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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 산책] 과학의 종말? - 홍성욱

2008.04.03.

[과학사 산책] 과학의 종말? -홍성욱

우리나라에서 중고등학생에게 추천되는 과학교양 서적 중에 존 호건(John Horgan)의 『과학의 종말』(End of Science)이란 책이 있다. 미국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의 과학기자를 지낸 저자가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로저 펜로스(Roger Penrose), 다니엘 데닛(Daniel Dennett)과 같은 유명한 과학자와 과학철학자들을 오랫동안 인터뷰해서 얻은 결론을 담은 책으로, 1996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었을 때부터 화제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호건은 현대 천문학이 우주의 진화에 대해서 깊이 이해를 했고, 물리학이 자연의 원천적인 힘과 입자를 밝혀냈으며, 생물학이 DNA의 구조를 비롯한 생명의 분자적 단위의 작동을 알아냈음을 높게 평가한다. 그는 현대 과학이 자연의 근본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의 참된 지식을 캐냈다고 본다.

호건의 주장이 여기서 끝났다면 사실 크게 새롭다고 할 것은 없다. 그렇지만 과학이 위대한 발견을 계속 이루었다는 사실에서 그는 “과학의 종말”을 예측한다. 호건은 과학자들이 인간 의식의 발생 메커니즘에 대해서 힌트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도 상충되는 ‘의견’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 등에 근거해서, 21세기의 과학이 20세기의 과학이 그랬던 것처럼 혁명적인 발전을 하기 힘들 것이라고 진단한다. 즉, 중요한 발견은 이미 다 이루어졌고, 지금 과학자들이 던지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은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알 수 없는 영역이라는 생각이다. 이제 과학에서는 혁명적인 발견이 아니라, 점진적인 축적과 교정만이 가능하리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네이처』(Nature)의 편집장을 20년 넘게 역임했던 저명한 과학자 매독스(John Maddox)는 호건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서 1998년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What Remains to be Discovered)이라는 책을 출판해서, 21세기에도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 지속되리라는 전망을 내어 놓기도 했다.

그런데 중요한 발견들이 다 이루어져서 과학이 종점에 다다르고 있다는 생각은 20세기 말엽에만 등장했던 것이 아니다. 18세기 중엽, 프랑스 계몽사조기에 『백과전서』를 편집했던 사상가 겸 과학자 디드로(Diderot)는 수학과 수리과학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수학화된 과학이 자연으로부터 질적인 아름다움과 고유성을 앗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디드로는 1754년에 출간된 『자연의 해석』(l'nterpretation de la nature)에서 수학이 거의 종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현재 과학에 있어서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는 시기에 살고 있다. 우리 시대의 여러 저술가들이 도덕, 소설, 자연사, 그리고 실험과학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해 보건데, 나는 앞으로 100년 동안 유럽에서는 손꼽을 만한 위대한 기하학자가 3명도 배출되지 않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기하학 분야는 머지않아 베르누이, 오일러, 달랑베르가 남겨 놓은 수준에서 정체될 것이다. 그들은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세운 셈이다. 우리는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물리학이 종말에 근접했다는 견해가 종종 표출되었다. 1871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븐디쉬 물리학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한 제임스 클럭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은 소장 취임 연설에서 최근 물리학, 특히 실험물리학의 발전 때문에 더 연구할 것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세간의 우려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대 물리학의 실험이 주로 측정으로 이루어졌다는 특성은 너무나도 분명해서, 이제 몇 년 이내에 모든 중요한 물리학 상수들의 근사 값이 구해질 것이고, 과학자들(men of science)에게는 이러한 측정을 소수점 다음 자리까지 계속하는 것만이 남겨진 유일한 과제가 될 것이라는 견해가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습니다. 물론 맥스웰은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물리학의 이론과 실험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연구 영역이 열릴 수 있으며, 캐븐디시 연구소가 이러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물리학이 거의 종점에 이르렀다는 생각은 맥스웰이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널리 퍼졌고 더 오래 지속되었다. 에테르(ether)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보임으로써 고전 물리학의 토대를 흔들고 상대성이론으로의 길을 닦았던 미국의 물리학자 마이켈슨(A.A. Michelson)은 1894년의 연설에서 물리학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견해에 동의한다는 생각을 나타냈다. 물리학의 미래에, 과거에 발견된 것보다 더 놀라운 경이로운 현상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결코 안전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기본 원리들은 확립되었고 앞으로의 발전은 주로 이 원리들을 우리가 주목하는 다른 현상에 엄격히 적용하는 데에서 추구될 것이라는 예상이 타당해 보입니다. 측정의 과학은 정성적 작업보다 정량적 결과가 더 요구되는 분야에서 특히 더욱 중요해집니다. 한 저명한 물리학자는 미래에는 물리학의 진리가 소수점 6번째 자리에서 추구될 것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이켈슨이 이러한 연설을 한 바로 직후 세상을 뒤흔든 발견들이 줄을 이었다. 1895년에 뢴트겐은 X선을 발견했고, 베퀘렐과 퀴리부부는 방사능 물질을 발견했다. 방사능 물질에는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에너지가 잠재해있음이 드러났다. 1897년에는 맥스웰의 후계자인 캐븐디시 연구소 3대 소장 J.J. 톰슨이 음극선 실험을 하다가 전자를 발견해서 미소물리학(microphysics)의 새 장을 열었다. 1900년에 독일의 이론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양자가설을 도입했고, 1905년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과 광량자론을 발표했다. 러더포드는 원자를 태양계와 비슷한 모델로 설명했고, 닐스 보어는 양자가설을 러더포드의 원자론에 적용해서 원자의 특성을 양자물리학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리학이 종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시점에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1909년, J.J. 톰슨은 “영국과학진흥회”에서의 연설에서 과학의 발전은 종말로의 수렴이 아니라 지속적인 발산을 낳는다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물리학에서 지난 몇 년 동안 행해진 새로운 과학적 발견들, 그리고 이런 발견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관념들과 가능성들은 그 주제의 종사자들에게 마치 르네상스가 문학가들에게 그랬던 것과 유사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열의가 북돋워졌고, 희망적이고 생동적이며 열광적인 정신이 퍼져 나갔으며, 이러한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20년 전에는 터무니없다고 여겨졌던 실험들을 확신을 가지고 수행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모든 중요한 현상들은 이미 다 발견되었고 이제 남은 작업은 물리 상수의 소수점 자리나 늘리는 것 정도뿐이라는 이전에 상당히 널리 퍼져있던 비관적인 생각들을 쓸어버렸습니다. 이 비관적인 생각들에 대한 정당한 근거는 없었으며, 과학이 최종목표에 도달했다는 어떤 징후도 없었습니다. 어쨌든 간에 현재 축적된 지식은 수렴하는 수열(converging series)이 아닌 발산하는 수열(diverging series)입니다. 과학의 발전이 ‘수렴하는 수열’이 아니라 ‘발산하는 수열’이라는 생각은 지금의 과학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생물학계 내에서는 ‘인간게놈계획’이 종료되어 인간게놈지도가 완성되면 생물학자의 연구는 컴퓨터가 다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렇지만 더 많은 생물 종의 게놈 지도가 완성되면 완성될수록 더 많은 연구주제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당분간 ‘과학의 종말’에 대한 호건의 걱정은 잊고 있어도 될 것 같다.