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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랄 수도, 부추길 수도 없는!

2008.04.03.

나무랄 수도, 부추길 수도 없는!

고시 관련 과목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가 없고 이와 달리 심심치 않게 폐강되는 인문사회과학 교양과목들. 서울대학 내의 고시열풍, 그 원인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나무랄 수도, 부추길 수도 없는 고시열풍, 진정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국립 서울대학교의 고민

도서관 자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고시생들. 학문을 하기 보다는 수험을 위해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 입추의 여지가 없는 고시 관련 교과목과 심심치 않게 폐강되는 인문사회과학 교양과목들. 서울대학 내의 고시열풍, 그 원인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변해가는 세태 속에서 서울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학계와 공직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졸업생들과 재학생이 머리를 맞대고 짧지만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가져보았다.

대담 참석자
김창민(서어서문 88년 졸업, 인문대 교무부학장) “고시열풍은 사회구조적 문제... 국가와 학교가 보조를 맞추어 대응해 나아가야...”
김성준(가명, 외교학과 졸, 외무고시 합격) “97년 외환위기 이후 대한민국의 패러다임이 변화... 사적영역의 고용안정성이 약해진 것이 원인...”
류희현(서울대 법학과 재학중) “고시만큼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있는 관문은 없어... 폐지만이 능사는 아닐 것...”
정승화(서울대 경제학부 재학중) “고시에도 네트워크 효과가 존재... 가치관과 신념 없이 뛰어들지는 말아야...”

김창민 : 이렇게 밖에서 동문들을 만나니까 더욱 반갑습니다. 인문대 교무부학장으로서 고시열풍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어요.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었던 시절이었죠. 동기들이 사회운동에 열심이고, 징역을 사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나 홀로 고시생일 수는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날 고시열풍이란 이슈를 다루게 된 것도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는 증거겠지요. 다른 분들은 어떠셨나요?

김성준 : 저도 비슷했습니다. 80년대 초반에는 고시를 해도 숨어서 해야 하는 분위기였어요. 군대를 다녀오고 80년대 후반이 되니 분위기가 많이 변했더군요. 다행히 전공을 살려 외무고시를 하게 됐습니다.

류희현 : 저는 법대 학생이고, 법조계에 종사하는 것이 제 전공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고시를 하게 되었고, 고시가 제 꿈을 실현하는 관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승화 : 경제학부 사람들은 모두 행정고시 재경직렬 시험을 보는 줄 알고 대학에 왔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제 주변에는 1학년 때부터 고시를 시작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회의를 느꼈습니다. 군 제대 후 좀 더 큰 시야로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고, 굳이 고시가 아니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 자신의 적성보다 안정과 지위를 추구하는 학생들
김성준 : 저도 고시 출신이지만, 고시가 적성에 맞는 사람들이 많아서 고시열풍이란 현상이 일어났다고 보지는 않아요. 공무원이 적성에 맞는다고 하면 모르지만, 수험이라는 과정이 적성에 맞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류희현: 하지만 그 과정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사람은 존재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고시공부과정에서 오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 적성에 맞았습니다. 분명히 고시를 보는 것이 소질과 능력의 발현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생각해요

김창민 : 그래도 고시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 않습니까? 아마 시험별로 요구하는 적성이 다를 겁니다. 문제는 법조인으로서의 삶, 재경관료로서의 삶, 외교관으로서의 삶 등에 대해 깊은 성찰이나 동기부여 없이 일단 고시라는 걸 합격하고 보자고 달려드는 사람들입니다. 고시라는 게 어떤 메리트를 주기에 이런 현상이 있는 걸까요?

정승화 : 사회적 지위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뚜렷한 목표와 신념을 가지고 고시를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제 주변의 상당수는 고시 합격이 사회생활에 더 높은 출발점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내가 서울대 출신인데….’라는 생각에 남 밑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보다 남 위에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김성준 : 학생들의 그런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고시에 합격해서 조직에 들어가도 가장 밑바닥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오히려 사회적 지위보다 직업 안정성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패러다임이 변했습니다. 세계화와 맞물려 사적영역의 고용안정성이 흔들리는 것이죠. 따라서 진로결정에 고시가 주는 안정성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류희현 :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고시에 뛰어드는 이유도 주목해야 합니다. 남녀차별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고시를 통해서 여성이 안정된 직장과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김창민 : 고시가 노력에 비해 그 대가가 크다는 것도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교사도 평생직장이 보장되는데, 서울대 학생들은 굳이 사시나 행시를 합니다. 판검사나 대기업 사원이나 그 메리트에 큰 차이가 없다면, 지금처럼 많은 이들이 고시에 목매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의 구조가 바뀌어야 해요. 국가가 인재의 불균형적인 편중현상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 민간분야에 인재들 많이 흘러가야
김성준 : 현재 인적자원의 배분이 고시에 편중되어 있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사실 과거 정부 주도의 개발경제시대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정부영역에 종사하는 것이 바람직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주도하는 시대는 지났고, 이제 민간이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해요. 즉 인재들이 민간분야에서 더욱 활발히 활동해야 합니다.

정승화 : 그런데 요즘 취업난이 말해주듯 민간분야의 문 또한 넓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시를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개인의 비합리성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인 것이죠.

김창민 : 동감합니다. 하지만 과거에 뚜렷한 가치관과 신념을 가지고 공적영역에 지원하던 이들과는 달리 요즘의 고시생들의 목표는 개인의 안정이나 영달 등에 치우친 것 같아요.

정승화 : 사실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하는, 소위 말하는 네트워크 효과라는 것이 고시에 있습니다. 게다가 언어나 학문 쪽에 특출하지 못한 학생들은 자신들이 고시 말고는 딱히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류희현 : 학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법대에 온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판검사 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대학에 와서도 다른 진로를 찾을 동기가 유발되거나 실질적인 진로지도를 받아본 적이 별로 없어요.

김성준 : 고시를 로또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공무원의 생활도 회사 다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고시 합격 이후 하게 되는 일들에 대해 학생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줄 필요가 있어요. 학교가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창민 : 많은 인문대 학생들이 고시를 한다고 알고 있어요. 내 생각에 인문학을 열심히 한 후 고시에 합격하면 훨씬 훌륭한 판사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들 너무 마음이 급해서 그렇게 못 하는 것 같아요.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졸업생들이 종종 이야기하길, 인문학적 혹은 사회과학적 상상력이 리더의 입장에서 의사결정을 내릴 때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김성준 : 정부 입장에서는 항상 능력 있는 인재를 채용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이런 능력 있는 인재는 고시점수가 높은 이들이 아니라 사고의 폭이 넓고 세상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소양은 대학생활 동안 다양한 경험과 학문적 탐구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학교와 사회가 나서서 학생들이 다양하게 공부하고 경험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 정부 정책과 제도가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김창민 : 학생들이 다양한 고민을 하고 그 과정에서 학문적 탐구를 추구하게 된다는 점에서 볼 때, 로스쿨 제도로의 이행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부 때의 학점이 입학성적에 반영된다면 학생들이 학문을 소홀히 하지 않겠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로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하게 될 겁니다.

김성준 : 정부입장에서도 전문대학원 제도로의 이행, 채용루트의 다양화, 특채인원 증가 등은 이미 선택의 문제를 넘어선 하나의 추세라고 봅니다. 최근 고시도 단순 암기보다 이해와 사고력을 요하는 문제들로 바뀌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창의력 있는 인재를 원하는 것이죠. 게다가 이미 외교통상부 내에서도 반 이상이 고시 이외의 경로로 취직을 한 사람들입니다. 사회가 새로운 형태의 인재를 원하고 있고, 정부도 이에 부응하는 것이죠.

정승화 : 다만 요즘 심심치 않게 논의되는 것처럼 고시와 연관성이 적은 비인기학과나 정원미달학과에 대해 인센티브를 부여해 학생들을 끌어모으는 식의 정책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서 얘기됐듯이 고용안정성이 고시열풍의 한 이유라는 점에서, 단순히 장학금이나 유학 보장 등의 인센티브 제도는 미봉책에 불과할 것입니다. 차라리 지나치게 인기를 얻고 있는 측에 디스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김성준: 서울대의 역할만으로는 이러한 고시열풍을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정부, 기업, 대학, 사회가 모두 변해야 가능한 일이죠. 교육의 문제를 교육영역 안에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김창민 : 정부가 전문대학원 제도, 로스쿨 제도 등 제도의 변화를 통해 고시에 대한 매력을 상대적으로 떨어뜨리고, 학교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진로에 대한 정보를 주면서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한다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는 고시에 대한 네거티브 전략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새로운 상상력과 대안을 부여하는 것이죠.

류희현 : 고시가 인적자원의 배분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은 분명한 문제라고 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시라는 창구를 아예 봉쇄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시 합격이 고용안정성과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한다는 점에서, 고시만큼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있는 관문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정승화: 사실 고시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빨리 합격하기 위해 빨리 고시공부를 시작하게 되는 데 있다고 봅니다. 남자는 28세, 여자는 26세가 취직하는데 심리적 마지노선이라고 해요. 고시도 그 전에 결과를 얻기 위해서 더 빨리 시작하게 되고 그래서 세상과 조우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성준 : 맞는 얘기입니다. 지금 20대가 사회에 진출하면 평균수명이 100살이 되리라는 예측도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젊을 때 공부를 통해 성장하는 기간도 길어져야 해요. 사회에 빨리 진출하는 것보다 급변하는 사회에 잘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배양하고 진출하는 게 중요합니다. 앞으로의 사회는 상상력이 매우 필요한 시대예요. 5년 늦게 사회에 진출하더라도 20년 더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나아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대학교 홍보부
학생기자 이재준
<서울대사람들> 12호 게재 (2007. 12. 1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