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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신뢰-허남진 교수

2008.04.03.

기묘한 신뢰

선배, 후배, 동기를 막론하고 오랜만에 서울대 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많이 변했다’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라는 말이 꼭 따라 나온다. 관악으로 온지도 벌써 30년이 지났으니 풍경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는 게 당연하건만 자꾸 옛날을 들먹이는 건 마음속에 무언가 아쉬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 오랫동안 서울대에서 강의를 해 오신 선배 한 분이 이제 더 이상 강의를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서울대가 변해서 더 올 마음이 안 생긴다고 대답 하길래 뭐가 변했냐고 따지고 물었더니 ‘자존심만 세지고 자부심은 없어졌다’는 선문답을 남기고 홀연히 가버렸다. 고전적인 강의 스타일과 짠 학점을 놓고 학생들과 크게 다투는 바람에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내가 한 첫마디는 ‘많이 변했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였다.

옛날 학생들이라고 다 학점에 신경을 안 쓴 것도 아니고 요즘학생이라고 모두 학점의 노예인 것도 아니지만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서울대가 가진 자부심의 원천은 공부였다. 오죽했으면 풍속가요에 ‘공부 못하고 죽은 놈 서울대 앞에 묻어주소’라는 구절이 있었겠는가. 또 옛날이야기이지만 옛날에는 교수와 학생간의 기묘한 신뢰가 있었다. 교수는 ‘아무렇게나 가르쳐도 학생들이 알아서 공부하겠지’하는 신뢰가 학생들은 ‘뭘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최고이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거기서 마음대로 가르치고 알아서 공부한다는 서울대의 특이한 문화가 생겼다. 그 때에는 교수님들 강의스타일도 정말 제각각이었다. 요즘처럼 시간을 꽉 채워 빈틈없이 강의하시는 분도 계셨지만 그냥 노트를 읽는 분, 칠판을 보고 혼자 강의하시는 분, 원서 갖다놓고 죽 해석해주시는 분 가지각색이었다. 그래도 아무 불만이 없었다. 공부는 각자가 알아서 하는거니까 공부한 만큼만 들어라는 식이었다. 적어도 공부에 관한 한 이렇게 자부심이 높은 서울대생들이 자신감을 잃을 때가 있는데 그건 동료와 토론할 때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때는 혼자서는 도저히 못할 것 같은 최신 분야를 독학으로 공부하여 일가견을 이룬 친구들도 꽤 많았다. 어떤 수업시간에는 교수님께 배우는 것 보다 학생에게 배우는 게 훨씬 많았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자부심은 높지만 자신감은 없다보니 성적에 불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성적이 좋으면 행운이고 나쁘면 경고 안 받은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다. 교수가 성적을 주는 기준도 하도 다양해 예측도 거의 불가능했다. 선풍기로 과제를 날려 성적을 준다는 등의 신화가 많지만 믿을 건 못되고 한 경우는 확실히 알고 있다. 선배 한 분이 굉장히 열심히 리포트를 썼는데 C가 나와 항의했더니 선생님 왈 ‘아니 이번 학기는 내가 건강이 안좋아 별로 가르친게 없는데 어떻게 그 이상 주나?’하시길래 그냥 왔다는 이야기이다. 성적의 기준이 당신께 있어 전부 C를 주었다는 데야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는 선배의 후언이다. 그 배후에는 교수와 학생간의 기묘한 신뢰가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옛날의 그 교수님도 안 계시고 그런 수업을 참고 들을 학생도 없으니 ‘마음대로 가르치고 알아서 공부하는’ 서울대의 특이한 문화도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 뿐이다.

<서울대사람들> 1호 게재 (2005. 9. 15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