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인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는 전두환 신군부(新軍部)의 권력 찬탈에 대항하며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시민들의 치열한 저항이 있었다. 이후 45년간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고 정신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사회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독재에 대한 항거와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이 끊이지 않았던 서울대학교도 5·18 민주화운동과 1980년대 학생운동의 의의를 되새기고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5·18 민주화운동 45주년을 맞이하여 서울대학교 구성원들이 민주화를 위해 기울였던 노력과 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방식을 살펴보았다.
서울대학교 기록관에서 학생운동의 흔적을 찾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75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기록관(이하 기록관)은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자료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광주에서 발생한 5·18 민주화운동의 자료를 서울대학교가 보유하고 있는 의의에 대해 기록관 정병설 관장은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독재와 특권에 대항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완성하려는 노력으로 이룩됐다. 여기에는 많은 시민과 서울대학교 구성원의 자기희생이 있었다”라고 밝혔다.
‘2000여 광주시민의 넋과 김태훈 학우 앞에’ 대자보 (기록관 제공)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작성한 ‘폭력 정권 타도하자’ 대자보(좌) / ‘횃불은 다시 타오르리!’ 대자보(우) (기록관 제공)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한 다음 해인 1981년 5월 27일, 광주 출신인 김태훈 열사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진행되던 중 도서관 6층에서 “전두환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치며 투신했다. 정병설 관장은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이 정부의 엄격한 통제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정부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시민들을 폭도라고 불렀다”라고 증언해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여기에 “엄혹한 상황에서도 5·18 민주화운동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던 학생들의 움직임에서 안타까움과 분노,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인터뷰에 응하는 서울대학교 기록관 정병설 관장
시국에 대한 견해를 밝힌 ‘시국선언문’(좌) / ‘서울대학교 교수 시국선언(안)’(우). (기록관 제공)
1980년 작성된 ‘서울대학교 교수 시국선언(안)’은 5월 19일 이사회를 소집하여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및 휴교령이 내려져 실현되지 못했다.
정병설 관장은 1986년 학생회관에서 일어났던 이동수 열사의 투신 현장에 있었다고 밝히며 그날을 회상했다. “이동수 열사는 5·18 민주화운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며 진실을 알리고자 몸을 던졌을 것”이라며 故 문익환 목사가 서울대학교에 강연하러 온 날, 아크로폴리스에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는데 학생회관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졌다고 전했다. 또한 “서울대학교 학생이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진 장면이 사진으로 남아있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그날은 故 문익환 목사의 방문으로 사진기자를 포함한 여러 언론인이 현장에 있었기에 유일하게 보도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라고 덧붙였다. 정병설 관장은 “‘아니오’라고 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노예가 된다”라는 이동수 열사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재의 민주주의가 많은 사람의 기여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라고 전했다.
당사자가 이야기하는 1980년대의 학생운동
1985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입학해 한국 현대사를 전공한 박태균(국제대학원) 교수는 당시의 학생운동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박태균 교수는 “정부는 체포된 학생들을 강제로 입대시키는 방법으로 학생운동을 탄압했다”라고 언급하며 “학내에 전투경찰이 상주하고 있어서 학생 시위는 비밀리에 갑자기 모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라고 이야기했다. 이후 학원 자유화 정책이 시행되었을 때에는 시위가 발생하면 학내에 경찰이 진입하여 최루탄을 발사했으며, 학생들이 있는 과방으로 최루탄이 날아오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이 교수 연구실에 숨으면 전투경찰이 교수를 폭행하거나 사과탄이 수업 중에 강의실로 들어오기도 했다며 그때의 학내 분위기를 전했다. “현재 풍경과는 다르게 1986년에는 버들골에서 시위 중인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라는 박 교수의 이야기는 지난 40여 년간 이루어졌던 한국 사회의 변화를 환기했다.
학생운동에 참여하던 당시를 회상하고 있는 박태균 국제대학원 교수
‘오월함성, 창간호’의 표지. 5·18 민주화운동을 알리고자 하는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기록관 제공)
박태균 교수는 5·18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시민들이 민주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며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학생회관이나 과방에서 NHK와 독일 방송국의 기자들이 찍은 5·18 민주화운동 현장 비디오테이프를 시청했다”라며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알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또한 “정부가 진상을 밝히지 않으니 소문으로는 ‘몇천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퍼졌고, 학생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라고 전하며 학생들의 반응을 소개했다.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게 되면서 학생운동에 뛰어든 이들이 굉장히 많았다”라며 5·18 민주화운동이 갖는 상징성과 파급력을 강조했다. 그는 “학생회는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한 무렵에 학교 축제를 했다. 제일 큰 학생 시위는 5·18 민주화운동 전후로 있었다. 형식은 축제였지만 학생들은 시위로 참여했다”라고 회상했다.
(좌측부터) 4·19 혁명에 대한 ‘다시 자유의 종을 난타하리’ 대자보 / 유신헌법 폐지를 요구한 인문대학과 사범대학의 ‘민주화 투쟁의 깃발은 이제 드높이 솟아올랐다’ 대자보 / 시국에 대한 입장을 밝힌 대학원생들의 ‘성명서 – 현 시국과 민주화 투쟁에 관한 우리의 입장 -’ 성명서 (기록관 제공)
박태균 교수 역시 정병설 관장과 함께 이동수 열사의 투신 현장에 있었고,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진 다른 현장에도 있었다. 1980년대에는 5·18 민주화운동 시기 전후로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수업을 거부했다. 박 교수가 2학년이었던 1986년, 대학생들을 휴전선 인근으로 보내 일주일간 지내게 하는 전방입소교육을 거부하고 2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신림사거리에서 시위했다고 증언했다. 이날 정치학과 4학년 이재호 열사와 미생물학과 4학년 김세진 열사가 분신했고 직접 목격한 박태균 교수는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때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열사들이 꿈에 나오기도 했다”라는 박태균 교수의 이야기에서 당시의 참상을 엿볼 수 있었다.
1980년 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계엄해제 리본’ (기록관 제공)
학내에 설치된 ‘민주화의 길’ 표지판
민주화를 위한 서울대학교 구성원들의 노력은 정부의 탄압에도 끊이지 않았다. 1960년 4·19 혁명에서 1987년 6월 항쟁까지 이어지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학생 시위는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었다. 학내에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거둔 19명의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기념비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2007년,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서울대학교는 ‘민주화의 길 조성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곳곳에 흩어진 추모기념물을 정비하고 안내표지판을 세우는 등 추모기념물을 하나의 길로 연결하는 작업을 2년에 걸쳐 만들었다. 2년 후 2009년 11월 17일, 4·19 공원에서 시작해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농업생명과학대학에 이르는 1.2km 규모의 ‘민주화의 길’이 완공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오랜 역사 속에서 저항과 투쟁을 통해 쟁취된 것이다. 박태균 교수는 “학생들은 ‘해서는 안 될 일’과 ‘하고 싶은 일’ 두 가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선배들이 이룩해 놓은 세상을 즐기기를 바란다”라고 조언했다. 박태균 교수의 조언처럼 선배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낸 민주주의를 누리면서도,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서울대학교 학생기자단
권의준 기자
gwoneuijoo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