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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건축] 과학과 건축, 그 만남과 헤어짐의 소사(小史) - 홍성욱

2008.03.25.

과학과 건축, 그 만남과 헤어짐의 소사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과학자 겸 건축가였다. 그는 해부와 기하학을 연구한 과학자였고, 스포르짜 공과 같은 귀족의 건축가로 고용되어 그의 집과 교회를 설계했던 건축가였다. 다빈치는 기하학적 지식을 건물의 디자인에 적용했고, 건축에서 실용성과 미학을 동시에 추구했다.
17세기 영국의 수학자였던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 1632-1723)도 과학자 겸 건축가였다. 렌은 영국의 왕립협회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고, 1666년에 런던 대화재가 도시의 대부분을 불태운 뒤에 런던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을 끌고 있는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St. Paul Church)이다. 렌은 세인트 폴 성당 외에도 그리니치 천문대를 비롯한 많은 건물을 설계하고 건설을 감독했다.
그렇지만 17세기 이후에 과학자 겸 건축가로 활동한 사람은 많지 않다. 과학과 건축 모두 전문화되고, 유명한 과학자나 뛰어난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서 오랜 시간에 걸친 전문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건축은 과학에서 멀어지면서 예술과 테크닉에 접목했다. 다른 전문분야의 발전이 그렇듯이, 건축과 과학의 관계는 점차 소원한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전문분야로서 과학과 건축과의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이 이들의 상호작용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들은 계속해서 과학에서 영감을 발견했다. 18세기 계몽사조시기에 ‘환상적인 건축물’을 수없이 설계해서 이후 건축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프랑스 건축가 불레(Etienne-Louis Boullee, 1728-1799)는 “아이작 뉴턴을 위한 기념비”(그림 1)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설계했다. <그림 1>의 맨 위의 그림은 불레가 기념비의 외관을 가상적으로 스케치한 것이다. 사람이 개미만한 점으로 표시된 것에서 비추어 이 건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가운데 그림은 밤에 보는 뉴턴 기념비인데, 바깥세상이 어두운 밤이 되면 기념비의 내부는 특수한 등불을 밝혀 대낮처럼 밝게 유지되었다. 이는 뉴턴의 빛과 색깔에 대한 광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맨 아래 그림은 낮에 보는 뉴턴 기념관이다. 위와는 반대로 바깥세상이 환하게 밝을 때 기념비 내부는 어둡게 유지되었고, 오직 천정에 뚤린 작은 구멍들을 통해서만 빛이 들어왔다. 따라서 내부에서 천정을 올려다보면 천정이 마치 밤하늘을 보는 것 같았는데, 이는 뉴턴의 우주론과 천체역학에 대한 기여를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림1. 프랑스 건축가 불레의 '아이작 뉴턴을 위한 기념비 설계도)' 왼쪽은 외관의 스케치, 중간은 밤에 보이는 기념비의 단면도, 오른쪽은 낮에 보는 기념비의 단면도를 그린 것이다

그림2. 워터하우스가 건축한 런던의 자연사 박물관, 독일 로마네스크 양식과 1층에 마련된 거대한 홀로 유명하다19세기에 등장한 자연사 박물관과 과학기술 박물관은 과학과 건축의 접점이 만들어진 또 다른 공간이었다. 실험실과 달리 박물관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유명한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박물관의 내부는 자연적이거나 과학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시하는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1881년에 개관한 영국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은 건축가 워터하우스(Alfred Waterhouse, 1830-1905)가 독일 로마네스크 스타일로 설계한 외관과 공룡의 화석을 전시한 거대한 홀로 유명하다 (그림 2).

그렇지만 이 박물관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생물학자와 건축가 사이에 마찰과 갈등도 있었다. 그 이유는 건축가들이 박물관의 외관과 전시 기능을 강조한 데 반해서 과학자들은 박물관의 연구 기능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과학자들은 자연사 박물관에 관람객들의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장식과 장엄한 구조가 너무 많아서 관람객들이 동식물 표본을 꼼꼼하게 관찰하는 대신에 박물관의 건물을 구경하는데 정신이 뺏길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과학자들은 박물관의 1층에 설계된 거대한 홀이 마치 교회의 내부와 흡사해서, 관람객에게 과학이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외관을 중시하는 건축가와 전시물을 강조하는 과학자의 갈등은 요즘도 박물관의 설계와 건축을 둘러싸고 종종 나타난다.

그림3. 리비히의 실험실(아래)과 그의 연구소의 평만도(위)19세기 이후에는 대학에 연구소와 실험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원래 실험실은 중세 말엽과 근대 초엽에 활동하던 연금술사들의 ‘부엌’에서 유래한 것으로, 17-18세기에는 부유한 과학자들이 자신의 저택에 마련한 사적(private) 공간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다 19세기 초엽 독일 기슨대학의 화학자 리비히(Justus Liebig, 1803-1873)가 실험실에서의 교육을 통해 성공적으로 과학 연구를 대학에 정착시킨 이래, 화학, 물리학, 생물학, 지질학 같은 자연과학의 분과학문에서도 실험실을 짓고 여기서 학생들을 교육하면서 그 결과를 가지고 연구 논문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림 3). 리비히의 실험실은 이후 독일과 다른 나라의 화학 실험실과 물리학 실험실의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물리학 연구소와 실험실은 1850년대 이후에 설립되기 시작했다. 이 연구소 중에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냈던 곳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븐디쉬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이다. 캐븐디쉬 연구소는 18세기 영국의 귀족과학자였던 헨리 캐븐디쉬의 가계손인 데본샤이어 공작(Duke of Devonshire)의 기부에 의해 1871년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초대 소장으로는 당시 영국 최고의 물리학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을 초빙했다.

당시 맥스웰은 런던대학교의 교수를 지내다가 1865년에 은퇴를 해서 스코틀랜드의 덤프리스에 있는 글렌레어 저택(Glenlair House)에서 전자기학에 대한 저술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의 글렌레어 저택은 맥스웰의 아버지인 존 클럭 맥스웰이 1848년에 지방 건축가 뉴월(Walter Newell)과 함께 지은 것이었는데, 고향으로 돌아온 맥스웰은 전자기학 저술에 몰두하면서 1868년에 건축가 발보어(James Balbour)와 함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저택의 증축에 착수했다. 맥스웰에 의해 증축된 저택은 우아했지만 기하학적으로 깔끔하고 일체의 불필요한 장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림4. 1873년에 개관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븐디쉬 연구소의 평면도, 1층이 주로 정밀한 연구실험에 사용되었는데, 복도가 없기 때문에 학부생들의 접근이 어렵게 디자인 되어 있다

사람들은 맥스웰을 그의 이름을 딴 방정식을 완성한 이론 물리학자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맥스웰은 영지를 운영하고, 저택을 짓고, 장부를 기록하는 영지 소유자의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는 “복식 부기(double-entry bookkeeping)가 서양 과학 사상사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았고, 당시 엔지니어였던 랑카인(William Rankine, 1820-1870)의 영향을 받아 교각에 걸리는 힘을 계산하기도 했다. 맥스웰은 전신 엔지니어 젠킨(Fleeming Jenkin, 1833-1885)과 공동연구를 수행해서 저항의 표준을 만드는 정교한 실험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표준과 단위의 차원에 대한 이론적인 논문을 쓰기도 했다. 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집을 증축하는 일을 해보기도 했던 맥스웰은 케임브리지에 온 뒤에 건축가 포셋(W. M. Fawcett)과 함께 캐븐디쉬 연구소의 건물을 설계했다 (그림 4 참조).

캐븐디쉬 연구소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연구를 위한 실험실’(research laboratory)이다. 그렇지만 이 연구소를 지을 때 대학은 이를 학부 학생들을 위한 물리학 강의를 보조하기 위한 실험실로 간주했다. 사실 당시에는 체계적인 대학원 과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맥스웰도 학부 학생들을 위한 수업을 진행했고, 학부 학생들의 실험을 지도해야 했다. 그렇지만 맥스웰은 취임 초부터 이 연구소가 새로운 물리 연구를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실험을 통해 정밀한 측정을 하고, 이러한 측정과 이론을 결합시켜서 새로운 현상을 탐구하는 것이 캐븐디쉬 연구소의 본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문제는 학부 학생들이 자주 들락날락할 경우에 이러한 정밀한 실험이 방해를 받는다는 데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 연구소는 학부학생들의 실험교육을 위해 세워진 것이었고, 따라서 학생들의 출입을 막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맥스웰은 정밀한 실험이 진행되는 연구실에 학생들의 실질적인 접근을 어렵게 만듦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연구소의 1층을 정밀 연구실험을 위한 닫힌 공간으로, 2층을 학생에게 완전히 개방된 공간으로, 그리고 3층을 학생들에게 절반 정도만 열린 공간으로 구분했다. 그림 4에서 보듯이 캐븐디쉬 연구소의 1층 맨 구석에 있는 실험실 B는 고가의 실험기기를 갖춘 정밀 자기(磁氣) 측정을 위한 방이었고, 실험실 C에는 표준 시계와 표준 추가 설치되어 있었다. B와 C는 연구소 내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방해를 덜 받는 방이어야 했다. 1층에는 복도가 없이 방과 방이 연결되어 있었고, 따라서 학생들이 B나 C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방을 여러 번 거쳐야 했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는 학부 학생들이 정밀 실험이 행해지는 방에 접근하는 것을 실질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1층의 실험실 E에는 정밀한 저울이 있었고, 실험실 F는 맥스웰 자신의 실험을 위한 방이었다. 거리와 인접한 G는 실험 기기 상자를 푸는 방이고, H는 기기를 수리하는 작업실이었다.

반면에 2층의 L은 학부학생들이 실험을 하는 실험실이고, M은 교수 연구실, N은 기기실, O는 준비실, 그리고 P가 학부 강의실이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2층의 강의실과 실험실에 자유롭게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 2층은 누구에게나 쉽게 접근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반면에 3층의 Q는 음향학 실험실, R은 제도실, S는 열 실험실, T와 U는 광학 실험실, V는 전기 실험실, 그리고 W는 사진 현상을 위한 암실이었다. 3층은 고급 실험에 관심이 있는 학부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이 실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고급 실험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은 2층에서 강의를 듣고 일반 실험을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연구소에는 ‘출입금지’라는 표지판 하나 붙어있지 않았지만, 연구소의 구조는 학생들이 정밀 기기가 있는 1층의 방들에 출입하는 것을 실질적으로 무척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소의 공간 배치는 교육용 실험과 연구를 위한 실험을 구분해서 생각했던 맥스웰의 실험 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림5. LOUIS KAHN이 설계한 RICHARDS MEDICAS RESEARCH CENTER, 칸은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건축가 중 한명이었지만, 이 건물은 실험을 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자신의 연구소를 직접 디자인했던 맥스웰은 사실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연구소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건축되던 별 관심이 없다. 과학자들이 관심을 두는 부분은 연구소의 실험실이 실험을 하기에 편하게 설계되었는가라는 ‘기능적인’ 요소이다. 오히려 유명한 건축가가 디자인한 건물이 실험실로서는 빵점에 가까운 경우도 있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건축가 중 한명인 루이스 칸(Louis Kahn, 1907-1974)은 1962년에 완공된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의학연구소(Richards Medical Research Lab)를 설계했다. 건축에서 공간과 빛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칸은 펜실베니아 의학연구소에서도 커다란 창문들을 통해 햇볕이 공간 내부에 쏟아져 들어오도록 안배를 했다 (그림 5). 그렇지만 과학자들은 당장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 때문에 연구실의 온도가 올라가고 실험에 방해를 받는 등, 칸의 건축물이 실험실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신문지로 유리창을 막았는데, 자신의 건물 유리에 신문지가 도배되어 있는 본 칸은 청소부에게 이를 모두 걷어내라고 고함을 치곤했다. 연구자들은 다시 은박 포일을 이용해서 창문을 가렸고, 설계자인 칸과 힘든 협상을 통해서 결국 유리창을 가리는 용도로 은박 포일을 사용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아내기도 했다.

실험실의 디자인과 연구의 생산성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한 가지 연구결과는 연구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들이 접촉할 기회가 줄고, 이러한 접촉의 감소는 연구 팀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기업의 연구개발 팀을 10년 넘게 분석했던 MIT의 경영학자 알렌(Thomas J. Allen)은 연구자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에 비례해서 이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치면서 얘기를 나눌 확률이 줄어들고, 이렇게 서로 다른 주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우연히 만나서 얘기할 기회가 줄면 줄수록 연구팀의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기업의 CEO가 화장실, 커피 자판기, 복사기와 같이 서로 다른 연구팀의 “소통을 만들어내는 기계”의 위치를 전략적으로 핵심적인 곳에 놓아둠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우연한 만남의 빈도를 높일 수 있다고 충고했다. 미국의 물리학자들이 초전도가속기를 계획했을 때, 이들이 설계한 복도는 서로 다른 주제에 대해서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카페의 모습을 닮은 것이었다 (그림 6).

‘거리’가 중요한 요소로 판명이 난 경우는 알렌의 연구 외에도 또 있다. 미국의 저명한 건축가 사리넨(Eero Saarinen, 1910-1961)은 1940년대부터 1950년대에 걸쳐서 미국 대기업의 거대 연구소 몇 개를 설계했다.

그림6. 미국 초전도가속기 연구소의 복도(가상 설계도), 복도의 공간들이 마치 카페처럼 서로 다른 주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마주치고 만나서 아이디어를 쉽게 교환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그림7. 사리넨이 설계한 IBM의 WATSON CENTER, 외관은 당시 건축가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공장과 떨어져 있는데다 내부 설계의 문제 때문에 연구소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가 설계한 연구소는 제너럴모터스(GM)의 테크센터(Tech Center)를 필두로, IBM의 왓슨센터(Watson Center), 벨 연구소(Bell Lab)의 홈델센터(Holmdel Center)처럼 당시에 기술혁신을 주도하던 미국 굴지의 대기업 연구소들이었다. 그런데 그가 연구소를 설계할 무렵 미국에서는 순수과학을 지원하면 기술이나 산업의 발전이 거의 자동적으로 얻어진다는 선형(linear) 기술혁신 모델이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대기업들은 이러한 생각에 입각해서 마치 대학 캠퍼스를 모방한 것 같은 기업 연구소를 설계해 달라고 요구했으며, 사리넨은 이런 요구에 부응해서 공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독립적인 연구소나 연구 단지를 만들었다. 그가 설계한 연구소의 외관은 매우 수려하고 깔끔했으며 (그림 7), 연구소 내부는 협동작업보다는 연구원들의 프라이버시와 연구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구획되었다. 이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산업에서 필요한 제품 개발이 아니라 당장 상품화하기 힘든 기초연구에 주력했다.

기업의 임원들은 이러한 기초 연구가 조만간 기술혁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들의 결과는 실용적인 기술혁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GM의 경우, 기술혁신은 거대한 테크센터에서 보다는 공장에 붙어있는 작은 연구소에서 이루어졌으며, 벨 연구소의 경우에도 핵심 연구들은 새로운 홈델센터가 아니라 전쟁 이전부터 존재했던 머레이힐(Murray Hill) 연구소에서 나왔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기업은 1980년대 이후 독립 연구소의 기초연구 지원을 삭감하는 정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전문화가 가속화되고 학문 분야가 쪼개지다 보면 새로운 통합에의 갈망이 등장한다. 미국의 입자 물리학자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1914-2000)은 20세기에도 과학과 건축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그는 첫 번째 입자가속기를 만든 버클리 대학교의 로렌스(E. O. Lawrence)의 제자로 미국의 입자가속기 건설에서 둘도 없는 전문가였으며, 1967년에 설립된 미국 최대의 가속기 연구소인 페르미 연구소(Fermilab)의 첫 소장이었다. 윌슨은 페르미 연구소에 300GeV의 가속기를 건설했고, 최종적으로 1TeV의 거대한 가속기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러한 거대 연구소가 주변의 환경을 파괴하고 주민의 삶을 황량하게 한다는 환경주의자들과 시민운동가들의 비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가속기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페르미연구소를 친환경적이고 주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이 되도록 디자인했다.

그림8. 프랑스 보베의 고딕 성당과 페르미랩의 윌슨 홀, 윌슨은 보베의 성당에서 윌슨홀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연구센터인 윌슨 홀(Wilson Hall)은 그가 프랑스 보베(Beauvais)의 유명한 생피에르 대성당에서 영감을 얻어서 직접 그 골격을 디자인 한 것이다 (그림 8). 이는 중세의 고딕 스타일을 현대적 건물에 구현한 것인데, 마치 고딕 성당이 그렇듯이 두개의 거대한 건물은 1층부터 옥상까지 연결되어 있는 아트리움을 껴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아트리움에서 식물과 하늘을 구경하다가,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서 일리노이 주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윌슨은 홀 주위에 인공 호수를 조성하고 그 호수 중앙에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직접 조각했다. 그는 또 연구소의 정문에 ‘깨진 대칭’(Broken Symmetry)이라는 조형물을 세웠으며, 연구소 곳곳에 현대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상징하는 ‘뫼비우스의 띠’ ‘아르키메데스의 나선’과 같은 조형물들을 건립했다. 4km가 넘는 지하 가속기 위의 땅에는 초원을 복원해서 소떼를 방목할 수 있게 함으로써, 20세기 거대기술과 자연환경의 조우를 꾀했다. 이런 노력들은 과학이 과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건축이나 예술과 만남을 시도할 때 더 값진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였다.

그림9. 윌슨 홀과 보베성당을 비교하는 내부 평면도와 단면도, 윌슨의 스케치윌슨은 1969년에 의회의 원자력에너지 위원회에 출석해서 페르미 연구소의 엄청난 예산 사용에 대해 증언을 했다. 이 자리에서 존 페스토어 상원의원은 페르미연구소의 가속기가 국방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물었다. 윌슨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대답하자 상원의원은 “정말 이 가속기가 국방과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단 말인가”를 다시 질문했다. 이 때 윌슨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 가속기는 우리가 서로에게 관계를 맺는 방식, 인간의 존엄성, 문화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가속기는 우리나라에 좋은 화가, 좋은 조각가, 좋은 시인이 많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이 가속기는 우리가 우리나라를 존중하고 우리나라에 대해서 애국심을 느끼게 하는 그 모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가속기는 우리 조국을 수호할 가치가 있는 나라로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국방과 관련이 있지만, 그 외에는 국방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과학이 건축이나 예술처럼 문화가 될 수 있고, 다른 문화와 접목할 때 또 새로운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 이것이 과학과 건축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교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