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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서울대

휴교의 역사

2020.03.19.

서울대는 1946년 개교 이래로 1980년대까지 여러 차례 휴교를 겪어 왔다. 그동안 휴교는 민주주의를 향한 학생들의 열망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밥 먹듯이 휴교를 했다.”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억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80년대까지 학생들의 일상생활의 일부를 이루었다.

서울대학교 휴교 관련 약사
일 자 내 용
1946. 12. 18. 국대안 반대 동맹휴학으로 문리대, 상대, 법대에 휴교 처분
1960. 4. 20. 4·19 혁명으로 계엄령 선포 후 휴교령 발동
1964. 6. 4.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무기 휴교
1965. 4. 16.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휴교
1967. 6. 13.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 시위로 휴교
1969. 7. 5. 및 9. 1. 삼선개헌반대 시위로 임시휴교
1971. 4. 13. 및 10. 15. 교련반대 시위로 6개 단과대 휴교
문리대, 법대, 상대 무기한 휴업령 발동
1972. 10. 17. 유신헌법 반대 시위에 따른 비상계엄령 선포로 휴교
1974. 10. 18. 학생 데모로 전국대학 휴교
1979. 10. 27. 계엄령 선포로 전면 휴교. 11. 16. 대학 휴교조치 해제
1980. 5. 18. 민주화 시위로 휴교령, 캠퍼스에 군부대 진주. 8. 28. 휴교령 해제
서울대학교 휴교 관련 약사

서울대학교의 최초 휴교령은 1946년에 있었다. 개교 직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국대안(國大案)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12월 9일 문리과대학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들어갔고 곧이어 법과대학, 상과대학도 동맹 휴학을 단행했다. 이에 군정청은 12월 18일 문리과대학, 상과대학, 법과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문리과 법과 양 대학 휴교, 전학생은 정학처분에 부녀일보, 1946. 12. 27.

문리과 법과 양 대학 휴교, 전학생은 정학처분에
부녀일보, 1946. 12. 27.
군정장관의 지령에 의하여 서울국립대학교의 문리과대학, 법과대학 등은 휴교되고 전학생은 정학에 처하였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은 학생들의 스트라이크와 교수부재의 이유로 휴교상태에 있으며 상과대학은 학생들이 강의에 출석치 않고 있음으로 여기에 군정장관의 지령에 따라 …
명년 2월 3일까지 문리대학과 법대의 휴교를 선언하는 동시에 전학생은 정학에 처하는 바이다.”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정부는 학교에 대한 직접 통제의 일환으로 휴교령을 빈번하게 내렸다.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하자 정부는 계엄령을 발동한 후 전국 각급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내리고 모든 집회를 금지했다. 1965년에는 정부가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회담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그에 대한 반대 시위가 격렬해지자 서울지역에 위수령을 내리고 서울대학교 총장을 경질함에 따라 학교 전체가 휴교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단과대별로 집회를 개최하여 휴교 철회를 요구하고 한일회담 반대를 천명하였다.

오늘 4·19 다섯 돌, 전교 휴교. 법대, 22일까지 1주 휴강 – 20일부터 정상수업 계속할 터, 대학신문, 1965. 4. 19.

오늘 4·19 다섯 돌, 전교 휴교
법대, 22일까지 1주 휴강 – 20일부터 정상수업 계속할 터
대학신문, 1965. 4. 19.
한일회담에 대한 학생들의 적극적인 반대로 학내 긴장이 고조되자 4월 16일 법과대학의 휴교에 이어, 사범대학도 17일부터 휴교했으며 19일에는 4·19 혁명 다섯 돌을 맞아 하루 동안 전교 휴교했다.

“한일 회담 반대의 성토대회와 데모로 뒤숭숭한 속에서 오늘 4·19다섯 돌을 맞는다. 상년 11시부터 문리대 4·19기념탑 앞에서 총학생회주최로 기념식이 거행된다. 서울대에서는 이날 하루만을 전면 휴교(부속학교포함)키로 했다.”

또한 1967년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 당국은 6월 13일부터 16일까지 모든 단과대학에 휴교조치를 내렸으며 휴교 기간은 무기한 연장되어 7월 5일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정부의 편의에 의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강제 휴교령에 대한 반발은 학생들은 물론 교수 사회로도 퍼져갔다.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던 장이욱은 긴급하게 마련된 원탁토론에서 “46년부터 비롯한 우리의 짧은 대학사는 형극의 길을 통해 자유, 자치, 자제 등 대학의 생명소를 상실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를 2년 앞두고 정부가 1969년 6월경부터 3선 개헌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자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헌정 수호 학생 총회’를 열고, 각 단과 대학에서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후 전국 각 대학교에서 삼선 개헌에 반대하는 성토대회와 시국선언이 연일 계속되었다. 결국 1969년 7월 3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은 휴교에 들어갔고 7월 5일 문리과대학 등 7개 단과대학은 학기말 시험도 치르지 않은 채 학사 일정을 중단했다.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의 움직임도 가속화되었는데 치대 학생들은 흰 가운을 입고 교정에 모여 삼선개헌 철회와 휴교령 철회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한편 휴교 기간 동안 학교 당국은 보직 교수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방문하여 회유케 했으나 학생들의 민주화 열기는 꺾이기는커녕 더욱 높아지기만 했다.

휴교령으로 굳게 닫힌 모습. 대학신문, 1969. 9. 11.
휴교령으로 굳게 닫힌 모습. 대학신문, 1969. 9. 11.
3선 개헌 반대 시위 휴교조치로 텅 빈 도서관, 1969. 9. 22.
3선 개헌 반대 시위 휴교조치로 텅 빈 도서관, 1969. 9. 22.
휴교 중 학생 선도 위해 각 대학 학생과장들 지방 순시, 대학신문, 1972.12.01.

휴교 중 학생 선도 위해 각 대학 학생과장들 지방 순시
대학신문, 1972.12.01.
1972년 10월 17일 친위쿠데타와 함께 유신선포에 따른 비상계엄령으로 서울대학교는 휴교에 들어갔다. 휴교 기간 동안 각 대학 학생과장은 학생생활 선도와 교수와 학생들 간의 유대관계 존속 및 대화를 위해 지방을 순시했다.

“공대를 비롯한 7개 단과 대학 학생과장들은 지난달 14일부터 19일까지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의 대도시를 순시했고 한총장과 학생처장 및 나머지 대학학생과장들은 춘천 청주 전주 대전 등지를 15일부터 4일간 순시하면서 학생들이 학교로부터 무관심속에 방치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확인했다.”

1970년대 초부터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교련반대 시위, 유신 반대 민주화운동을 선도함에 따라 휴교령도 빈번하게 내려졌다. 1971년 교련반대 시위로 촉발된 휴교령 하에서 음대생들은 휴교령 철회, 문교부 장관 사퇴 등을 요구하며 문교부 장관의 허수아비를 불태우는 행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학생들의 반발에 학교 당국은 자퇴 권고, 제명 등의 징계를 남발했고 보수 신문은 학생들의 데모를 “국적 없는 스튜던트 파워”, “망국의 데모”라고 하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한편 빈번하게 내려지는 휴교령에 대비하여 학업에 소홀함이 없도록 각 대학마다 학생들에게 일정한 학과 과제를 내주기도 하였다.
1975년 캠퍼스 종합화와 함께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게 되면서 학생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학회 조직이 단과대학별로 재편되었다. 학회는 학생 교육을 비롯하여 집회 및 시위를 직접 계획하고 학생들을 동원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1975년 3월 14일 자연계열 기초과정 학생 300여 명의 집회를 시작으로 학원민주화를 주장하는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4월 이후 학생들의 학원 민주화 요구는 더욱 가열되었고 연일 시위가 이어지자 학교당국은 4월 8일부터 전 단과대학의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종합화 이전의 휴교가 단과대별로 내려진 조치였다면 종합화 이후는 전 대학이 동시에 휴교에 돌입하는 ‘휴교의 종합대학화’를 특징으로 했다.

서울대학교 총장이 학부모에게 보내는 서신, 1975. 8. 12. 안건훈 동문 기증

서울대학교 총장이 학부모에게 보내는 서신
1975. 8. 12. 안건훈 동문 기증
서울대학교 윤천주 전 총장이 서울대학교 학부모에게 보낸 서신이다. 교직원의 적극적인 노력과 학생제군의 능동적인 협력으로 학원의 정상을 복구하여 마침내 제1학기 학사일정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제2학기 등록일정과 등록금 인상, 관악사 개관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 우리 서울대학교는 희망에 찬 제2학기의 문턱에 들어서는 등록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학기는 지난 학기 전반의 허를 메꾸고 나아가서는 학생들로 하여금 모처럼 고조된 향학열을 더욱 불타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학원 내부에서 민주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한편에서는 대학 자율화를 위한 대학 개혁 논의가 활발하게 논의되는 시점에서 1980년 ‘5·17쿠데타’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학교는 104일 동안의 휴교에 들어갔다. 어렵게 재건된 학생회는 곧 해체됐으며 휴교 기간 동안 학칙개정, 학도호국단 체제 부활, 과외금지, 졸업정원제채택, 서클등록허가제 등 학내외에 걸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인문대학장이 학생에게 보낸 가정통신문 및 가정학습용 과제물. 1980. 6. 남동신 교수 기증
인문대학장이 학생에게 보낸 가정통신문 및 가정학습용 과제물. 1980. 6. 남동신 교수 기증

1980년 5월 17일에 시행된 전국 대학 휴교령으로 인해 계획된 강의 진행이 불가함을 알리고 보완 조처의 일환으로 가정학습용 과제물을 보낸다는 내용을 담은 가정통신문이다. 과제물에는 ‘80 1학기 기초과정 과제로 과목명, 담당교수, 과제내용(학습범위, 과제, 참고서적, 학습내용별 방법), 제출기한, 제출처가 표기되어 있다. 이 휴교령은 1980년 8월 28일 104일 만에 해제되었다.

비상계엄령, 위수령 등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거듭되었던 강제 휴교도 1980년 5월 17일에 시행된 휴교령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정부의 휴교 처분에도 학생들의 분출하는 민주화 의지는 막을 수 없었다. 사회적 변혁을 추구하던 당시 학생 운동의 전개 과정은 반복적인 휴교의 아픈 역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남겨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7.
서울대학교 기록관, 『지성과 역동의 시대를 열다 1953-1975』,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도약의 나래를 펴라 1975-2017』, 2017.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사료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담당부서/기록관 (http://archives.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