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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교수 인사말 (국사학과 정옥자교수)

2007.08.31.

서울대는 8월 31일 오전 정년을 맞은 교수 19명에 대한 정년퇴임식을 거행하였다. 국문과 오세영 교수, 철학과 이명현 교수, 정치학과 김홍우 교수 등 학계를 대표하는 교수들이 정년퇴임을 맞았고, 이들을 대표해 국사학과 정옥자 교수가 아래와 같이 인사말을 전하였다.

[정옥자 교수 퇴임사 전문]

안녕하십니까? 우선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이 때 조촐한 정년퇴임식을 마련해주신 총장님이하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무더위에도 이 자리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신 학내 구성원과 가족 친지 여러분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함께 정년하시는 동료 교수님들께 정년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대표 인사를 하게 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돌아보니 엊그제 서울대에 부임한 것 같은데 정년이라니 스스로 믿기지 않습니다. 정년퇴임식을 이렇게 하고 있으니 갑자기 늙은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만 후련함이 앞서는 것은 그동안 서울대 교수라는 짐이 무척 버거웠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80년대 살벌했던 교정풍경이 떠오르며 만감이 교차합니다. 아쉬움보다는 홀가분함, 不羈之士(불기지사: 고삐에 매이지 않은 선비)에 대한 동경이 더 큽니다.

몇 년 전 정년을 한 선배가 “나는 좋은 시절에 교수생활을 하고 떠나지만 남아 있는 후배들이 걱정스럽다.”고 했는데 제가 바로 그런 심정입니다. 사회적으로 대학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서울대가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서울대는 개교 60년이 넘었습니다. 인생으로 치면 환갑이 지났지만 역사학자로서는 일말의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나라 국립대학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소급할 만큼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건만, 서울대가 그 역사를 계승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서울대의 정체성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민족의 대학’이나 ‘겨레와 함께 미래로’등의 표어는 표어일 뿐 서울대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멀고 서울대 법인화문제나 재정문제 등은 방법론에 불과할 뿐입니다. 서울대의 목표는 무엇이며 얼마나 큰 뜻을 키워 어떤 인재를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서울대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서울대가 똑똑한 인재를 많이 키워 사회에 배출해낸 공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60년의 서울대 역사만큼이나 현대사에서 서울대가 갖고 온 비중도 큽니다. 그럼에도 서울대폐지론이 나오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재탱크의 역할을 한만큼 서울대 출신이 누려온 특권의 그림자도 짙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아무리 대학이 취직예비학교로 전락하고 있다고 해도 대학의 사명은 역시 훌륭한 인재를 키우는 것이고 그것은 국가의 생존과도 직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머리만 좋고 의식이 트이지 못한 도구적 지식인의 확대재생산이라는 서울대 매카니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뜨거운 가슴 없이 차가운 머리만 가진 지식인의 한계를 극복해고 감성과 이성이 잘 조화된 균형 잡힌 인재를 키우는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대학의 지나친 물량화를 경계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학이 발전하기 위하여 물적 기초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칫 여기에 지나치게 비중을 둔다면 대학의 체통이 무너지고 속물화될까 우려됩니다. 서구의 대학 평가기관에 너무 종속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나아가 대학의 물량화가 몰고 오는 비판의식의 마비현상에 대하여 지적하고 싶습니다. 대학이 지식인의 집결지임을 전제한다면 대학의 비판의식은 국가의 원기라고 생각합니다. 군사정권의 독재에 대학이 저항하고 민주화운동을 벌인 것도 결국 대학의 비판의식의 발로였다면, 현재나 미래에도 대학은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갖되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결론으로 修己治人(수기치인: 자신의 학문과 인격을 닦아 남을 다스림)에 대하여 생각해 볼까 합니다. 자신의 학문과 인격을 닦아 남을 다스린다는 전통시대 수기치인의 선비정신은 현재 서울대인에게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지식의 전달이라는 반쪽 수기에서 사람다운 사람 만들기에 좀더 비중을 두는 전인교육의 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질적으로 잘 살기보다 보람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도 수기는 중요하다고 봅니다. 남을 다스린다는 치인은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고 봉사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혜택과 누림의 자세에서 벗어나 엘리트의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해서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서울대는 대한민국의 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에너지를 펌프질하는 인재의 보고이기 때문입니다. 심장이 약해지면 나라가 흔들립니다.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서울대는 큰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서울대라는 나무는 비바람이 불고 가는 길이 험난할수록 더욱 단련되어 큰 나무가 될 것입니다. 지식인의 책무에 대한 열정을 공적인 일을 우선하고 사적인 것은 뒤로 하는 先公後私(선공후사: 공적인 일을 먼저 하고 사적인 일을 뒤에 함)의 정신으로 발현하며 전통에 든든하게 뿌리를 박고 시대에 맞는 창조력을 발휘하는 法古創新(법고창신: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의 정신으로 거듭나서 낙락장송으로 우뚝 서리라 기대합니다.

어디선가 읽은 ‘잘 사는 길은 익숙한 것들과의 산뜻한 결별’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단념, 체념, 마음비우기 등과 같은 말이지만 더 호소력이 있습니다. 마음을 비워야 마음의 평화가 오고 마음이 평화로워야 몸도 건강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생각합니다. 공자는 ‘60에 이순(耳順)하고 70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 했습니다. 정년이 되어 칠순을 바라보면서도 남이 무슨 말을 해도 귀에 거슬리지 않고 이해하게 되는 이순의 경지에도 못 미치고 있지만, 70에는 내 하고자 하는 바대로 해도 크게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2007. 8. 3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정옥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