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기 작가론: 만드는 인간, 드러나는 세계’ 포스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는 5월 8일(목) 예술복합동 201호 오디토리움에 백정기 작가를 초청해 특강 ‘만드는 인간, 드러나는 세계’를 개최했다. 국내외 주요 전시를 통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형성해 온 백정기 작가는 재료의 본질과 물질의 감각적 특성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과학적 실험과 조형적 사유를 결합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미술대학 조소과는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예술가들을 초청해 특강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이번 강연 역시 작가의 다양한 작업을 시간순으로 따라가며 조소라는 장르를 새롭게 사유해보고 작가와 직접 소통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풍경에서 소리까지, 재료와 감각의 실험들
‘Is of’ 중 내장산(2021)
강연은 백정기 작가의 연작 ‘Is of’의 소개로 시작됐다. ‘~는 ~로 이뤄진다’는 의미를 담은 작업이다. 작업 과정은 자연 풍경을 촬영한 뒤, 사진 출력에 쓸 잉크를 촬영했던 풍경 속 식물에서 색소를 추출하는 방식이었다. 그가 미국 코네티컷에 머무르던 당시 “그냥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게 아니라 내가 있는 장소의 식물에서 색을 추출하고 식물이 자라난 풍경을 인쇄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식물에서 추출한 색소를 잉크로 만들어 풍경을 출력하며 실험했다.
귀국 후 실험적인 작업을 국내에 소개하는 과정에서 출력물이 시간이 지나며 변색하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마주했다. 백정기 작가는 “이를 계기로 색소를 잡아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오히려 작품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라며 “질소 가스를 넣어 밀봉하거나 철솜을 고온으로 가열한 뒤 밀폐된 용기 안에 넣어 내부의 산소를 제거하고, 자외선 차단 아크릴 박스나 레진 코팅 등을 활용한 보존 실험을 이어갔다”라고 말했다. 백 작가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모습이 내 작업에서 중요한 프로젝트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라며 “이후로 보존실험을 작업의 일부로 전환했다”라고 밝혔다.
Natural History Museum>(2024) (좌) / Candle Generator & Egg Incubator>(2023) (우)
다른 작업으로 ‘자연사 박물관’ 연작과 촛불 발전기 설치가 소개됐다. 백 작가는 ‘자연사 박물관’은 각기 다른 형태의 유리병에 물을 담고 라벨을 붙여 구성한 설치 작업이다. “나와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물이 몇 년 전에는 누군가의 몸속에 있었을지도 모를 물이라는 생각에서 작품이 시작되었다”라고 회상하며 작품이 물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혔다. 덧붙여 “박물관에는 동물들의 표본과 라벨들이 있고 그 동물의 서식지와 특징을 설명하는데, 이 작업에는 동물은 없지만 물이 있다”라고 해설했다. 작가는 고정된 형태 없이 다양한 그릇에 담기는 물의 특성을 통해 생명체 역시 물이 잠시 머무는 그릇일 뿐이라는 생각을 전하고자 했다.
강연 후반에는 작가가 촛불 발전기를 활용해 제작한 전자첼로 작업 영상이 상영됐다. 조용한 강연장 안에서 영상이 흘러나오자, 학생들은 스크린을 바라보며 장치의 움직임과 소리에 집중했다. 영상이 끝난 뒤, 백 작가는 “촛불의 열이 전류로 변환되고 이 전류가 전자첼로에 연결되며 불안정한 소리를 만들어낸다”라고 원리를 설명했다. “열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소리도 떨리고 깨지는 것처럼 들린다”라며 불확정성이 자기 작업의 일부라고 덧붙였다.
작가와 나눈 작업 뒷이야기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되자 학생들이 연이어 손을 드는 광경이 이어졌다. 실험 장비를 직접 설계하고 조작하는 작업 방식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작업을 묻는 질문이 활발하게 오갔다. “작가님의 오래된 팬”이라고 밝힌 학생은 “과학자 같기도 하고 철학자 같기도 한 모습이 인상 깊었다”라고 감상 소감을 전했다. “그런 과학적 지식들은 보통 어떻게 익히고 실제 작업에 적용하는지”를 물었다. 백정기 작가는 “어릴 때부터 완성품보다 조립식 장난감을 더 좋아했고, 장치를 손으로 직접 조립하고 실험하면서 배워왔다”라고 설명했다. 장비는 대부분 독학으로 이해하고 구성했다고 덧붙였다.
다른 학생은 작가의 사진 작업에 주목하며 풍경을 촬영할 때 어떤 기준이 있는지 물었다. 백 작가는 “국립공원이 굉장히 흥미로운 공간”이라며 “제도적으로 구획된 자연을 보존한다는 전제를 가진 공간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놓은 풍경이기도 하다”라고 답했다. “공간이 자연인지 아닌지 판단이 모호할 수도 있지만 저의 감각에서는 이런 것이 자연이라고 생각하고 찍었다”라고 설명했다.
백정기 작가는 조소과 학생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의 재료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 “재료가 많을수록 오히려 작업이 안 될 수 있다”라며 작업 초기에 자신은 버려진 목재 조각이나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어떤 재료를 쓰느냐, 어떤 도구를 갖고 있느냐가 사고방식 자체를 바꾼다”라고 강조하며 “재료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나의 의도만으로 작업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강연을 진행하고 있는 백정기 작가의 모습
강연은 작가가 작업을 구상하고 구현해 온 과정을 들으며 실험과 실패, 재료와 감각이 어떻게 예술로 형상화되는지를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자연에서 얻은 색소를 프린트에 활용하거나, 촛불의 열로 병아리를 부화시키고, 전기를 만들어 전자첼로를 연주하는 장치를 구성하는 등, 기술과 감각, 생명과 이미지가 만나는 과정을 예술로 전환해왔다. 그의 작업실은 실험실처럼 작동하며 조각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변화하고 개입되는 흐름으로 제시한다. 실험적인 작업들을 조형 예술로 접하거나 창작에 관심 있는 교내 구성원들이 재료와 호흡해 나가는 조형 예술을 새로운 상상력으로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서울대학교 학생기자단
정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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