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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칼럼

오작교를 다시 건너다-김현진 교수

2008.04.03.

오작교를 다시 건너다

자하연이 이보다 아름다웠던 적은 없다. 7월의 비 갠 오후 우거진 녹음 사이로 세월이 방울방울 떨어져 연못을 물들인다. 나무 계단을 걸어 내려와 관망대 끝에 서니 사방 여름 향기가 그득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곳이지만 이만치 밑에서 보니 세상이 온통 딴 곳 같다. 나뭇가지로 울타리를 친 하늘이 오늘따라 아늑해 보이고 그 너머로 학생들의 가벼운 웅성임이 가까워졌다 다시 멀어진다. 그들은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까. 내가 느끼는 것을 그들도 느낄까. 계절은 아직 젊디젊은데 지나간 옛 여름의 향취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지금 내 눈 앞에는 오작교가 놓여있다. 흰 페인트칠 벗겨진 볼품없는 시멘트 아치, 이제는 건널 수 없는 세월 속의 다리이다. 다리 오른 편으로 낯익은 식당 건물 대신 봉긋한 소나무 언덕이 보인다. 우리가 문학지대라 부르던 곳, 그 언덕을 돌아내려와 한발 한발 오작교를 건너본다. 다리를 건너 벽을 끼고 걷다 1동과 2동 사이 통로로 들어서면 그 손닿을 듯 가깝고 아련히 먼 곳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열리고 기억의 책갈피가 선명히 펼쳐진다.

그곳에는 지금보다 덜 낡은 그러나 더 삭막한 도서관과 도서관보다 더 땀 냄새에 젖은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친구들 웃음소리와 성난 외침, 무엇보다 너와 나의 꿈과 젊음이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벗어던지자던 노랫말이 깃발처럼 꽂혀있다. 그들은 변했고 나도 변해 이제는 모두 낡은 사진첩에서나 볼 수 있는 박제된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 중에는 영영 못 볼 얼굴도 있다. 그를 마지막 본 것도 바로 이 자리였으니 자하연은 그때도 아름다웠지만 지금 더욱 처연하게 아름답다.

언제는 자하연이 한결같았던가. 83년 봄 나를 맞이한 그곳이 75년 관악에 첫발을 디딘 이들의 눈에 비친 그곳,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바라보는 이곳과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연못에 무심코 흘려보낸 웃음과 눈물과 꿈의 의미,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오작교를 건너 모두 가고자 한 그곳의 의미는 언제든 누구에게든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래서 나는 오늘 과거에 대고, 미래에 대고 외친다. 아니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너와 나의 자하연, 우리 가슴속 뜨거운 핏줄기에 대고 외친다. 친구들아, 후배들아! 여기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고 무엇을 꿈꾸었든 처음 이곳에 선 순간 가슴에 품었던 열정만은 잊지 말기를. 그 열정이 꺼지지 않는 진리가 되어 어제처럼 오늘 또 내일 너희 앞길을 밝혀주기를.

자하연이 이보다 아름다웠던 적은 없다. 하지만 자하연은 더 아름다워야 한다. 우리 기억 저편의 자하연도, 빗물을 받아 훌쩍 불어난 오늘의 풀빛 자하연도 아름다워야 존속할 수 있으니, 순환도로변 잊혀진 어느 연못처럼 하루아침에 메워져 테니스장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열망도 교정의 이정표도 영원히 아름다워야 한다. 오작교야 없으면 어떠랴. 어차피 마음으로 건너는 연못인 것을. 하지만 젊음의 샘, 마음의 분화구만은 영원히 마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이 녹아있든 어디로 흘러가든 영원히 푸르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서울대사람들> 6호 게재 (2006. 7. 15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