것이다. 그러나 교양교육의 강화, 우수학생의 탈락 방지, 적성을 고려한 신중한 학과선택 등 당초 계열별 모집의 이상과는 달리, 최초의 계열별 입학생에 대한 학과배정이 끝나기까지 지난 1년 동안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야기되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우선 학생 각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은 향상되었을지 모르나 기초과정에서의 학생들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으며 학과배정 결과 성적에 의한 과배정으로 인해 적성이나 지원자의 의사가 무시되는 경향이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또한 최초 지원 및 몇몇 인기학과에 대한 집중지원현상은 성적에 의해 거의 반강제로 과배정을 끝낸 이제 앞으로의 전공교육에 있어서도 많은 차질이 빚어질 우려마저 낳게 하고 있는 것이다.”
(“특집…계열별 모집과 학과 배정”, 「대학신문」, 1975.8.25.)
종합계획에 의한 기초과정 교과과정
서울대학교, 1973.12.1.
1974년 계열별로 모집한 신입생을 대상으로 새로운 교과과정을 적용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1973년 기초과정 교과과정을 개편·확정하였다. 기초과정 교과과정은 종합화 계획 과정에서 교과과정의 일반원칙과 편성방침이 마련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교양과정부의 교양교육 연구위원회와 사범대학의 교육과정 연구위원회에서 교과과정안을 제시하였다. 1973년 10월 기초과정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기초과정의 교과과정을 확정하게 된다. 이후 한국사·체육·교련이 법정필수 교양과목이 됨에 따라 1976년부터 개편된 기초과정 교과과정이 시행되었다.
종합화에 따라 대학행정조직의 변화도 일어났다. 종합화 이전 서울대학교에는 총 8개의 학칙2)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1975년 2월 서울대학교 설치령 개정을 계기로 8개의 학칙이 폐지되고 서울대학교 단일학칙이 등장하면서 단과대학별로 운영되던 학사행정은 본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대학 행정을 본부로 집중하고 본부가 직접 학과 단위를 통제하는 중앙집중적 시스템이 마련된 것이다. 종합화 이후에는 총장을 최고 책임자로 하고 그 밑의 본부장·건설본부장을 중심으로 본부 기구들을 편성하였다. 부총장 산하에는 사무국·교무처·학생처·시설관리국을, 건설본부장 산하에는 건설국·건설통제실을 두었다. 건설본부는 관악캠퍼스 조성이라는 특수한 목적 하에 설치된 기구였기 때문에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1977년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대학 행정의 본부 집중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획위원회, 대학원위원회, 기초과정위원회, 교과과정위원회, 연구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가 대학본부 소속으로 신설되거나 이전되었다.
아카데믹 플랜은 대학운영의 본부 집중 및 종합화만큼이나 대학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지향과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구상 방안 중에서 최고의사결정 기관인 이사회와 이를 보완하는 교수평의회는 설치되지 않았으며, 평의원회 또한 종합화 직후에는 구성되지 않았다. 이처럼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서울대학교가 추구했던 대학 자치 실현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1975년 1학기부터 ‘긴급조치 9호’(1975.5.13.) 공포와 전국적인 안보궐기대회 개최 등 유신체제기의 위압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퇴보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1975년, 관악에서 첫발을 뗀 서울대학교는 학문발전과 교육여건에서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이는 단순히 캠퍼스의 지리적, 공간적 통합이라는 의미를 넘어 서울대인의 생활과 의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대학의 혁신이었다. 기존 단과대학의 고립화와 대학원의 분리로 인하여 연구 활동이 집약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한계를 극복하였고, 전임교수진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인접 학문 간의 유기적인 협조를 바탕으로 크게 개선된 연구환경에서 연구역량을 집중하여 연구의 내실화를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종합화 이후 연구비 지급의 양적 확대와 연구소의 증설 등은 학문 연구를 본격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단과대학이 학문 전공의 심화에 발맞추어 분화·발전됨으로써 고등교육의 새로운 틀이 만들어지고 대학운영의 효율성과 체계성도 증대되어 서울대학교가 세계 수준의 대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다만, 종합화의 성과 이면에는 대학의 자치권 약화, 대학운영의 자율성 부재라는 그늘도 있었다.
한편, 캠퍼스 종합화 이후 학생 사회의 정체성 변화도 나타났다. 각 단과대학이 지니고 있던 개성이 점차 사라지고, 단과대학을 공동체로 한 교수와 학생 사이의 깊은 유대의식도 약화되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확산된 개인주의 문화는 1974년부터 실시한 계열별 신입생 모집으로 더욱 심화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관악캠퍼스에서 지낸 시간이 쌓이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한 학생들은 단과대학 단위를 초월하는 일상적 교류망을 바탕으로 ‘관악세대’라는 집단정체성을 형성하였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아크로폴리스’, ‘자하연’, ‘버들골’, ‘감골’ 등 관악캠퍼스 곳곳에 위치한 특색있는 장소들의 명칭은 학생들이 캠퍼스 공간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새로운 소속의식을 공유하면서 명명한 것들이다. 이들 ‘관악세대’는 이후 격동의 시대에 한국사회의 사회적, 정치적 변동을 체험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력세대가 되었다.
“…‘관악 1세대’는 시멘트 냄새와 최루탄 냄새 속에서 좋은 세월을 다 보낸 ‘불쌍한’ 세대였다. 갓 지은 강의실에서는 썰렁한 생경함이 시멘트 냄새와 함께 감돌았고, 강의실 밖으로 나오면 몇 번의 ‘아크로’ 집회가 교문 앞 대치로 이어지면서 종국에는 뜻하지 않은 ‘눈물바다’로 끝이 나곤 했다. 그것도 몇 번 못하고 마침내는 남부경찰서에 집단 연행되었다 돌아온 어느 봄날 학교는 휴교되었고, 입학의 기쁨도 잠시인 채 오랜 무력감과 상실감에 괴로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 최종철 교수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양교육 60년사』, 2008.)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50년사』, 199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지성과 역동의 시대를 열다 1953-1975』,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도약의 나래를 펴라, 1975-2017』, 2017.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양교육 60년사』, 2008.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hn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신문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2)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영대학원, 교육대학원, 보건대학원, 신문대학원, 행정대학원, 환경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