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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과 공동의 재판부 구성을 꿈꾼다-박은정 교수

2008.04.03.

학생들과 공동의 재판부 구성을 꿈꾼다

강단에 선 이래 나는 신학기 첫 시간 수강생들과의 상견례를 내 나름대로 대체로 이런 식으로 치뤄 왔었다. 우선 한 두 학생들에게 다가가 몇 학기 째 공부하느냐고 묻는다. 그런 다음 나 자신에 대해서도 대학 입학부터 재학, 유학, 재직 년 수를 학기로 환산하여, 나는 00학기 째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는 이유를, 교수란 영원한 학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런 다음, 학생들이나 나나 법과 씨름하면서 좀더 알고 지혜로워지고자 탐구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지위에 놓이며, 그래서 나는 학기 내내 이 강의실을 학생들과 내가 공동으로 구성한 재판부로 여기겠노라는 취지의 말을 보탠다. 그렇게 시작하면 학생들은 우선 내 학기 경력에 압도된 듯 약한 탄성을 내뱉는다. 아마도 약간의 외경도 보태졌을까......

90년대 후반까지 이 의식은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니까 “나는 오십 몇 학기 째 학생입니다”를 전후로 뚜렷한 이유없이 그런 식의 상견례를 슬그머니 그만 두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의식을 통해 학생들이나 내게 전해지던 감동이 언젠가를 기점으로 이전과 같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세월은 흘렀다. 세상도 변했다. 학생들에게 이제 엄청나게 불은 내 학기 수는 거리감, 부담, 권위, 진부의 상징으로 비칠 수도 있다. (나 또한 내 나이보다 두 배로 늘어나면서 쌓이기만 하는 숫자가 뭐 그리 대견스럽겠는가.) 그러나 공동 재판부 구성에 대한 기대만은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대학에서 교수/학생, 연구/교육의 이분법적 도식은 점점 의미를 잃어 가고 있다. 사회전체가 거대한 학습공동체로 변해가는 지식기반사회에서 기술적 도약이 사회변화의 동력이 되다 보니 눈을 뜨면 새로운 것이 생기고 익숙한 것이 없어진다.

내가 강의실에서 교과목이 아니라 학생으로부터 출발해보고 싶은 생각을 강하게 가지는 것도 이런 세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정보사회에서 개인의 정보수집능력 향상으로 학생들은 이미 개인으로서 상당한 능력자가 되어 있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쏟아지듯이 지식과 정보들이 콸콸 쏟아지는 사회에서 나는 정보에 치여 사는데, 학생들은 정보를 즐기고 있다!

캠퍼스가 주는 행복감은 정신적 소통으로부터 온다. 도서관의 위대한 저술가들과 교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내면적인 큰 힘과 안정! 동료들과 대화를 통해 -대화란 상대방의 이성을 활용하는 것!- 스스로도 지적으로 고양되는 즐거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소통의 행복감은 학생들로부터 온다. 전승된 사유의 무게에 눌리지 않았기에 자신의 독특한 시각을 불꽃같은 순수함으로 분출하는 젊은 영혼이 수업에 제공한 에너지로 나 자신이 새로워지는 체험!

진부한 말이지만 공부는 할수록 어렵다. 내가 전공하는 법만 해도, 다른 사람의 운명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것에 관한 공부인 만큼, 신중하게 캐들어 가고 따지지만 그럴수록 설명은 복잡해지고 합의는 빈곤해져 해답은 요원해 보인다.

그러니 어쩌랴, 더 열린 마음으로 사는 수밖에. 내 편견이나, 상식, 전승된 사유의 진부함으로 남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며, 항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로 긴장하며 사는 수밖에. 내가 학생들과 공동의 재판부 구성을 꿈꾸며 학습연대를 결성하고자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솔직히 교수가 두려워하는 것은 총장도, 평가도, 연봉제도 아니다. 학생들이다. 그들이 교수에게 긴장과 새로움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대사람들> 5호 게재 (2006. 5. 15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